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58화
루시는 마음을 정한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저도 참석할게요.”
루시가 아드리안이 건네는 초대장을 받아들었다. 필릭스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건 걱정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선 후원자를 구하는 게 더 시급한 문제였다.
* * *
이틀 후, 주말 저녁.
연회복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도서부원들이 정문을 걸어 나왔다.
곧 그들 앞에 하얗고 고급스러운 마차 여러 대가 도착했다. 아드리안의 요청으로 모두 베르크 공작저에서 보내 준 마차였다.
“와, 화려해!”
콜린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탄성을 질렀다. 마차가 멈추고 마부가 문을 열어 주자마자 콜린이 얼른 다가갔다. 하지만 누군가 그의 뒷덜미를 잽싸게 낚아챘다. 제미마였다.
“넌 도서부도 아니면서 왜 끼는 건데?”
하마터면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한 콜린이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선 뒤 제미마를 향해 입을 삐죽였다.
“섭섭하게 그럴 거냐! 필요할 땐 잡일꾼처럼 부려먹어 놓고!”
그는 정말로 서운하고 억울한 표정이었다.
“나도 아드리안 선배한테 초대장 받았다고!”
그러더니 루시의 손을 이끌며 뒤쪽에 있던 다른 마차를 향해 갔다.
“쟤네랑 따로 타자!”
뒤에서 제미마의 쯧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콜린은 여전히 씩씩대며 새로 고른 마차 안으로 루시가 올라탈 수 있게 도와주었다. 루시가 자신의 푸른색 드레스를 살짝 걷어 올리며 마차 안으로 올라섰다. 안에는 벌써 누군가 타고 있었다.
“아, 로제 선배.”
“안녕.”
다리를 꼬고 도도하게 앉아 있던 로제가 루시와 뒤따라 탄 콜린을 발견하고는 인사했다.
짙은 암녹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오늘도 숨 막힐 듯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선배도 초대받으셨어요?”
콜린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아니?”
당황스런 대답이 당당하게 돌아왔다.
“근데 재밌을 것 같아서. 그런 파티에 내가 빠질 순 없지.”
“초대장 없이 들어갈 수 있어요?”
로제가 걱정 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필릭스한테 말하면 들여보내 줄 거야. 걔가 나한테 빚진 게 있거든.”
그 말을 할 때 로제는 뭔가 언짢은 기억이 떠오른 듯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곧 문이 닫히고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마차는 베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르크 공작령을 향해 힘차게 내달렸다.
빠르지만 안정감이 있는 마차였다. 루시는 창가에 붙어 앉아 바깥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언덕과 나무들이 빠르게 휙휙 지나갔다.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부터 루시는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베르크가의 저택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공작과 공작부인은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하면서도 그들과 처음으로 마주할 생각을 하니 무서운 마음부터 들었다. 게다가 연회에 나타난 자신을 보고 필릭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하는 것도 루시로선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덜컹!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루시가 자리에서 휘청 쓰러졌다. 이 고급스런 마차도 커다란 돌부리 위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지 크게 흔들렸던 것이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대신 루시가 들고 있던 작은 손가방이 마차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루시가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준 콜린이 이어 허리를 숙여 가방도 주웠다.
“야, 루시! 초대장 잘 챙겨야지!”
열린 가방으로 튀어나온 초대장을 집어 들며 콜린이 말했다.
“이게 없으면 우린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이건 뭐야?”
떨어진 루시의 가방에서 튀어나온 건 초대장만이 아니었다. 콜린은 초대장 주변에 흩어진 종이들을 모아 쥐었다.
“후원 요청서?”
그가 종이 하나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쥔 종이들 중에는 루시의 성적을 증명하는 서류도 있었다.
“이리 줘!”
넘어지는 바람에 뒤집어진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던 루시가 황급히 콜린의 손에서 종이들을 낚아채 갔다.
“……그게 다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루시가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콜린의 눈은 점점 가늘어졌다. 루시와 남매처럼 자라다시피 한 콜린은 이번만큼은 눈치가 빨랐다.
“너 혹시 거기서 후원자를 구하려는 거야?”
그렇게 묻는 콜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허탈하고 서운해 보였다.
“이번에 4등 한 거 때문에 그래? 장학금 못 받을까 봐 걱정돼서?”
콜린이 캐묻듯 질문을 쏟아 냈지만 루시는 대답 없이 종이들을 반으로 접어 가방 안에 다시 넣기만 했다.
“아버지가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다니라 하셨잖아! 네가 왜 이런 걸 걱정해!”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영지 사정을 뻔히 다 아는데!”
결국 루시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번 홍수 때문에 브롬에선 농작물이 반의반으로 줄어 버렸잖아! 그것 때문에 영주님은 다른 영지에 빚까지 지고.”
그녀의 말에 콜린이 입을 다물었다. 루시는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콜린 앞에서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었다.
마차 안에 긴 침묵이 흘렀다. 들리는 소리라곤 오직 힘차게 내달리는 말발굽과 바퀴 소리뿐이었다.
짝! 짝! 짝!
그때 정적을 깨며 박수 소리가 들렸다. 난데없이 터져 나온 그 소리에 루시와 콜린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로제가 여전히 거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너네 우정, 정말 눈물 난다.”
로제가 가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물론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어릴 적엔 오빠 같고 남동생 같은 소꿉친구들이 많이 있었는데.”
로제가 돌연 창밖으로 눈을 돌리더니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 쫑 났어. 걔네가 나한테 딴 맘을 품는 바람에.”
로제는 계속 처연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고, 마차 안에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창문을 휙휙 스쳐 지나간 다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확실히 수도 귀족이 후원자로 있으면 든든하긴 하지. 특히 지방 출신의 경우엔.”
그녀가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루시를 바라보았다.
“꼭 학비 문제가 아니더라도, 수도에 아무런 뒷배가 없는 상황에서 미리 인맥을 만들어 놓으면 좋잖아.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수도에 정착하기도 훨씬 수월할 테고.”
루시는 아직 졸업 후의 진로를 생각해 놓지 않은 상태였다. 수도에 남을지, 고향으로 돌아갈지도 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로제가 하는 얘기는 일리가 있어 보였다. 루시가 주의 깊게 듣는 태도를 보이자, 로제가 슬며시 웃으며 제안을 했다.
“후원자를 구하고 있는 거라면,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소개시켜 줄까?”
“선배가 아는 사람이요?”
“그래. 너, 아무나 믿고 후원자 고르면 안 된다? 이 세상에 변태 아저씨들이 얼마나 많은데. 특히 너처럼 순진해 보이는 여자애는 표적 1순위야. 그러니까 신원이 확실히 보증된 사람을 후원자로 삼아야지.”
그러더니 ‘웨인 밀라드’라는 자신의 숙부를 후원자로 추천했다. 그는 로제의 아버지인 밀라드 백작의 동생으로서 작위는 없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거대한 상단을 꾸린 거부라고 했다.
“미혼이고 자식도 없어서 평생 모은 돈을 기르는 개한테만 쓰며 살아왔다니까? 그런데 몇 해 전부터는 인재 육성에 관심이 생겼는지 후원이 필요한 아이들을 찾아 지원하고 있더라고. 아마 너라면 숙부님도 흔쾌히 지원해 주실 거야.”
로제가 확실하다는 표정으로 단언했다.
“차남인지라 첫째인 우리 아빠완 다르게 평생을 할아버지의 관심 밖에서 살아왔거든. 그래서 그런지 너처럼 능력은 있는데 지원이 없어 빛을 못 보는 애들 보면 아주 환장을 해. 마침 오늘 연회에 참석하신다고 들었으니 오늘 밤에 소개시켜 줄게!”
“정말 괜찮은 사람인 거 맞아요?”
루시가 무어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콜린이 끼어들었다. 그는 답지 않게 날카로운 얼굴로 의심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뭐?”
로제가 즉각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너 지금 누굴 의심하는 거야! 내가 설마 얘한테 이상한 인간을 소개시켜 주겠니?”
로제가 눈을 치뜨며 콜린에게 쏘아붙였다. 그녀의 사나운 기세에 콜린이 잠깐 주춤했지만 이내 다시 어깨를 꼿꼿이 펴며 맞섰다.
“그래도 후원인은 친자식처럼 여기며 애정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제일 낫지 않나요?”
로제 못지않게 앙칼지게 묻는 콜린의 입이 부루퉁했다. 아무래도 루시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다른 귀족의 후원을 받으려 한다는 상황이 이해는 가지만 못내 서운한 것 같았다.
“우리 숙부님도 충분히 애정으로 지원해 줄 수 있거든!”
로제가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그러더니 자신의 숙부가 피후견인들에게 제공한 후원 내용들을 하나둘씩 읊기 시작했다.
“작년 숙부님의 피후견인들은 남부 파가냐 지역으로 유적 답사도 다녀왔어! 물론 여행 경비는 숙부님이 전부 부담하셨지! 그리고 한 달에 두 번, 각 분야에서 성공한 인사들과 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 주셨어! 예를 들면, 대배우 일라이자 콜이라든지…… 천재 화가 루첸트라든지…….”
“자, 잠깐만요!”
콜린이 황급히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일라이자 콜이라고요? <여명의 언덕>의 주연인 그 일라이자 콜 말하는 거예요?”
콜린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다래졌다. 평소 연극 보는 것을 좋아하고 연기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제일 존경하는 배우를 꼽으라 할 때마다 항상 일라이자 콜을 말해 왔다.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눈을 빛내는 콜린을 보며 로제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입가에 과시하듯 으스대는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 유명한 일라이자 콜 말이야! 나도 몇 번 식사를 함께한 적이 있어. 노래에도 일가견이 있으셔서 내게 조언도 몇 번 해 주셨지.”
지지 않고 캉캉대던 콜린은 금방 온순해진 강아지처럼 로제에게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와, 일라이자 콜과 식사라니…….”
콜린이 자신을 바라보며 꿈꾸듯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로제는 더욱 거만하게 턱을 쳐들었다. 그것으로 루시에게 누가 더 후원자로 더 알맞은가에 대한 격론은 중단되었다.
“루시.”
콜린이 루시에게 슬며시 몸을 기울였다. 그가 밥그릇을 빼앗긴 강아지처럼 간절한 표정으로 몰래 속삭였다.
“혹시라도 일라이자 콜과 식사할 기회가 생기면 나 잊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