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5화
간만에 학업에서 벗어나 나들이를 가는 루시를 응원해 주기라도 하듯이, 주말은 화창하고 온화했다. 식물원에 가기엔 더없이 쾌적한 날씨였다.
오늘만큼은 루시도 교복을 벗고 발목 위로 오는 넉넉한 드레스를 입었다. 신발도 제일 편한 것으로 신었다.
노엘에게서 놀러 가자는 제안을 들었을 땐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막상 가려고 준비를 끝내니 묘하게 들뜨기까지 했다. 아마 식물원에는 이제껏 루시가 보지 못했던 희귀한 식물들이 잔뜩 있을 터였다.
노엘은 신사적이게도 여학생 기숙사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루시는 그를 보자마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노엘은 여성복 못지않게 프릴이 잔뜩 들어간 흰 블라우스에 자수가 화려하게 들어간 재킷을 입고 있었다. 실용적이고 편한 것에만 중점을 둔 루시의 차림새와 비교하면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멋을 부린 복장이었다.
하지만 그게 또 잘 어울리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루시는 기숙사에서 나오던 다른 여학생들이 몰래 눈빛을 주고받으며 노엘을 흘끔거리는 것을 보았다.
영락없이 도련님 모시는 시녀처럼 보일 것 같은데.
자신과 노엘의 복장을 비교하며 루시는 생각했다. 만약 노엘이 그녀를 에스코트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둘은 노엘이 미리 대기시켜 놓은 마차를 향해 갔다. 마차는 정문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부가 문을 열어 주자 루시가 노엘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노엘까지 마차에 탄 뒤 마부가 문을 닫았을 때.
벌컥!
별안간 문이 다시 열렸다.
루시와 노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와,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노엘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는 필릭스를 향해 말했다.
“시간도 안 알려 주고 그냥 주말이라고만 했는데, 대체 어떻게 알고 나온…… 아니, 근데 옷이 왜 그래요?”
별안간 노엘이 필릭스의 복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놀란 것은 루시도 마찬가지였다.
필릭스는 어디서 구한 건지, 하층민 남자들이 입는 누런 셔츠 하나와 작업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헌팅캡 아래 살짝 드러난 그의 머리카락 색은 언제나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금발이 아니었다.
“염색했어요?”
노엘이 새까매진 그의 머리칼을 보며 물었다.
필릭스는 그의 질문을 싹 무시하며 마차에 오른 뒤, 루시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루시가 만만치 않게 놀란 표정으로 그의 머리칼을 쳐다보고 있자, 조용히 설명했다.
“일회성 염색약이야. 감으면 다시 돌아올 거고.”
“갑자기 웬 변장인데요?”
그 질문 역시 필릭스는 깔끔히 무시했으나, 옆자리에서 루시가 역시나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싫어서.”
“그럼 그냥 방에 있으세요아악!”
발목을 걷어차인 노엘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가 흘리는 신음 소리는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 소음에 묻혀 버렸다. 곧 속력을 낸 마차가 빠르게 길을 달려 나갔다.
* * *
“아무튼, 저는 허락을 하지 않았는데요. 저 선배가 멋대로 끼겠다네요. 죄송해요, 루시 선배.”
평평한 도로 위에서 안정감 있게 달리는 마차 안.
노엘이 여전히 욱신거리는 발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루시는 그저 어색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필릭스가 있는 쪽으로는 고개를 돌릴 생각조차 못 했다. 그건 필릭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몇 번인가 루시의 기분을 살피듯 슬쩍 힐끔대고는 줄곧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내 조용한 필릭스를 보며 노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변장을 위해서라곤 해도 그런 꼴로 나타나신 건, 오늘 하루 기꺼이 하인 노릇을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죠?”
필릭스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눈을 치떴다.
“하려면 완벽히 해야죠. 우리가 맞춰서 연기해 줄게요. 그쵸, 루시 선배?”
질문을 던진 노엘은 루시가 대답하기도 전에 “봐요, 맞춰 준다잖아요.” 하며 필릭스의 약을 올렸다. 그는 거기서 그만두지 않고 그의 가명까지 대신 지어 주는 정성을 보였다.
“필릭스 말고 ‘필’. 필이라고 부를게요. 그리고 주인이 하인한테 존댓말을 쓰는 것도 이상하니까, 오늘은 반말할게, 필.”
얄궂게 필릭스의 속을 긁어 대던 노엘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필릭스가 입을 꾹 다문 채 살벌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노엘은 황급히 두 발을 의자 위로 올리더니 방어하듯 손으로 감쌌다.
휙휙 지나가는 창밖 풍경과 노엘을 번갈아 바라본 필릭스가 곧 입을 열었다.
“야.”
“왜, 왜요.”
“너 지금 여기서 내리는 건 무리겠지?”
“예에?”
“착지할 때 한 바퀴 구르면 크게는 안 다칠 텐데…….”
그 말을 하며 필릭스가 진지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엘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그는 입을 꾹 다물더니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여 벽에 바짝 붙었다.
마차 안에는 순식간에 침묵이 찾아왔다. 그 후, 마차가 멈추어 설 때까지 노엘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 * *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차는 베델 중심가에 도착했다. 아카데미와 가까운 타운도 큰 편이었지만, 베델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확연히 많았다.
복잡한 도로 위에서 노엘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뒤따라 내리려는 루시를 향해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러나 루시가 그 손을 잡기도 전에 뒤에서 다른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크고 힘줄이 돋아난 그 손은 망설임 없이 노엘의 매끈한 손을 덥석 잡아챘다.
졸지에 필릭스를 에스코트하는 꼴이 되어 버린 노엘이 그를 향해 떫은 눈길을 보냈다.
“아, 뭐예요, 선배애애아아악.”
별안간 그가 비명을 질렀다. 필릭스가 손을 놓아주자마자 그는 자신의 빨개진 손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루시는 필릭스가 아파하는 노엘의 등 뒤로 다가가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그 은밀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의 으르렁대는 목소리는 루시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까불지 마.”
경고 같은 말을 남기고 뒤돌아선 필릭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마차 앞으로 다가와 노엘 대신 루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시는 문가에 선 채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
루시는 망설였다.
하인처럼 꾸몄더라도, 필릭스 베르크는 필릭스 베르크였다. 언제든지 그녀가 사는 세상을 떠나 원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선뜻 그 손을 잡기가 망설여졌다. 그 손을 잡는 순간 다시 시작될 것만 같았다. 마음을 멋대로 설레게 만드는, 그 고문 같은 기대감이.
더 이상 그에게 휘둘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루시는 손에서 시선을 거두며 혼자 땅 위로 내려섰다.
“……노엘과 저는 식물원까지 따로 갈게요. 여기서 이만 헤어지는 게 좋겠어요.”
루시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필릭스는 순간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실망으로 손을 떨어뜨렸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런 필릭스를 보는 루시도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으며 그에게서 돌아섰다. 그의 기분이 상했더라도 매정하게 끊어 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언젠가 한 번은 그와 그녀, 둘 다 크게 상처받는 날이 오고 말 테니까. 방금의 아픔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큰 상처가.
“가자, 노엘.”
루시는 마음이 더 약해지기 전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노엘이 그녀에게 의외라는 눈빛을 보내며 그녀를 뒤따라왔다.
“오오, 선배. 마음을 독하게 먹으셨나 본데요. 하긴, 연애 초반엔 이런 유치한 자존심 싸움이 많죠. 더 싸우긴 싫은데 그렇다고 괜히 먼저 숙이고 들어가기도 싫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무튼 잘하고 있다고요.”
알쏭달쏭한 말을 늘어놓으며 노엘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잠시 후, 뒤를 돌아본 그가 루시에게 속삭였다.
“뒤에서 따라오고 있어요.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라 미련 없이 자존심부터 챙길 줄 알았는데. 은근히 구질구질한 데가 있네요.”
그의 말에 루시도 슬쩍 뒤를 돌아보자 몇 발자국 떨어진 뒤에서 그들을 따라오고 있는 필릭스가 보였다.
“그래도 눈길 주면 안 돼요, 선배. 먼저 관심 주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요. 알죠?”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루시는 노엘의 말을 얼렁뚱땅 넘겨 버린 후, 계속 앞만 보며 걸어 나갔다. 하지만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필릭스의 존재가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얼마 걷지 않아서 베델 식물원이 나타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줄곧 필릭스를 신경 쓰며 걸어오던 루시는 한순간에 그 아름답고 거대한 건축물에 정신을 빼앗겼다.
거대한 온실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높이 솟아 있었다. 길거리의 울긋불긋한 풍경들과는 다르게 온실 속에는 오직 한여름의 초목들처럼 푸릇푸릇한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와, 여긴 마치 딴 세상 같아.”
“그렇죠? 오길 잘했죠?”
루시가 홀린 듯이 하는 말에 노엘은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대답을 채근했다.
그들은 식물원의 입구에 위치한 매표소 앞으로 갔다. 루시와 노엘이 직원에게 말을 걸려고 다가갔을 때, 갑자기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불쑥 나타난 필릭스의 등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루시는 그가 세 명의 입장료를 내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팔을 붙들었다. 하지만 노엘이 그녀를 말렸다.
“됐어요, 저 선배더러 내라고 해요. 꼽사리 꼈으면 그 정도는 해야죠.”
그러더니 루시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막무가내로 안으로 데려갔다.
“잠깐만……!”
“돈 내고 와, 필!”
노엘이 루시를 끌고 들어가며 필릭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필릭스는 그런 노엘을 아니꼽게 쏘아보았지만, 이내 별다른 말없이 입장료를 지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