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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3화 (63/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3화

그는 루시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기까지 했다. 이어 자신이 후원 사업을 시작한 것도 바로 베르크 가문의 후원 사업을 보고 감명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도 설명했다. 베르크 공작가의 후원을 받게 되는 일을 아주 대단한 영예라 여기는 듯했다.

베르크가에 대한 웨인 밀라드의 칭송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마침내 그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 루시는 자신이 공작의 후원을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게 어려운 분위기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루시와 공작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웨인 밀라드는 모자를 벗고 공작에게 인사한 뒤 집무실을 떠나려 했다. 그 전에 그가 루시에게 가볍게 속삭였다.

“키넌 양, 후원의 기회는 공작님께 양보하게 되었지만, 내가 주관하는 ‘유명 인사와의 만남’ 행사에 키넌 양이 참석하는 것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러더니 그는 루시에게도 가볍게 묵례한 후, 집무실을 떠났다.

정적이 감도는 공작의 집무실엔 어서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 한 사람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흐르는 정적에 숨이 막혀 올 때 즈음. 공작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을 내려놓았다. 후원 계약서였다. 루시는 그 종이를 불편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시 한번 부담 갖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군.”

그런 루시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공작이 말했다.

사실 루시가 이 후원 계약을 거절할 만한 이유는 전혀 없었다. 굳이 꼽으라면 왠지 찝찝한 공작과 필릭스와의 껄끄러운 관계 정도였는데, 둘 다 가족들과 코너 남작에게 경제적 부담을 지우면서까지 후원을 거절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 후원 계약을 놓치게 된다면 사람들에게 바보 소리를 들을 정도로 루시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웨인 밀라드는 그녀가 공작과 후원 계약을 맺기를 바라는 듯했고, 이 연회에서 다른 후원자를 구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뭘 망설이는지 모르겠군.”

계약서만 심각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는 루시를 보며 공작이 말했다.

“혹 내 후원을 받지 못할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그는 소파에 기대어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루시를 응시했다.

“……예를 들면 내 아들과 어떤 문제가 있다거나?”

은근한 물음에 얼빠진 얼굴로 공작의 얼굴을 쳐다보던 루시가 곧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공작님.”

“그럼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군.”

공작이 테이블 위의 펜을 눈짓했다. 소리 없는 강요였다. 그는 루시가 서명을 할 때까지 기어코 그녀를 붙잡아 둘 기세처럼 보였다.

결국 루시는 머뭇거리다가 펜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그녀가 공작의 이름 밑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베르크가의 피후견인이 된 것을 축하하네.”

펜을 내려놓자 공작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한 채 앉아 있는 루시의 손에는 후원 계약서의 사본이 쥐어졌다.

“자네가 제국의 큰 일꾼이 되는 데 베르크 가문의 후원이 좋은 발판이 되었으면 좋겠군.”

진심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끝낸 뒤, 공작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나가도 좋다는 의미였다. 루시는 멍한 얼굴로 후원 계약서를 들고 공작의 집무실을 나섰다.

뜻하지 않게 착착 진행된 후원 계약에 넋을 잃고 걸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갑작스레 끌어당겼다. 필릭스였다. 파티션으로 가려진 구석으로 루시를 데려간 그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물었다.

“서명했어?”

그 질문에 루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귀에는 마치 ‘나와 공부하자는 약속은 일방적으로 깨 놓고서, 우리 가문의 후원은 받기로 한 건가?’ 같은 투로 들렸다.

“그게…….”

루시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녀가 들고 있던 계약서를 본 필릭스가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머리를 헤집었다. 그는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한숨까지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는 루시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역시 뻔뻔한 애로 보였겠지…….

루시는 후원을 받아들이기로 한 자신의 결정이 후회스러워졌다.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냥 마지막까지 거절할 걸 그랬어.

“아버지가 또 뭐라 했는데?”

심란해진 루시의 귓가에 필릭스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루시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푸른 눈이 바로 눈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어요,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이내 희미하게 공중으로 흩어졌다. 필릭스가 손을 들어 루시의 이마 위에 늘어져 있던 머리 한 가닥을 가만히 귀 뒤로 넘겨주고 있었다. 귓등에 따뜻한 손가락의 온기가 스쳤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행동에 루시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필릭스는 어느새 다정하고도 애틋한 눈으로 루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픈 데는?”

앞선 질문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또 다른 질문이 나직하게 내려앉았다. 이어 귀 뒤를 쓸어내리던 손가락이 이번에는 뺨 위로 슬쩍 올라왔다.

“핼쑥해졌는데.”

그의 검지가 천천히 루시의 볼을 쓸었다.

뜨거운 건 내 뺨일까, 아니면 선배의 손가락일까.

루시는 홀린 듯이 손가락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서먹해진 그와의 관계를 잠시 잊을 정도로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 커다란 손에 뺨을 부비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다가 루시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필릭스의 손을 피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이만 내려가 보는 게 좋겠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려가면 도서부 애들과 함께 있어. 여긴 또 올라오지 말고.”

그렇게 말한 뒤 필릭스는 루시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 주었다. 잠시 머뭇대던 루시는 구석에서 빠져나와 일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잠깐 뒤를 돌아보았을 때도 필릭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신을 염려하는 눈빛을 하고서.

그리고 계단을 모두 내려온 후에야 루시는 깨달았다. 생일 선물은 두 번이나 주었지만 단 한 번도 그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루시! 어디 있었어?”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콜린이 멀리서 알아보고 달려왔다.

“후원자는? 로제 선배의 숙부라는 사람은 만나 봤어?”

“그게…….”

루시는 콜린에게 이 층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콜린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와! 베르크가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고?”

역시나 콜린은 웨인 밀라드처럼 루시를 축하해 주기 바빴다. ‘베르크 정도의 가문이라면 코너 가문 대신 루시를 후원해 줄 자격이 있지.’ 하는 표정이었다.

“루시!”

그때, 또 한 사람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드리안은 손님을 접대하기 바쁜 와중에도 루시가 무사히 후원자를 구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사정을 설명하기도 전에 콜린이 먼저 나섰다.

“루시가 베르크 공작님의 후원을 받게 됐대요!”

그 말에 아드리안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아버지의 후원을?”

심각해진 얼굴로 무언가 고민하던 것도 잠시, 아드리안이 금세 환하게 바뀐 표정으로 축하의 말을 건넸다.

“축하해, 루시. 넌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하니까.”

그러나 루시와 인사한 후, 테이블로 돌아가는 아드리안의 표정은 좋지만은 않았다.

* * *

연회에서 돌아온 다음 날 역시 주말이었다. 기숙사에는 간만에 아침까지도 조용한 정적이 맴돌았다. 시험 기간을 보내느라 곤죽이 되었던 학생들이 하나같이 늦잠을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아침 일찍 일어나 평소와 다름없는 일과를 시작한 사람도 있었다. 루시는 눈부신 아침 햇살이 창 안으로 들어오는 때에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시험 기간에 모질게 자신을 채찍질하며 꼭두새벽에 일어나던 시간을 조금 늦춰 여유롭게 일어난 것이 그녀 자신에게 허락한 유일한 늦장이었다.

제미마는 침대 위에서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그녀의 파자마가 머리 위까지 훌러덩 올라와 얼굴을 덮고 있었다. 파자마 밑에서 도로롱 작게 코를 고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시는 그녀의 파자마를 정리해 준 뒤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맞이했다.

똑똑.

해가 좀 더 솟아올랐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루시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야…….”

침대 위에서 미적거리던 제미마도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글쎄, 리타인가?”

루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갔다. 이 시간에 그들의 방에 올 사람은 아무래도 리타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을 열자 마주한 사람은 처음 보는 여자들이었다. 게다가 아카데미 학생도 아니었다. 그들은 루시를 보자마자 무릎을 굽히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얼떨결에 루시도 따라 인사했다.

“저…… 누구신지?”

“안녕하세요, 루시 키넌 양 되신가요?”

제일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조곤조곤하고도 명확한 목소리로 루시에게 물었다.

“저는 베르크가의 저택에서 일하는 메리라고 합니다. 공작님의 피후견인이 되신 키넌 양에게 전해 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제미마가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베르크’라는 이름을 들은 그녀는 재빨리 문가로 달려오더니 루시의 등 뒤에 숨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가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들을 요리조리 훑어보았다.

“아…….”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루시가 멍하니 서 있다가 황급히 문가에서 물러섰다. 메리와 다른 여자들이 품에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한 명은 상체를 다 가릴 정도로 커다란 꽃바구니까지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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