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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1화 (61/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1화

이어 로제는 루시가 자신의 숙부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인상착의를 설명해 주었다.

“키 크고, 마르고, 얼룩덜룩한 금발이야. 지금쯤 얘기가 다 끝나서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더니 로제가 루시의 등을 떠밀었다.

“긴장하지 말고 잘해 봐. 난 이 인터뷰를 끝내야 해서 같이 못 가.”

그러더니 어서 가 보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루시는 그녀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고마워요, 로제 선배.”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녀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다시 기자에게로 몸을 돌렸다.

루시는 로제가 알려 준 대로 이 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손님들로 가득 찬 연회장과는 다르게 중앙 홀은 한산했다. 몇몇 사람들이 바람을 쐬기 위해 문가를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루시는 중앙 계단을 향해 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 아래서 대리석 바닥이 또각또각 울렸다. 그 소리가 왠지 그녀를 더욱 긴장케 만들었다.

계단을 다 오르자 긴 복도가 나타났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이 층까지 올라오진 않았지만, 모든 창문마다 은은한 등이 켜져 있었다.

근처에서 은근히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연회장에서 몰래 빠져나온 연인이 제일 가까운 테라스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루시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웨인 밀라드를 찾기 위해 복도를 따라 걸으며 다른 테라스를 살폈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고 있는 호리호리한 남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살금살금 복도를 걷던 루시의 시선을 빼앗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복도 끝에 위치한 커다란 문이었다. 다른 문들보다 월등히 큰 크기와 화려한 조각으로 꾸며진 상태를 보니 보통의 방은 아닌 것 같았다.

웨인 밀라드를 찾는 것도 잠시 잊은 채, 루시는 그 커다랗고 위압적으로 보이는 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문은 더욱 장대하고 멋졌다. 루시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책상과 의자, 그리고 책장이 보였다. 서재인 것 같았다.

이어 책상 위를 밝히고 있는 초를 발견한 루시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왠지 이 주변에서 얼쩡거리면 안 되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루시가 문에서 돌아서다가 우뚝 서 있는 여인과 마주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으아!”

너무 놀란 나머지 루시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휘청거렸다. 용케 중심을 잡고 바로 선 그녀는 앞에 선 여인을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천장까지 머리가 닿을 듯 키가 큰 그 여인은 미동도 없이 루시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초가 흐른 뒤, 루시의 가슴이 진정되었다.

“깜짝 놀랐네.”

그건 진짜 사람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루시가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창문 하나와 맞먹는 크기의 액자 속에 이끼 같은 녹색 머리칼을 바닥까지 늘어뜨린 여자가 주먹만 한 에메랄드를 손에 쥐고 있었다. 복도를 밝히는 불빛 속에서 여인과 에메랄드 역시 은은하게 빛났다.

루시가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여인은 정말로 살아 있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루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게 그 그림이구나.

어린 필릭스가 자신의 눈과 빗대어 말하던 그림 속 에메랄드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실제로 보니 영롱하고 신비했으며, 아름다웠다.

흔히 볼 수 없는 녹색이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색료를 찾은 걸까’ 하고 궁금해질 정도로 오묘하고 신비로운 빛깔이었다.

“아름다워…….”

루시는 그림에 홀린 듯이 빠져들었다. 금방이라도 마녀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찬찬히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그림 옆 테라스에서 가을밤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있던 실크 커튼이 천천히 일렁거렸다. 그러자 그 너머에 있던 어떤 사람의 실루엣이 천천히 드러났다.

한 남자였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그는 난간 앞에 선 채 드넓게 펼쳐진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흰 담배 연기가 하늘 높이 흩어졌다.

루시는 자신이 누군가의 시간을 방해할 뻔했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이내 그 남자의 머리카락 색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키 크고, 마르고, 얼룩덜룩한 금발이야.’

로제가 설명해 준 웨인 밀라드의 모습을 떠올리며, 루시는 남자의 머리를 한 번 더 살펴보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난 남자의 머리칼 역시 금빛이었다.

저 사람인가?

루시가 가만히 테라스로 다가갔다. 안이 흐릿하게 비쳐 보이는 실크 커튼 한 장만을 사이에 두고서, 남자의 뒷모습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폈다.

체형과 머리 색깔이 로제가 말해 준 것과 일치했다.

아마도 이 사람이 웨인 밀라드 씨인 것 같아.

루시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뒤 다시 내쉬었다. 긴장으로 몸이 조금 떨렸지만,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았다.

오늘 밤, 꼭 후원자를 구해서 돌아가야 해.

결심을 굳힌 그녀가 커튼을 헤치고 테라스 안으로 들어섰다.

달이 구름에 가려진 탓에 테라스는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남자는 그 속에서 복도의 희미한 불빛을 겨우 받으며 희끄무레하게 서 있었다.

루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남자의 모습을 더욱 잘 보려고 애썼다.

금발에 호리호리한 몸. 테라스. 담배.

모든 인상착의가 들어맞았다.

루시가 그 남자에게로 가만히 다가갔다. 그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미동조차 없었다.

“저…… 안녕하세요.”

루시가 가만히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남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루시는 침을 꼴깍 삼킨 뒤, 이번에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녀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테라스 안을 울렸다. 분명 듣지 못할 리가 없는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남자는 반응이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이윽고 밤하늘로 피어오르던 담배 연기가 멎었다. 남자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복도의 불빛이 잘 닿지 않는 테라스의 어둠 속에서 남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눈, 코, 입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바싹 마른 얼굴과 툭 불거져 나온 광대만은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본 남자는 대답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으스스하게 느껴졌으나 루시는 용기를 내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제노미움 아카데미의 루시 키넌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웨인 밀라드 씨가 맞으신가요?”

루시가 질문을 던진 뒤, 테라스에는 정적이 흘렀다.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석상처럼 서서 루시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저…….”

루시는 어색하게 서 있다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자신이 찾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착각했어요.”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뒤 테라스를 떠나려고 했다.

“무슨 일이지?”

그때, 남자의 묵직한 음성이 그녀의 발을 붙들었다. 루시가 다시 돌아섰다.

“아카데미의 학생인가.”

남자가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역시 이 사람인가?

루시는 긴가민가한 얼굴로 가방에서 주섬주섬 후원 신청서를 꺼냈다.

“저…… 로제 선배에게 얘기를 들으셨겠지만 저는 제노미움 아카데미의 수업료를 지원해 줄 후원자를 찾고 있습니다.”

루시는 머뭇거리다가 남자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를 남자에게 천천히 내밀었다.

남자가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흰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의외로 남자는 삐딱하게 서 있던 몸을 바로 세운 뒤, 종이를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 덕에 용기가 생긴 루시가 덧붙여 설명했다.

“후원 신청서와 제가 그동안 아카데미에서 받은 성적들입니다. 입학 성적부터 지난 학기 기말고사까지의 성적이 모두 기재되어 있어요. 찬찬히 읽어 보시면…….”

바로 그때, 구름 뒤에 숨어 있던 달이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테라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루시 앞에 우뚝 선 남자의 모습도 선명하게 나타났다. 루시의 시선이 제일 먼저 그의 머리칼로 향했다. 달빛을 받아 비현실적일 정도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얼룩덜룩한 금발이라 하지 않았나…….

로제는 분명 그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의 금발은 얼룩덜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금실을 뽑아낸 것처럼 아름다운 금발이었다. 단 한 가닥의 불순물도 섞여 있지 않은.

그리고 루시에게도 아주 익숙한 금발이기도 했다.

달빛 아래 드러난 남자가 후원 신청서에서 눈을 떼고 루시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해골 같은 사람이었다. 눈 밑이 푹 꺼져 있는 탓에 툭 튀어나온 광대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살이 없어 볼이 깊게 파여 있었으며 얼굴이 흡혈귀처럼 창백했다.

그래서인지 루시를 바라보는 두 눈이 더욱 섬뜩하고 날카롭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로제와는 닮은 구석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겸손할 줄 모르고 뽐내길 좋아하는 로제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론 인정머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의 눈빛은 달랐다. 사람을 꿰뚫어 볼 듯 매섭게 뜬 눈과 꽉 다문 입술에서 타고난 오만함과 모든 사람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는 독선이 느껴졌다.

“저어…….”

루시의 입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웨인 밀라드 씨 맞으신가요……?”

어쩐지 자신이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면서도 루시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웨인 밀라드 씨에게 후원을 신청하고자…….”

시체처럼 생기가 없는 남자의 눈길 앞에서 루시는 말을 제대로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토록 냉랭한 기운을 내뿜는 사람은 만나 본 적이 없었다.

탁!

뒤에서 들린 또 다른 인기척에 루시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앞에 서 있는 남자와 똑같은 금발을 가진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필릭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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