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7화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는 바람에 루시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저…… 노엘은요?”
“밖에.”
필릭스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따뜻한 숨이 다시 한번 목에 와 닿았다.
“너랑 단둘이 얘기하기 정말 어렵다.”
그가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긴 뒤 모자를 고쳐 쓰는 소리가 들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필릭스는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원했던 것처럼 보였으면서도, 막상 둘만 남게 되니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침내 침묵을 깨고 그가 물었다.
“잘 지냈어?”
이제 와 묻기엔 조금 우스운 질문.
“네…….”
“그날은 잘 들어갔지? 다른 별일은 없었고?”
루시는 그가 생일 연회가 있던 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그녀는 지난주, 베르크 공작으로부터 배달받은 선물들이 생각났다.
“아, 공작님께서 주신 선물은…… 감사하지만 안 받기로 했어요. 선배에겐 말해야 할 것 같아서요.”
루시의 말에 필릭스가 움찔했다.
“선물?”
되묻는 그의 목소리에서 놀람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테이블 하나를 가득 채울 만한 양의 선물을 보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던 것 같았다.
“아버지가 네게 선물을 보냈다고?”
“네…… 후원 체결이 맺어진 데 대한 기념이라고 하셨어요.”
필릭스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역시 후원까지 받는데 선물까지 받아 챙겨서 뻔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의 반응에 루시는 민망해져서 재차 자신의 결정을 알려 주었다.
“도, 돌려드릴 거예요. 부담스러워서…….”
“아냐, 돌려보내지 마.”
필릭스가 즉각 말했다.
“괜히 돌려보냈다간…… 긁어 부스럼이니까.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아…… 그래. 내가 잘 말해 줄게.”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럼…… 이제 나갈까요?”
“잠깐만.”
필릭스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그는 목을 가다듬듯 작게 헛기침을 했다. 얼마간 망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나…….”
“손님!”
그때 구멍 밖에서 불쑥 머리통이 나타났다. 나무 앞에서 안내해 주던 직원이었다. 그는 굉장히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바로 앞에 서 있던 필릭스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뒤에 줄 서서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으셔서요. 이 소원을 비는 나무 동굴은 1분 동안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나오라는 소리였다. 필릭스는 아쉬운 표정으로 루시를 한 번 돌아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동굴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라 루시가 동굴 밖으로 나오자, 뚱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노엘이 보였다. 그는 바닥을 한바탕 구르기라도 한 건지 한쪽 머리가 엉망으로 뻗쳐 있었다.
“이제 나오시네요.”
그가 뚱한 표정으로 필릭스에게 말했다.
“선배, 소원을 빌러 들어가면서 사람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게 어딨어요? 그렇게 나쁜 짓 하면 정령님이 노해서 들어주려던 소원도 안 들어준다고요.”
“그래? 그럼 착한 네가 들어가서 나 좀 용서해 달라고 소원 빌어라. 우린 이만 갈 테니까.”
이번엔 필릭스가 루시를 입구 쪽으로 떠밀며 데려갔다. 노엘이 씩씩거리며 뒤를 쫓아왔다.
* * *
오래 걸어 발바닥이 갈라질 것처럼 아플 때가 되어서야 루시는 깨달았다. 이 거대한 식물원은 하루 만에 다 둘러볼 수 없다는 것을.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종의 식물들이 존재하다니.
당연한 사실이지만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심상치 않은 걸음걸이를 보고 노엘은 이만 퇴장하자고 말했다. 나머지 부분은 다음 방문을 기약하자고 말하며.
출구로 가는 길목에서는 직원이 꽤나 귀여운 기념품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바로 화분에 씨앗을 직접 심어 가지고 갈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루시의 손바닥보다 작은 그 화분은 척 보기에도 앙증맞고 귀여웠다.
루시와 필릭스, 노엘도 직원으로부터 작은 화분과 씨앗을 각각 받았다. 씨앗의 종류는 알려 주지 않았다. 단지 꽃을 피우면 알 수 있게 된다고 직원은 설명했다.
“이상한 게 자라는 건 아니겠죠?”
노엘이 직원에게 받은 씨앗을 손바닥 위에 올려 두고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눈 달린 꽃이라든가…… 입을 뻐끔대는 꽃이라든가…….”
그는 아까 본 식인 꽃이 떠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걱정 마세요! 이건 그냥 일반 꽃이랍니다.”
노엘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무슨 꽃이 필까 기다리는 재미도 있죠. 씨앗을 심은 뒤, 일행분들에게 선물하셔도 좋아요.”
직원의 말이 끝나자, 필릭스와 노엘 사이에는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들은 곧장 손을 꼼지락거리며 화분에 어설프게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루시에게 동시에 자신들의 화분을 건넸다.
“어…… 고마워요.”
루시는 두 화분을 건네받으며 답했다. 문제는 그녀가 가진 화분은 하나뿐이라는 것이었다. 앞에서는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며 자신에게 화분을 건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주세요, 저!”
노엘이 루시 앞에 손을 내밀며 떼쓰듯 말했다.
“제가 잘 키울게요. 네?”
노엘이 눈을 빛냈다.
“필은 성격이 괴팍하잖아요. 아까 꽃이랑 드잡이하는 거 봤죠? 이런 작은 화분도 금방 죽일걸요?”
그는 상대방에 대한 비방도 서슴지 않았다. 필릭스는 금방이라도 노엘의 뒷덜미를 잡아챌 것처럼 손을 올렸다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다시 내렸다.
그 대신 그는 루시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역시 화분을 받고 싶다는 열망으로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루시는 난처해졌다. 화분을 하나 더 받을 수 있을까 직원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친절하지만 단호한 얼굴로 하나 더 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머리는 노엘에게 주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엘 옆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필릭스를 보자니 마음이 흔들렸다.
아휴.
루시는 눈을 질끈 감아 버리며 필릭스에게 화분을 내밀었다.
“네? 진심이세요?”
노엘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들어올 때 입장료를 선배가 내셨으니까…….”
루시는 얼굴을 붉히며 변명했다.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그가 입장료를 내지 않았더라도 그에게 화분을 주고 싶었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필릭스는 순식간에 밝아진 표정으로 화분을 건네받았다. 이어 그가 노엘을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노엘은 혀를 끌끌 차더니 루시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선배도 참.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떡해요?”
“뭐, 뭐가?”
“저 기세등등해진 표정을 보세요. 선배가 그렇게 무르게 굴면 저쪽에서 도리어 우습게 본다니까요? 아직은 용서해 줄 때가 아니라고요.”
그러더니 그는 “나 참, 이제까지 애태운 게 헛수고가 됐네…….” 하며 중얼거렸다.
오늘 하루 종일 노엘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무르게 굴고 있다는 말에는 루시도 동의하는 바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녀는 줏대 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단호하게 잘라 내야 한다고 결심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 쉽게 줘 버리다니.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또 다른 루시가 그 말에 반박했다.
그럼 어떡해! 바로 앞에서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데…… 안 줄 수가 없었단 말이야.
필릭스의 눈은 그녀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루시는 이제 최대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 *
베델 식물원을 나온 노엘은 광장에서 가까운 어느 고급 식당으로 루시를 데려갔다. 물론 필릭스 역시 아니꼬운 얼굴로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직원이 다가와 친절하게 응대했다. 그는 루시와 노엘을 창가에 있는 테이블로 안내하다가 필릭스를 보고는 황급히 어깨를 붙잡았다.
“시중드는 사람은 저기서 대기해요.”
그는 식당 입구 옆에 마련된, 등받이도 없는 긴 나무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이미 시종, 마부로 보이는 자들이 앉아 자신들의 주인이 식사가 끝나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직원이 가리킨 방향을 확인한 필릭스의 표정이 삐딱하게 구겨졌다.
“이 사람도 함께 식사할 거예요!”
루시가 저도 모르게 놀란 얼굴로 필릭스의 팔을 끌어당겼다. 직원은 허름한 복장의 필릭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시는 주인과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하인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처럼 서 있던 노엘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직원에게 묘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우리 레이디께서 마음이 넓으셔서. 미천한 하인 놈의 식사까지도 세심하게 챙기시는 편이죠.”
그러더니 필릭스까지 함께 테이블로 데려가겠다고 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직원이 필릭스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졸지에 하인 취급을 받은 필릭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창가로 몸을 틀었지만, 노엘이 그를 막더니 말했다.
“필, 버릇이 없구나. 너에게 기꺼이 동석을 허락해 주신 아가씨께 뭐라고 인사해야 하지?”
루시는 경악한 표정으로 노엘을 바라보았다.
얘……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그러나 노엘은 이 상황이 그저 재밌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기까지 했다. 필릭스는 당장이라도 노엘을 들쳐 멘 뒤 땅에 메다꽂을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여기서 화내면 안 되는데……!
루시가 초조한 기색으로 둘을 보고 있는데, 필릭스가 화를 꾹 눌러 참는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직원뿐만 아니라 식당에 들어서던 다른 손님들도 이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윽고 필릭스가 붉어진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가, 감사합니다,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