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6화
베델 식물원은 생각보다 더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곳이었다. 아름다운 꽃에 치중하여 화원처럼 꾸며져 있다기보다는, 온갖 신기하고 괴기스러운 식물들로 채워 놓아 관람객들에게 새로움과 충격을 선사하고 있었다.
선명한 붉은 꽃잎에 검은 반점이 찍혀 있는 열대 지방 꽃, 거대한 뱀처럼 나무를 구불구불 타고 오르는 이상한 덩굴 식물, 한눈에 보아도 위험해 보이는 화려한 색깔의 버섯들까지.
“예쁜 꽃이 있을 줄 알았는데, 괴상한 것 천지네요.”
유리 온실 안. 산책로처럼 꾸며진 길을 따라 걸으며 노엘이 말했다. 화단마다 각기 다른 종류로 심어진 식물들을 구경하는 그의 눈은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가 경악으로 찡그려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이러면 기분 전환도 안 되겠는데요?”
수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촉수처럼 긴 다리가 흐물거리고 있는 꽃을 본 그가 마침내 속마음을 내뱉었다.
“왜? 난 재밌는데.”
“선배는 이런 게 왜 좋아요? 꿈에 나올까 무섭네, 난.”
“딱히 예쁜 게 보고 싶은 건 아냐. 확실히 생김새가 이상하긴 하지만…… 신기하고 알아 두면 유용하잖아.”
“이런 게요?”
악취를 풍기는 또 다른 꽃 앞에서 노엘이 한껏 인상을 구기며 코를 막았다. 그는 대충 둘러보느라 잘 몰랐겠지만, 루시는 울타리 앞마다 세워져 있는 작은 안내판을 하나하나 읽어 보는 중이었다. 거기엔 난생처음 보는 식물들의 이름과 그 효능, 어떤 약의 재료로 쓰일 수 있는지까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어서 다른 데로 가요. 코에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노엘이 여전히 코를 틀어쥔 채 루시를 끌어당겼다. 루시 역시 냄새가 생각보다 역하다고 생각하던 차였으므로 이번엔 순순히 발을 떼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필릭스는 별다른 말없이 묵묵히 그들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노엘처럼 괴상한 생김새의 식물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어떤 식물들은 예외로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건지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는 관심을 보였다. 특히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덩굴 앞에서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손으로 몰래 찔러 보기까지 했다. 그러다가도 루시와 노엘이 장소를 이동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뒤따라왔다.
계속되는 식물관 관람.
그들은 마침내 그곳에서 제일 괴상하게 생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한 꽃 앞에서 멈춰 섰다.
그건 바로 사람의 입을 가진 식인 꽃이었다.
아이 하나는 거뜬히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의 그 생명체는 언뜻 보면 커다란 꽃봉오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봉오리 끝에는 보기에도 징그럽고 무시무시한 입을 가지고 있었다. 그 꽃이 꿈틀거리며 입을 벌렸다 닫았다 할 때마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딱딱거리며 소리를 냈다.
“토할 것 같아요.”
노엘이 말했다. 그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안색이 창백했다. 괴이한 식물들을 학문적인 관점에서 흥미롭게 보고 있던 루시조차도, 이 식물의 외관을 보고는 깜짝 놀랐으니 그럴 만했다.
“속이 메슥거려요. 저렇게까지 생길 필요가 있나요?”
루시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그래도 이 식물원에서 제일 신비하고 흥미로운 꽃이었다. 정말이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소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건가 봐. 저 안에 혀도 있을까?”
루시가 궁금해했다. 그러자 노엘이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표정으로 필릭스를 향해 말했다.
“들었지, 필? 아가씨께서 안이 궁금하시단다.”
즉각 짜증이 가득한 눈초리가 날아왔다. 필릭스는 삐딱하게 선 채로 노엘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개적인 장소라는 것과 옆에 루시가 있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입은 노엘은 계속해서 깐죽거렸다.
“안에 손이라도 넣어 보지 그래?”
필릭스의 표정이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마치 당장이라도 자신의 손이 아닌 노엘의 머리통을 잡아넣어 볼 것 같은 표정이었다.
노엘은 싱글거리며 루시의 귓가에 속삭였다.
“화났다, 화났다.”
“그만해, 노엘.”
루시가 엄한 목소리로 그를 나무랐다.
이러다가 또 싸움 날라.
둘이 빈 교실에서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리던 모습이 떠올라 루시는 걱정스럽게 필릭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노엘을 쏘아보던 필릭스는 식인 꽃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어떤 생각에 잠겼다. 잠깐 고민하는가 싶던 그가 갑자기 울타리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그것을 넘어 화단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하자, 루시는 깜짝 놀랐다.
“어? 필릭스 선배.”
루시가 불렀지만 그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이내 필릭스가 식인 꽃 옆에 가 섰다. 그리고 루시가 말릴 새도 없이 멱살을 잡듯 식물의 옆 통을 그러쥐었다. 난데없이 인간의 손에 붙잡힌 꽃이 꿈틀거리며 입을 크게 벌렸다.
딱딱딱딱딱!
이빨이 부딪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필릭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갑자기 그 식물을 위로 잡아당겼다. 식물이 눕혀지며 위를 향하고 있던 입이 사람들 쪽으로 천천히 기울어졌다.
그 자세로 필릭스는 루시를 향해 비밀스럽게 말했다.
“루시! ……자, 어서 봐!”
그는 루시가 안을 잘 살펴볼 수 있게끔 더욱 높게 식물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보여? 근데…… 안에 혀는 없는 것 같다.”
별안간 근처에서 새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 귀부인이 지르는 소리였다. 그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필릭스를 보고 있었다. 한 청년이 식인 꽃의 멱살을 거머쥐고 사투를 벌이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덩달아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필릭스에게로 향했다. 곧 온실 안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저 미친 인간!”
노엘은 경악을 했다. 그가 루시의 손목을 잡고 서둘러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얼른 도망가요! 창피해서, 진짜!”
그가 루시를 데리고 인파를 헤치며 자리를 벗어났다. 뒤에서 “어디 가!” 하고 필릭스가 외쳤다.
반대편에서는 식물원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그 역시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필릭스에게 소리를 질렀다.
“손님! 뭐 하시는 거예요!”
* * *
“창피해 죽는 줄 알았네! 무식하게 힘만 세 가지고!”
“임마! 네가 안을 보여 달라며!”
“당연히 농담이었죠! 진짜로 보여 주는 미친놈이 어딨냐고요!”
“그딴 쓸데없는 농담은 왜 지껄여?”
식인 꽃 앞에서 도망친 뒤. 필릭스와 노엘은 길을 따라가며 쉬지 않고 투닥투닥거렸다. 양쪽에서 왕왕대는 통에 루시는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필릭스는 신분을 숨기면서까지 따라왔다는 사실마저 잊은 듯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안 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흘끔거린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분명 차림새는 하인인데 귀족가의 영식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지지 않고 대거리를 하는 모습이 이상해 보여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 번씩 그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서, 선배…….”
보다 못한 루시가 필릭스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요.”
그제야 필릭스는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흘끔거리며 지나간다는 것을 깨닫고는 쳇, 혀를 차며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그가 노엘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길에 보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에 그들은 식물원의 중앙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에는 족히 육 층은 될 법한 높이로 천장이 탁 트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이 식물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떡갈나무가 서 있었다.
“와, 천 년이나 산 나무래요.”
나무 앞에 설치된 안내판을 읽으며 노엘이 말했다.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신비한 나무로, 밑동에 있는 거대한 구멍 속으로 들어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있다……. 저기 말인가 봐요.”
노엘이 나무 밑동에 있는 동굴 같은 구멍을 가리켰다. 그 앞에는 소원을 빌고자 하는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었다.
“자, 선배. 마침 잘됐네요. 우리도 여기서 우울한 거 다 털어 버리고 새로운 기운을 받아 가자고요!”
노엘이 루시를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루시의 차례가 돌아왔다. 구멍 앞에 서 있던 직원은 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만큼 1분 동안만 소원을 빌 수 있다고 안내해 주었다.
구멍에 들어가기 전, 노엘은 따라 들어오려는 필릭스를 막으며 말했다.
“필, 여기서 기다려. 구멍이 작아서 두 명 밖에 못 들어갈 것 같으니까.”
그러고 보니 구멍은 두 명이 들어가면 꽉 찰 것 같은 크기였다. 구멍 안을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들도 연인이나 부부처럼 모두 두 사람씩이었다.
“자, 들어가요, 선배.”
노엘이 루시를 부드럽게 밀며 구멍 속으로 들어가게 했다.
“윽, 어둡네.”
뒤에서 노엘의 살짝 겁먹은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말대로 구멍 속은 어두웠고, 작은 초 몇 개만이 켜져 있었다. 은은한 오렌지빛 불빛이 작게 구멍 안을 밝혀 주었지만 바닥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루시는 울퉁불퉁한 바닥 위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뒤에서 노엘의 손이 루시의 팔을 가만히 잡아 주었다.
“아, 고마워.”
두 사람이 들어오자 구멍 안이 꽉 찼다. 루시는 몸도 틀기 힘든 공간 속에서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말했다.
“근데 여기 너무 좁다. 어서 소원 빌고 나가자.”
노엘은 대답이 없었다. 귓가에 그의 따뜻한 숨결이 와 닿았다. 아무래도 먼저 소원을 빌기 시작한 것 같았다.
루시도 눈을 감았다. 처음엔 유치한 미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정말로 정령이 소원을 들어줄 것 같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 빌까 고민하던 그녀는 브롬에 있는 가족들의 건강을 빌었다.
“난 다 빌었어.”
다시 눈을 뜬 그녀가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나갈…….”
루시는 말을 멈췄다.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노엘이 아니라 필릭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