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4화
루시가 비켜 주자마자 베르크가의 하녀들은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들고 있던 것들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테이블은 뭔지 알 수 없는 수상한 상자들로 꽉 찼다.
“베르크 공작께서 후원 체결을 기념하여 키넌 양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진열해 놓은 선물 앞에 다소곳이 선 메리가 말했다. 선물이라는 말에 루시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우와!”
당황스러운 루시와는 달리, 곁에 서 있던 제미마가 더 흥분하여 앞으로 나섰다.
“이게 다 공작가에서 보낸 선물이라고요? 그리고 후원 체결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정신없이 질문을 퍼부으며 그녀가 선물을 하나씩 들어 보았다. 금방이라도 포장을 풀어 버릴 것처럼 제미마의 손가락이 리본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선물을 받은 당사자는 난처한 얼굴이었다. 루시는 어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선 자리에서 눈알만 데굴데굴 굴려 댔다.
선물에 대한 기쁨과 놀라움보다 부담스러움이 먼저 찾아왔다. 공작이 밀어붙이듯 성사된 후원 계약도, 주말 아침부터 방 안으로 들이닥친 선물들도, 모두 다 일방적이었다. 게다가 어젯밤 눈앞에서 마주한 베르크 공작의 얼굴을 떠올리니 루시는 알 수 없는 껄끄러움이 느껴졌다.
“저…… 이건 너무 부담스러운데요. 후원까지 받게 된 마당에…… 이런 선물까지 받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베르크가의 피후견인이라면 모두 똑같이 받는 선물이랍니다.”
메리가 친절한 미소를 띤 채 설명했다.
“주인님께서 부담 갖지 말라 전하셨습니다.”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나요?
루시가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메리는 그녀를 항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곧바로 그녀는 다른 사용인들을 데리고 방을 나가려 했다.
“잠깐만요! 아무래도 못 받겠어요. 다시 가져가 주세요!”
루시가 그들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선물과 꽃들을 방 안에 가득 던져두고서 그들은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방을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제미마가 선물이 쌓인 테이블 앞에 냉큼 앉았다.
“대체 후원이 무슨 말이냐니까? 그리고 이거 지금 풀어 볼 거지? 응?”
루시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제미마의 성급한 손은 이미 리본을 풀고 있었다. 상자를 연 제미마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감탄했다. 선물들은 루시 나이대의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급 드레스와 구두,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역시 부담스러웠다.
“안 되겠어.”
루시는 제미마가 열어 놓은 상자의 뚜껑을 주워 다시 덮었다. 그리고 리본을 둘러 원래대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제미마가 아쉬운 얼굴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다시 돌려주게?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너무 비싸잖아.”
게다가 필릭스의 얼굴을 떠올리자니 선물을 받는 게 염치가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제가 다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포장되는 선물들을 바라보고 있던 제미마가 꽃바구니로 눈을 돌렸다.
“이것도 돌려보낼 거야? 꽃은 어차피 시들잖아. 돌려보내도 공작가에선 쓰레기라고 생각할걸.”
제미마가 커다란 꽃바구니를 들어 창가로 가져갔다. 그녀는 시들해진 꽃 몇 송이가 꽂혀 있는 꽃병을 옆으로 치워 버린 뒤, 그 자리에 바구니를 올렸다. 알록달록한 붉은 꽃들로 가득 채워진 창가는 곧 화사한 분위기로 탈바꿈했다.
“와! 예쁘다.”
제미마가 바구니를 바라보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하지만 루시는 이내 꽃에서 눈을 뗀 뒤, 리본을 마저 매듭지었다.
* * *
도서관에서 루시는 선물을 어떻게 다시 공작가로 돌려보내야 할까 고민에 빠져 있었다.
설마 기분 나빠 하시진 않겠지.
골똘히 생각하다가도 언짢아하는 공작의 얼굴을 상상하면 섬찟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한번 떠올려 봐도 아들들과는 닮은 점을 찾기 힘든 사람이었다. 다정한 아드리안이나, 심지어 버럭 화를 낼 때는 있지만 결코 남을 무시하지는 않는 필릭스를 생각하면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딴판이었다.
공작이라는 자리에 오르면 다 그렇게 되는 건가? 그럼 필릭스 선배도 공작이 되면…….
루시는 작위를 계승하여 사람들을 거느리게 된 그를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 지금의 공작처럼 냉혈하고 싸늘한 느낌의 그를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루시 선배, 아직도 기운이 없는 거예요?”
그때 멍하니 앉아 있는 루시의 어깨를 누군가 툭툭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자 가볍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노엘이 보였다.
“저랑 교대할 시간인데요.”
“아, 벌써 시간이…….”
루시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딴생각에 빠져 있느라 도서관 업무도 설렁설렁 해 버렸다. 양심에 찔려 그녀는 다 정리하지 못한 도서들만이라도 해결하고자 소파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노엘이 그녀 옆에 털썩 앉더니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 왜?”
노엘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운 좀 내세요. 축 처져 있지 말고요. 다음 시험에서 잘하면 된다니까요?”
아무래도 노엘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주말에 내가 놀아 줄까요?”
뜬금없는 제안에 루시는 갑작스러워서 “어…….”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앉았다.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데 주말까지 기숙사에 틀어박혀 있으면 더 안 좋아지지 않겠어요? 같이 어디 놀러 가요!”
노엘이 자신의 기분을 신경 써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의 제안이 솔깃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단둘이서 아카데미 밖으로 외출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글쎄, 난…….”
“그러지 말고요. 사실은 우리 형 때문에 미안해서 그래요. 선배의 기분을 확실히 풀어 주고 싶다고요! 그래서 식물원까지 알아봤는데.”
“식물원?”
식물원이라는 말에 루시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노엘이 씩 웃으며 적극적으로 설명에 나섰다.
“베델에 있는 커다란 식물원이요.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식물원인데, 선배라면 분명 좋아할걸요.”
좋아하다마다.
베델 식물원의 존재는 이미 루시도 알고 있었다. 8년 전, 수도를 방문했을 때 그녀가 꼭 가 보고 싶어 했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온실이 공사 중이었기 때문에 애석하게도 입장할 수 없었다. 먼발치에서 아쉬운 눈길로 건물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때요? 가 보고 싶지 않아요?”
노엘이 은근한 미소를 보내며 거듭 물었다.
“이제 날이 추워지면 야외 정원에 꽃도 줄어들 텐데……. 그럼 내년에야 볼 수 있다고요.”
노엘의 설득에 루시의 마음이 점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갈 거죠?”
“……그래.”
“야호!”
루시의 입에서 승낙이 떨어지자 노엘이 주먹을 불끈 쥐며 즐거워했다. 처음엔 그다지 내키지 않았던 루시도 그렇게나 좋아하는 노엘을 보자 그냥 마음을 놓고 피식 웃어 버렸다.
“어딜 가는데?”
정수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아드리안의 목소리지만, 아드리안처럼 다정한 말투는 아니다.
루시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필릭스가 서 있었다. 이마를 길게 덮은 앞머리 사이에서 호수같이 푸른 눈이 언제나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치자마자 루시는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어딜 가냐고.”
필릭스가 이번에는 노엘을 보며 물었다. 그의 눈빛이 꽤나 날카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노엘은 전혀 기가 죽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요? 있어요.”
그 대답에 필릭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안 그래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후배가 앞에서 뺀질뺀질하게 구니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이 루시에게로, 다시 노엘에게로, 그리고 다시 루시에게로 옮겨 왔다.
그가 빤히 루시를 내려다보았다.
“뭐 할 말 있어요?”
“어.”
노엘이 묻는 말에 필릭스는 루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루시는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필릭스가 말을 걸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새로 생긴 버릇이었다.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로부터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휴게 공간에 관심을 주고 있는 사람은 다행히도 없었다.
뒤에서 소파에 손을 짚고 서 있던 필릭스가 소파를 돌아 루시 앞으로 다가왔다. 루시는 긴장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람도 많은데 여기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녀가 걱정스런 얼굴로 손만 꼼지락거리는 순간, 갑자기 필릭스가 노엘의 팔을 움켜잡았다.
“너 잠깐 밖으로 나와 봐.”
“으억! 왜 이래요!”
노엘의 호리호리한 몸이 필릭스에 의해 단숨에 일으켜졌다. 필릭스는 그가 휘청거리든 말든, 우악스럽게 팔을 잡은 채로 끌고 가려 했다.
“루시 선배, 살려 줘요!”
노엘이 긴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루시가 우왕좌왕하며 그를 말려 보려 했지만, 필릭스는 발버둥 치는 노엘을 어깨에 둘러멨다. 이 소란에 몇몇 학생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기 시작하자, 필릭스는 노엘을 번쩍 든 상태 그대로 서둘러 도서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어…….”
홀로 소파에 덩그러니 남은 루시가 두 사람이 사라진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 후, 노엘은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몸은 멀쩡해 보였다. 그 짧은 새 안색이 급격하게 피곤해진 것을 빼고는.
“……선배, 주말에 식물원. 가실 거죠?”
노엘은 들어오자마자 아까 전보다 확연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으응. 너 괜찮아?”
“그럼요.”
노엘이 기운 없이 대답했다.
“그럼 주말 오전에 데리러 갈게요.”
그러더니 그는 퀭한 눈으로 북 카트 위의 반납 도서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