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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0화 (60/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0화

……그래도 빈손으로 오는 것보다는 낫지.

후원자를 구할 수 있도록 연회에 초대해 준 아드리안에게는 깊은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루시는 작은 선물이더라도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윽고 그녀는 선물에 대한 걱정을 털어 버리며 자리를 떠났다.

잠시 뒤, 그녀가 다시 선물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뜻밖에도 필릭스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서 부원들이 선물을 놔둔 곳이었다.

그는 잠시 그 앞을 서성거리며 무언가를 집어 살피는 듯했다. 이어 그가 안주머니에 그것을 넣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루시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소중히 품에 넣으며 가져간 물건이 자신의 선물이라는 것을.

* * *

밤이 깊어 가며 연회의 분위기도 무르익어 갔다.

한데 모여 있던 도서 부원들은 어느새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제미마와 리타는 어느 귀족 영식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뺨에 떠오른 발그레한 빛으로 짐작하건대 대화 상대가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런가 하면 콜린은 어느 귀부인들 앞에서 무려 자작시를 낭송하고 있었다. 부인들은 작고 앳되어 보이지만 능청스럽게 시를 낭송하는 콜린을 보며 연신 웃음을 참았다. 정말 대단한 넉살이었다.

그런 와중에 오직 루시만이 초조한 기색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발이 한군데 붙어 있지 못하고 연회장 안을 자꾸만 돌아다녔다.

“로제 선배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그녀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족 영애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로제를 찾았다.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녀가 소개해 주기로 한 웨인 밀라드를 만나 후원 신청서를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기회는 또 없을 터였다. 그러니 오늘 밤, 일을 꼭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그러나 로제는 연회장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이목을 끄는 화려한 외모를 가진 그녀라면 바로 눈에 띌 텐데. 루시는 눈을 크게 뜨고 사람이 모여 있는 곳마다 로제가 있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하지만 수십 분이 지난 후, 결국 로제와 만나지 못한 루시는 생각했다.

안 되겠어. 일단 내가 혼자서 구해 보는 수밖에.

그녀는 연회장 안을 직접 돌아다니며 기꺼이 후원자가 되어 줄 사람을 물색해 보기로 했다.

사실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도, 게다가 자신의 후원자가 되어 줄 수 있겠냐고 뻔뻔하게 말을 건네 보는 것도,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빠의 낡은 재킷이나 엄마의 닳은 신발 밑창, 남작님의 텅 빈 곳간 등을 상상하자 없던 용기가 불끈 솟아올랐다.

조심스레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던 루시의 눈에 제일 먼저 띈 사람은 어느 귀부인이었다. 수도의 한 여성 학교의 교장이자 교육학자이기도 한 그 사람은 제노미움 아카데미에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여성의 교육에 관심이 많은 데다가 제법 큰 규모의 장학 재단까지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잘만 하면 루시의 좋은 후원자가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여기서 만나다니, 운이 좋았어.

자신감이 퐁퐁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루시가 주먹을 꼭 쥐었다.

할 수 있어.

그녀가 속으로 힘을 불어넣듯 외쳤다.

마침내 결심한 루시가 그 부인에게로 다가가려는 찰나.

누군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처음 보는 웬 남자였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루시에게 능청스레 인사를 건넨 그 남자는 어딘가 부담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느닷없이 길이 가로막히자 루시가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미소를 잃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까부터 지켜봤습니다만, 혼자 오셨나요?”

“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루시가 이마를 찌푸렸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대화 상대가 되어 드려도 될까요?”

루시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초면에 이토록 적극적이고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남자는 처음 마주해 보았기 때문이다.

“아뇨, 전 가 봐야 할 데가 있어서…….”

“아까부터 이 주변만 계속 맴도시던걸요.”

남자는 끈질겼다. 루시가 자신을 피해 지나가려 하자 그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앞을 가로막았다.

“죄송합니다만 지나갈게요.”

“사람 많은 곳에서 나누는 대화는 싫으신가요? 그럼 밖에서 산책이라도 할까요? 공작저의 정원이 아주 아름답더군요.”

“아뇨, 전 그쪽과 산책할 마음이 없어요.”

최대한 단호하게 말하려 했지만, 가늘게 떨리는 루시의 목소리는 작기만 했다. 그리고 어쩐지 그 점이 남자에게 쓸데없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것 같았다. 그가 씩 웃으며 이번에는 긴 팔을 내뻗어 루시가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루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곤란한 그녀의 상황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앞을 비켜 주지 않는 남자를 피해 도망갈 기회를 찾던 루시의 눈이 저절로 한 곳으로 향했다.

저 멀리 필릭스가 등을 진 채, 어느 귀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루시는 저도 모르게 그의 뒷모습을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껏 계속 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피해 왔으면서, 왜 그 순간엔 그토록 간절히 그가 이쪽을 봐 주기를 바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수도 귀족은 아닌 것 같고……. 지방에서 오신 것 같군요. 어느 가문이시죠?”

남자가 루시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비켜요!”

루시가 남자를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탁.

그때 루시의 등 뒤에서 커다란 손 하나가 뻗어 나왔다. 그 손은 곧장 루시의 앞을 가로막고 선 남자의 어깨를 지그시 밀어냈다. 루시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드리안 선배.”

루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했다.

놀란 것은 루시뿐만이 아니었다. 남자는 루시의 뒤에 서 있는 아드리안을 보더니 곧장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베르크 공자님.”

그가 능글거리던 태도를 순식간에 지워 버리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그 인사를 무시한 채 말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게…….”

남자의 눈이 루시의 어깨를 감싼 아드리안의 손으로 향했다. 곧 그가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전 몰랐습니다.”

“무엇을 말이죠?”

“그게…… 정말 죄송합니다, 공자님.”

“그만 다른 곳으로 가 보는 것이 좋겠군요.”

“네, 그럼요, 공자님.”

남자는 곧장 다른 영식들이 있는 테이블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아드리안의 나직한 음성이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내가 말한 다른 곳은 이 저택 밖을 말하는 겁니다.”

그의 서늘한 말투에 남자는 도움을 청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물론 그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남자는 체념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홀을 떠났다.

“루시.”

남자가 연회장을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 아드리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고마워요, 선배.”

“난 네가 지금쯤 후원 신청을 할 사람을 만나 잘 얘기하고 있는 줄 알았어. 진작 와서 물어볼 걸 그랬네.”

그러더니 그가 연회장을 둘러보며 당장 그녀에게 소개시켜 줄 만한 귀족을 찾듯이 두리번거렸다.

“아, 사실은 로제 선배가 자신의 숙부님을 소개해 주기로 했어요.”

“로제가?”

아드리안이 무언가 고민해 보듯 손으로 턱을 매만지더니 말했다.

“로제의 숙부라면 웨인 밀라드 씨를 말하는 건가. 웨인 상단의 주인 말이야. 그 사람이라면 꽤 괜찮지.”

아드리안이 그렇게 말해 주자 루시는 마음이 놓였다.

“네, 그래서 로제 선배를 찾고 있었는데 어디서도 보이질 않아서…….”

“로제라면.”

루시의 말에 아드리안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데?”

아드리안의 손가락이 향한 곳을 돌아보자, 긴 커튼 뒤에 숨은 모양새로 한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로제의 모습이 보였다.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의 주목받기를 좋아하고 늘 관심의 중심에 서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의 평소 태도를 생각하면, 굉장히 조심스럽고 은밀하기까지 했다.

“고마워요, 아드리안 선배. 그럼 전 로제 선배에게 가 봐야겠어요.”

루시는 아드리안에게 재차 고맙다는 말을 한 뒤, 로제에게로 걸어갔다.

커튼 뒤로 바짝 다가가 서자 로제와 남자가 비밀스럽게 나누는 대화가 그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 대화를 듣고 나서야 루시는 왜 둘이 이렇게 숨어서 대화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필릭스 베르크 공자와는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 말해 주실 수 있나요, 레이디 로제?”

남자는 로제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받아 적겠다는 열의를 보이며, 펜을 꾹 쥔 채 질문했다. 그러자 로제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입을 열었다.

“세간에 나와 필릭스에 관한 수많은 추측들이 돌았던 건 사실이에요. 뭐, 그럴 수밖에 없었죠. 필릭스는 무뚝뚝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좀처럼 내비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나에 관해서 만큼은 달랐으니까. 이전의 문학의 밤 행사에서 그가 내게 먼저 파트너를 신청했던 것 역시…….”

로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의 말을 빠르게 받아 적는 남자는 다름 아닌 기자였다. 이 연회에 용케도 몰래 숨어든.

커튼 뒤에서 몰래 인터뷰를 진행하는 이 둘을 베르크가의 시종들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로제를 찾아다니던 루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로제가 어찌나 그 인터뷰에 집중하고 있었던지 함부로 방해해선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다행스럽게도 커튼 앞에서 얼쩡거리는 루시를 로제가 먼저 발견해 주었다.

“루시!”

안 그래도 찾고 있었다며 로제는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녀가 루시를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 전에 내가 숙부님께 잘 말해 놨어. 이 층으로 올라가 봐. 거기 계실 테니까. 자기가 꼭 거래하고 싶은 고객이 거기 있다나? 여기까지 와서 일을 한다니까,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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