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2화
그의 눈이 루시와 루시 앞에 선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이어 그가 똑바로 서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아버지?
루시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해골같이 말라 푹 파인 볼 때문에 알아보기 쉽지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생김새가 묘하게 필릭스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는 웨인 밀라드가 아니라 아서 베르크 공작이었던 것이다.
공작은 아들을 보며 무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필릭스? 아직 응대해야 할 손님들이 남았을 텐데.”
그의 말에 필릭스가 슬쩍 루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짙푸르게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루시. 로제가 널 찾고 있어. 일 층으로 내려가 봐.”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그의 입가에서 미세하게 일어나고 있는 경련만은 숨길 수 없어 보였다.
루시는 베르크 공작이 자신의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제는 시선을 옮겨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줄곧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던 그의 얼굴에 묘한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도.
루시가 공작에게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한 후, 테라스를 떠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잠깐.”
그러나 뒤에서 들린 묵직하고도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루시는 더 움직이지 못하고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이거, 가져가야지.”
루시가 돌아보자 공작이 들고 있던 종이를 들어 보였다. 그녀가 건넨 후원 신청서와 그녀의 성적 증명서였다.
“아…….”
루시가 감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지 못한 채, 공작에게 다가갔다.
“실례했습니다, 공작님.”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린 뒤 종이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것을 잡는 순간 루시는 온몸에 퍼져 나가는 오싹함을 느꼈다. 공작이 서류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뜻을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당황하며 잠깐 굳어 있던 루시가 다시 힘을 줘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공작은 종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왜 후원자를 구하는 거지?”
루시의 정수리에 얼음처럼 서늘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네?”
“왜 후원자를 구하는 거냐고 물었다.”
공작이 거듭 물었다. 루시는 혼란스러운 기색을 애써 감추며 대답했다.
“……저는 스스로 학비를 구해야 합니다.”
“귀족 영애가 어째서 스스로 학비를 구하러 다니는 거지. 집안이 망하기라도 한 건가?”
공작은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린 후, 루시의 후원 신청서를 들여다보았다.
“루시 키넌…… 키넌이라…….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군. 변방의 귀족인가.”
“아뇨, 공작님. 저는 귀족이 아닙니다.”
루시의 대답에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곧 그의 입가에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불길하고 섬뜩한 미소였다.
그는 이제 루시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뒤에 서 있던 필릭스에게로 옮겨 가 있었다.
“그렇군. 평민이라.”
공작이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만난 지 몇 분 되지도 않았지만, 루시는 공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남자는 베르크 쌍둥이의 아버지였지만, 필릭스와 아드리안, 둘 중 어느 쪽과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아드리안의 도서부 후배예요.”
필릭스가 평정심을 되찾은 듯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드리안의 초대로 참석한 겁니다.”
“그래?”
공작이 재미있어하며 대꾸했다. 그는 줄곧 루시의 신청서를 쥐고 있었고, 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루시는 그냥 그 서류를 포기하기로 했다. 이쯤에서 연회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공작님.”
루시가 또 한 번 무릎을 굽혀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위험한 사람 같아.
공작과 마주 서 있는 내내 찝찝한 기운을 느꼈던 루시는 생각했다. 왠지 이 자리에 더는 있고 싶지가 않았다.
“후원이 필요하다면 베르크가에서 해 주지.”
“아버지.”
공작의 예상치 못한 제안에 먼저 반응한 것은 루시보다도 필릭스였다. 그가 공작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말을 이었다.
“이미 웨인 밀라드 씨가 루시의 후원자가 되어 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이 아가씨가 나에게 한 말은 그게 아니던걸.”
공작은 자신의 아들을 보며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원에 대해선 아무것도 결정 난 게 없는 것처럼 말하던데. 나에게 신청서도 주었고. 그렇지 않나?”
공작이 시선을 옮겨 루시를 바라보았다. 루시는 그 날카로운 시선에 입을 열지 못하고 침만 꼴깍 삼켰다.
“이 후원 신청, 받아들이지.”
후원 신청서를 들어 보이며, 공작은 여상한 말투로 깜짝 놀랄 만한 말을 뱉어 냈다. 루시는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공작은 왜 자신을 후원하겠다고 나서는 것인가.
게다가 필릭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마치 아버지가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절망스러운 표정이었다.
“저…… 공작님.”
“거절 말게.”
공작은 루시가 발언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는 성적 증명서를 훑어보며 말을 이어 갔다.
“성적이 아주 좋군.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어. 변변한 가정 교사를 두고 교육받은 것도 아닐 텐데 말이지.”
진심인가?
공작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루시는 입가를 뻣뻣하게 굳혔다.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고 경제적 어려움 앞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돕는 것도 나의 일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그가 하는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돈 많고 인재 양성에 관심이 있는 귀족이라면 당연하게 할 법한 말이었지만, 어쩐지 그가 은근히 내뿜고 있는 꺼림칙한 기운이 그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거절하지 말게. 게다가 내 아들도 무척 신경 쓰는 후배인 것 같으니.”
“……네, 공작님. 아드리안 선배가 여러모로 도와주었습니다. 여기서 후원자를 찾을 수 있도록 신경도 써 주었고요. 그러니 공작님까지 도와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말하는 아들은 그 아들이 아닌데.”
그렇게 말하며 공작은 필릭스를 향해 슬쩍 웃었다.
“후원 계약서는 내 집무실에서 쓰도록 하지.”
공작의 어조는 단호했으며 상대방이 거절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강압적인 데가 있었다. 루시가 무어라 더 말하려고 했지만, 공작은 먼저 발을 떼며 테라스를 나가 버렸다.
물론 루시에게 오늘 밤 제일 중요한 일은 무사히 후원자가 되어 줄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게 제일 첫 번째였고, 우선순위였다.
그러니 베로스 제국 최고의 재력가인 베르크 공작이 자신의 후원자가 되어 주겠다고 기꺼이 나선 이 순간에 기뻐해야 함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마차 안에서 로제가 말한 대로, 졸업 후 공작의 지원에 힘입어 수도에서도 영향력 있는 곳에 자리를 잡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시는 어쩐지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베르크 공작처럼 냉정하고 서늘한 느낌을 주는 사람은 여태껏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루시.”
공작을 따라 테라스를 나가지 않고 있던 필릭스가 그녀를 불렀다. 얼굴에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웨인 밀라드 씨의 후원을 받도록 해.”
그의 목소리는 초조해 보였다. 그런 그의 태도를 보니, 루시는 덩달아 불안해졌다.
필릭스가 무어라 더 말하려던 찰나, 테라스에 또 다른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온 머리가 하얗게 세었으나 허리만은 꼿꼿이 펴고 서 있는 웬 노인이었다.
“도련님.”
“레일리.”
레일리라 불린 노인이 테라스 안으로 들어오더니 루시를 향해 섰다. 그가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베르크가의 집사, 레일리 필레그만입니다.”
그는 정중한 몸짓으로 복도 끝의 커다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작님께서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계약서에 서명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공작에게 다시 한번 거절의 뜻을 전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루시가 필릭스를 지나쳐 집사의 안내를 따라갔다.
그녀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레일리가 따라 들어오려는 필릭스를 저지하며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일 층에서 접객을 마무리 지으시랍니다.”
필릭스가 무어라 반박하려 했으나, 문은 그의 면전에서 매정하게 닫혀 버렸다.
집무실 안, 베르크 공작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호리호리한 남자 하나도 옆에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르고, 얼룩덜룩한 금발을 가진 남자였다.
이 사람이 웨인 밀라드 씨구나.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이 공작의 책상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루시를 보더니 활짝 웃었다. 로제와 생김새가 미묘하게 닮았지만, 푸근한 인상이 더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아, 루시 키넌 양!”
그가 성큼 다가오더니 붙임성 있는 태도로 루시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웨인 상단의 주인 웨인 밀라드라고 합니다. 로제에게 얘기를 듣고 키넌 양을 찾던 중에 공작님께 소식을 먼저 전해 들었답니다. 베르크가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죠?”
“아니, 그건…….”
루시는 부정하고 싶었으나, 웨인은 기쁜 얼굴로 루시의 손을 잡고 흔들어 댔다.
“로제에게 키넌 양의 얘기를 듣자마자 참 기특한 학생이라 생각했죠. 그래서 꼭 후원을 해 주고 싶었습니다만, 공작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저는 한 발 뒤로 물러서겠습니다. 베르크 공작가의 후원을 받는 것보다 영광스럽고 든든한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더니 루시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출세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나 다름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