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57화
“노엘.”
그는 루시를 보며 조금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축 처져 있어요?”
그렇게 물었지만 그는 이미 루시가 1등 자리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사실 그의 형인 에릭이 그토록 원하던 1등을 차지했으니 동생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루시가 대답 없이 고개만 푹 숙이자 노엘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선배.”
노엘이 뜬금없이 사과를 했다. 루시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네가 왜?”
“그냥 이번 선배의 성적이요…….”
결국 그가 루시의 성적을 거론하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모두 다 우리 형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아 너무 죄송해서요. 제가 좀 더 일찍 선배에게 말했다면 선배도 목걸이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루시의 목걸이와 필릭스의 교복을 훔쳤던 에릭은 기숙사 근신 일주일과 벌점 50점의 처분을 받았다. 도난 사건을 일으켰지만 제 발로 먼저 돌려주었다는 점, 그리고 극심한 학업 스트레스로 인해 저지른 일이라는 점이 참작된 결과라고 했다.
무거운 것도 가벼운 것도 아닌 애매한 처벌이었다. 교복을 도둑맞았던 베르크 공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학년 차석이라는 에릭의 위신을 지켜 주려 했던 아카데미 측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결정이었다.
“에릭 형은 시험 볼 기회를 박탈당했어야 했어요. 아마 형이 베르크 선배님들과 같은 학년이었다면 그랬겠죠.”
노엘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아카데미는 필릭스와 에릭, 둘 다의 입장을 생각해 처벌 수위를 정했지만, 또 다른 피해자인 루시의 입장은 전혀 생각해 주지 않았다.
수석이었지만, 루시는 평민이었다. 아카데미는 은근히 평민 수석이 아닌, 귀족 출신의 학생이 수석 자리를 차지하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에릭으로부터 시험을 칠 기회만큼은 빼앗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루시가 기대했던 것 이하의 등수를 받은 건 온전히 에릭의 탓만은 아니었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에릭의 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그녀를 힘들게 했던 것은 전혀 다른 남학생이었으니.
“됐어. 사실 목걸이가 없어진 것 때문에 시험을 못 본 건 아냐.”
루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냥…… 이번엔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어. 시험 볼 때도 긴장을 많이 했고.”
“항상 몸 상태가 좋을 수만은 없죠. 전 선배가 일 년 반 동안이나 1등을 지켜 온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노엘이 갑자기 목소리를 한껏 높이며 말했다.
그 뒤에도 그는 루시의 가라앉은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고개를 돌려 본관 쪽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루시의 시선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멀리서도 아주 잘 보이는 금발을 가진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 걷는 모양만 보아도 그가 필릭스라는 걸, 루시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자, 그럼 난 이만 들어가 볼게.”
루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필릭스와 마주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갑자기 벤치를 떠나려는 루시를 따라 노엘도 엉거주춤 일어났다.
“어……. 저 사람 필릭스 선배 아니에요?”
재빨리 발걸음을 옮기는 루시를 뒤따라오며 노엘이 물었다.
“선배한테 오는 것 같은데요?”
노엘의 말을 무시하며 루시는 계속 걷기만 했다. 노엘이 계속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니, 필릭스가 멈추지 않고 루시를 뒤따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루시는 근처에 보이는 건물로 숨듯이 재빨리 들어가 버렸다. 커다란 기둥 뒤에 숨어 있으니 필릭스가 건물 안으로 들어와 그녀를 찾듯 두리번거렸다. 이내 그는 루시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왜 숨어요? 필릭스 선배는 고맙다고 인사하러 온 거 같은데.”
얼떨결에 루시를 따라 기둥 뒤에 숨은 노엘이 물었다.
“인사?”
노엘의 말에 루시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번에 공동 수석을 했잖아요. 필릭스 선배랑 아드리안 선배요. 아드리안 선배는 뭐 당연한 일이지만, 필릭스 선배가 수석을 한 건 다 루시 선배 덕분 아니겠어요?”
공동 수석?
루시가 눈을 크게 떴다.
아드리안과 쌍둥이니 필릭스 역시 타고난 머리가 좋을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1등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봐, 하면 잘할 수 있으면서 왜…….
루시는 저도 모르게 자신과 함께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하던 필릭스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제 나랑은 상관없지.
필릭스가 수석을 하든 꼴찌를 하든, 이제 루시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필릭스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 * *
루시는 더 이상 필릭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드리안과 공동 수석을 했다는 소식은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도 워낙 화제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듣지 않는 것도 쉽지 않았다.
도서부원들 역시 그 놀라운 소식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어 댔다.
“듣기론 필릭스 선배, 예전에 모든 과목에서 낙제 점수를 받았던 적도 있었다던데?”
“그런데 어떻게 단번에 만점이 가능한 거야?”
“그동안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면 공작가에서 아카데미 측에 압력을 넣어 그 선배의 점수를 조금 손봤다든지.”
“하긴, 무려 베르크의 후계자인데 동생보다 뒤떨어지는 건 모양새가 안 좋을 테니까…….”
“쉿!”
멋대로 떠들어 대는 추측이 아슬아슬한 선 위를 넘나들고 있을 때, 아드리안이 등장했다. 부원들은 황급히 입을 다물고 아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수군거림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들어오자마자 가방에서 베르크가의 인장이 찍힌 봉투를 여러 개 꺼내더니 부원들에게 내밀었다.
“자, 하나씩 받아 줘.”
그건 바로 이틀 후 베르크가에서 열릴 연회로 초대하는 초대장이었다.
“그날이 나와 필릭스의 생일이거든. 시간 되는 사람은 모두 와 주었으면 좋겠어.”
베르크 공자의 생일에 후배들이 초대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작년만 하더라도, 쌍둥이와 항상 같이 다니는 남학생 두 명만이 초대장을 받을 수 있었다.
“엇? 저희가 가도 되나요?”
같은 생각을 했던 건지, 제미마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물론이지. 성인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보내는 생일이야. 이번만큼은 너희가 꼭 와 줬으면 좋겠어.”
모두 설렘과 기대 가득한 얼굴로 웅성거리며 아드리안에게서 받은 초대장을 급히 뜯어 보았다.
그 속에서 루시는 홀로 난감해졌다. 필릭스를 먼저 찾아가 앞으로 다시는 사적으로 만나지 말자고 한 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인데, 그의 생일 연회라니.
그녀가 아드리안에게서 받은 초대장을 슬그머니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그 자리에 참석하는 건 민망하고 이상한 일인 것 같았다.
아드리안이 그 모습을 발견하더니 초대장을 다시 루시에게 밀어 주었다. 그는 다른 부원들이 초대장에 정신이 쏠려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물었다.
“안 오려고?”
“아, 그게…….”
차마 필릭스의 얼굴을 보는 것이 껄끄러워서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루시가 우물쭈물했다.
“너무 낙심해 있지 마.”
그런데 아드리안은 무언가 다른 오해를 한 듯 다정한 말투로 루시를 격려하기 시작했다.
“1등은 당연한 게 아냐. 결코 쉬운 일도 아니고. 그건 내가 잘 알지.”
그러더니 그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필릭스가 겹쳐 보여 루시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이번에 성적이 떨어졌다고 해서 끝이 아니잖아. 다음 시험에서 다시 끌어올리면 되지. 이제까지 잘해 왔으니까 다음번엔 분명 오를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드리안이 하는 말이어서 더욱 뭉클했다. 그동안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도 1등을 지켜 내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동질감이 들었다.
“그러니까 축 처져 있지 말고 연회에 오지 그래?”
그가 다시 한번 초대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여전히 루시가 망설이자 아드리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잠깐, 표정이 너무 안 좋은데? 아니면 뭐 다른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그냥…… 장학금 때문에요.”
나긋나긋한 아드리안의 목소리에 마음이 놓인 덕분인지, 루시는 저도 모르게 혼자서만 끙끙 앓던 고민을 꺼내고 말았다.
“장학금?”
“이번 학기엔 수석을 못 할 것 같아서…… 다음 학년 수업료를 감면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아.”
그제야 루시의 진짜 고민을 알게 된 아드리안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그가 초대장을 툭툭 두드리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연회에 와야겠는데?”
알쏭달쏭한 아드리안의 말에 루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의 생일 연회라고는 하지만……. 글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보단 차기 베르크 공작에게 눈도장을 찍어 놓기 위해 오는 귀족들이 더 많거든. 아니면 아버지와의 연줄을 더욱 돈독히 하고 싶어 하거나. 그래서 우리는 잘 모르는 아버지의 인맥들이 더 많이 참석하는 자리야. 아마 거기서 널 후원해 줄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드리안의 뜻밖의 말에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원자라.
코너 남작이 아닌 다른 후원자를 구하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이었다.
고위 귀족이 재능 있는 아이들을 후원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주로 집안이 망하여 경제적 여유가 없는 하위 귀족의 자녀들이 그들과 후원 관계를 맺어 학업을 이어 가곤 했다.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았다. 물론 그녀가 귀족가의 태생이 아닌 평민이란 점이 좀 걸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3학기 동안이나 수석을 해 왔다. 그 점은 충분히 좋은 점수를 받을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