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59화
마차가 힘차게 내달리는 동안 사방에는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창밖으론 검은 나무들이 손을 든 유령처럼 휙휙 지나갔다.
어느새 공작저에 도착한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참지 못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콜린처럼, 루시도 슬쩍 바깥을 내다보았다.
사방이 가을밤 속으로 잠겨 드는 와중에도, 저 앞에 보이는 베르크 공작가의 저택은 무수한 불빛들로 밝고 환하기만 했다.
“와! 루시, 저기 좀 봐! 정말 아름다워!”
콜린이 저택을 가리키며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해 주지 않아도, 이미 루시 역시 그 웅장한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중이었다.
베르크가의 저택은 그녀가 태어나서 본 건물 중 황궁 다음으로 으리으리하고 장엄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커다란 몸체를 뽐내며 우뚝 서 있는 외관이, 마치 루시를 태운 마차를 한입에 집어삼킬 것만 같아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정문 앞에는 이미 많은 마차들이 도착해 서 있었다. 하나같이 사치스럽고 화려한 데다가 이름만 들으면 알 정도로 유명한 가문들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만만치 않게 비싼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루시가 탄 마차도 정문 앞에 당도했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 하나가 곧장 문을 열어 주었다.
마차에서 내려 거대한 산처럼 떡 버티고 서 있는 저택을 올려다보는 루시의 얼굴에 짙은 긴장감이 떠올랐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불이 켜진 수십 개의 창문들이 괴수의 눈처럼 루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후원자를 구해야 한다는 거지…….
루시는 침을 꼴깍 삼켰다. 오기 전엔 어느 정도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막상 저택의 규모와 도도하게 걸어 들어가는 귀족들을 보니 걱정이 앞섰다.
정문 앞에는 꽤나 긴 줄이 있었다. 들어가기 전 초대장을 확인하는 줄이었다. 시종이 꼼꼼한 눈빛으로 초대장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했다.
로제는 그 광경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궁금한 것을 참을 수 없었던 콜린이 마침내 물었다.
“로제 선배, 앞에서 초대장을 확인하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들어가실 작정이세요?”
그러자 로제는 어깨를 으쓱한 뒤,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시종을 불렀다. 그 시종이 다가오자, 로제가 품 안에서 꺼낸 쪽지를 전해 주며 말했다.
“지금 즉시 필릭스 베르크에게 전해 줘. 로제 밀라드가 보냈다고 하면 알 거야.”
얼떨결에 쪽지를 받아든 시종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로제를 바라보았다. 웬 사기꾼이 저택에 들어가기 위해서 수를 쓰는 건가, 의심을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로제가 입은 드레스는 너무나 고급이었고, 그녀의 도도하고 거만한 표정과 몸짓 또한 타고난 귀족의 태도였다.
결국 시종은 미심쩍은 눈빛을 하고 있으면서도 쪽지를 전하기 위해 정문 안으로 몸을 돌렸다.
“뛰어! 뛰란 말이야!”
로제가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시종의 뒷모습을 향해 포효하듯 소리쳤다. 시종이 화들짝 놀라 후다닥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그런 뒤, 로제는 여유로운 얼굴로 그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저택 안으로 사라졌던 시종이 들어갈 때와는 다르게 급박한 걸음으로 로제에게 돌아왔다.
“아, 안으로 드시랍니다.”
그는 놀랍게도 별다른 질문 없이 로제를 정문 안으로 안내했다. 덩달아 로제와 함께 있던 루시와 콜린도 줄을 서지 않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체 쪽지에 뭐라고 쓴 거예요?”
“아.”
로제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높고 앙칼진 웃음소리가 밤하늘 위로 높이 퍼져 나갔다.
“날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졸업 무도회 때 두고 보라고 했지. 기필코 너와 에벨로자 무곡을 추고야 말겠다고 썼을 뿐이야.”
저택 입구로 향하는 길은 멋진 조경수와 하얀 조각상들이 우뚝 서서 위엄을 더하고 있었다.
“와, 정원이 굉장히 근사하네요!”
루시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이거 정원 아닐걸. 그냥 앞뜰이지.”
로제가 대꾸했다.
“아마 진짜 정원은 저쪽일 거야.”
그녀가 부채로 저택의 뒤쪽을 가리켰다.
이렇게 넓은데 정원이 아니라니. 그냥 뜰이라니!
루시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셋은 시종의 안내에 따라 거대한 중앙 홀로 들어섰다. 2층까지 트인 높은 천장에 수백 개의 크리스털로 장식된 커다란 샹들리에가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대지의 신과 시중드는 요정들의 모습을 그린 고급스런 천장화 역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루시는 고개가 뒤로 꺾이다시피 한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하마터면 시종의 안내를 놓칠 뻔했다.
그들은 홀을 지나 넓은 연회장으로 향했다. 미리 입장한 귀족들이 테이블마다 모여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넓고 찬란한 공간 속에 루시는 한 번도 섞여 본 적 없는 사회가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필릭스의 눈에 띄지 않겠다는 다짐도 잊은 채, 그 화려하고 생소한 풍경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저마다 손에 잔을 들고서, 혹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서 연회장 안을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귀족들은 여유롭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들과 다르게 뻣뻣하게 서서 연회장을 둘러보던 루시의 눈이 어느 한 사람에게서 멈췄다.
아름답고도 익숙한 금발.
루시는 저도 모르게 콜린의 뒤로 숨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킨 그녀가 얼굴만 빼꼼히 내밀어 금빛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필릭스 베르크가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아드리안도 함께였다. 공자들은 각각 검정색과 흰색의 연미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흰색 연미복을 입은 아드리안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짧은 인사를 해 주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검은 연회복을 입은 필릭스는 생일을 맞은 사람이라곤 볼 수 없을 것 같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를 흘끔흘끔 쳐다보기만 할 뿐, 쉬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가끔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귀족 몇몇이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듯했고, 필릭스는 뻣뻣한 목을 까딱이며 무뚝뚝하게 화답할 뿐이었다.
곧 루시의 시선은 두 공자 사이에 서 있던 한 귀부인에게로 옮겨 갔다. 그녀는 짙은 남색의 드레스를 입은 채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루시는 그 호리호리한 여인이 베르크 공작 부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턱 아래까지 감싸는 레이스와 손등을 덮는 긴 소매로 온몸을 꽁꽁 가리다시피 한 공작 부인은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희멀건 안색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 그녀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무감한 얼굴은 조금도 웃는 법이 없었다.
테라스의 유령…….
8년 전, 에버른가에서 보았던 것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 여기 있었네.”
초대장을 확인받고 뒤이어 들어온 다른 도서 부원들이 연회장에 나타났다. 다들 연회의 화려하고 성대한 규모에 놀란 눈치였다. 특히 제미마는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중얼거렸다.
“와, 우리 가문에 황제 폐하께서 행차하신대도 이런 연회는 열지 못할 거야.”
그때, 저 멀리서 도서 부원들을 발견한 아드리안이 손을 들어 인사해 주었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곁에 서 있던 필릭스는 동생이 어딘가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더니 자신도 시선을 돌렸다. 곧 도서 부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한 그의 눈이 누군가를 찾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방황하던 그의 시선은 루시를 발견한 뒤에야 멈췄다. 루시는 얼른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얼굴이 불에 덴 듯 홧홧해졌다. 제 발로 필릭스의 생일 연회에 찾아왔다는 것만큼은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루시, 저기에 선물을 두러 가자.”
다행히도 콜린이 그녀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며 필릭스의 시선으로부터 구해 주었다.
콜린이 데려간 곳에는 연회장에서 가장 화려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베르크 공자들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객들이 가져온 선물들이 높게 쌓여 있었던 것이다. 루시가 입을 벌린 채 그 호화로운 선물의 탑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도 선물들은 계속해서 차곡차곡 쌓여 갔다.
하나같이 사치스럽게 포장된 그 선물들은 누가 보냈는지 한눈에 알아보기가 쉬웠는데, 겉면에 내로라하는 가문들의 문장이 과시하듯 선명하게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 부원들도 저마다 가져온 선물을 그 위에 올려 두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귀족이었으므로,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만만치 않게 비싼 선물들일 게 분명했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루시는 들고 있던 작은 가방을 열어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수수한 색깔의 종이 포장지로 감싼 뒤 리본으로 묶은 그것은 그녀가 직접 만든 연고들이었는데, 각각 필릭스와 아드리안의 것이었다.
필릭스 선배에게는 미리 선물을 주기는 했지만…….
루시는 이전에 그에게 주었던 별자리 목걸이를 떠올렸다.
생일을 축하해 주는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으니까.
루시는 자신의 연고를 다른 선물들 위에 올려놓은 뒤 위축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명문가들의 문장이 찍힌 상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선물 꾸러미는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마치 누군가 신발 끈을 묶기 위해 잠시 그 위에 올려 두었다가 깜빡하고 그냥 가 버린 물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