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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56화 (56/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56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는 필릭스와 함께 있는 시간들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들은 즐겁고 행복했다. 그는 자상하고 상냥했으며, 루시를 웃게 만들어 주었다.

필릭스라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과 신분 차이라는 간극 속에서 루시는 괴로웠지만, 그래도 필릭스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괴로움을 꾹 참아 낼 수 있었다.

정원에서 엿들은 상처 같은 말들도, 필릭스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녹아 사라졌다.

둘은 더욱 가까워졌고 루시는 이제 자신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혼자 좋아하다가 혼자 상처받는다 해도 절대로 자신의 감정을 그만둘 수 없으리란 것도.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필릭스의 시험공부를 돕고, 그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필릭스는 어떤 여학생들과도 단둘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루시에게만큼은 예외였다.

그가 루시에게 하는 태도를 보면, 분명 시험공부를 도와 달라는 것과 별개로 그녀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루시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뭐야, 쟤랑 사귀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하긴, 네가 저런 수준도 안 맞는 애랑 만날 리가 없지.”

도서관 앞에서 그가 하는 말을 듣는 순간 꿈속의 루시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아, 그래. 수준.

그녀와 필릭스 사이에 얼마나 먼 간격이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초라했다. 응답받지 못할 기대를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이 꿈에서 완전히 깨어나기로 마음먹었다. 필릭스를 알기 전으로. 그와 친해지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지금처럼 괴로울 일도 없겠지.

늦은 밤, 루시는 남학생 기숙사 앞으로 갔다. 기숙사 앞 화단에 앉아 필릭스를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필릭스는 그녀를 보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역시……. 이제 내가 불편한 걸까.

단둘이 만나는 건 괜찮지만, 사람들 앞에서 만나는 건 곤란하다는 거겠지.

그의 앞에 섰을 때, 해야 할 이야기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우려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막상 필릭스를 마주하니 더 이상 사적으로 보지 말자는 이야기는 쉽게 나와 버렸다.

그와 더불어, 깊이 간직하고 있던 그녀의 속마음도 함께.

“……전 요 몇 주 동안 선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어요. 함께 타운에 나갔던 것도, 함께 공부했던 시간도요.”

그래. 어쩌면 그와 이렇게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는 것도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루시는 참았던 감정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필릭스의 표정이 어떤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의 흐릿한 형상만 기억에 남았을 뿐이었다.

할 말을 모두 끝낸 뒤, 루시는 도망치듯 남학생 기숙사 앞을 떠났다.

여학생 기숙사로 돌아온 루시가 벽에 기대며 스르륵 주저앉았다. 그녀가 무릎을 모은 채 얼굴을 파묻었다.

이런 아픔은 처음이었다. 이 가을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 *

잠이 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눈꺼풀 위로 밝아 오는 새벽이 느껴졌다. 루시는 잠에서 깨어나 천천히 눈을 끔뻑거렸다.

충분한 수면 시간이 아니었던 건지 여전히 피곤했다. 하지만 왠지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루시가 움직이는 기척에 눈을 뜬 제미마가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루시……, 아직 한 시간 정도는 더 자도 돼.”

“오늘은 시험 첫날이잖아.”

루시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책상으로 걸어가 의자를 빼어 앉았다. 의자 끌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제미마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피어났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지금 공부한다고 해서 크게 바꿀 수 있는 건 없어. 넌 평소에 열심히 했잖아. 정말 죽을 듯이. 그러니까 시험 칠 땐 평소의 실력을 믿고, 지금은 그냥 푹 자.”

제미마가 침대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루시를 의자 위에서 일으켜 세웠다.

루시는 중요한 부분을 마지막으로 훑어봐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그녀의 충혈된 눈을 본 제미마 역시 이번만큼은 순순히 넘어가 주지 않았다.

“너 그러다 진짜 쓰러진다? 쓰러지면 열심히 공부한 게 다 무슨 소용이야!”

결국 제미마에 의해 루시는 침대에 강제로 눕혀졌다. 더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루시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결과적으론 제미마의 말을 들은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 한 시간 정도 더 수면을 취하는 것만으로 루시는 몸이 한결 개운해진 것 같았다. 여전히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눈 밑이 거뭇하긴 했지만.

최근 며칠간 루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시간을 공부에 매달려야 했다. 그녀의 집중력에 문제가 생겨 효율적으로 시간을 쓸 수 없었던 탓이다.

분명 책을 읽고는 있는데 글자가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문제를 읽었는데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충 넘어갈 수는 없었기에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꾸역꾸역 글자들을 머릿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주 약간의 집중력이 사라져도 그녀의 생각은 곧장 딴 곳으로 튀었다. 자꾸만 시선이 텅 빈 옆자리로 갔다.

……고작 몇 번 같이 공부했을 뿐인데.

필릭스의 빈자리는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그를 찾아가 했던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실 같이 공부하지 말자고 했던 말은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필릭스 베르크는 아주 먼 사람이었다. 그녀가 있는 세계에는 결코 어울리지도, 섞이지도 않을 딴 세상의 사람.

그렇기에 더더욱 루시는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수석 자리를 지켜 내고,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사수한다.

오직 이것만이 루시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었다.

“팍팍 좀 먹어.”

식당에 도착해서도 입맛이 없는지 깨작거리는 루시를 보며 제미마가 말했다. 옆에서 리타도 걱정스런 얼굴로 보고 있었다.

“난 괜찮아. 시험 치기 전에 많이 먹으면 속이 안 좋아서 그래.”

결국 음식의 절반도 먹지 못한 채, 루시는 식사를 끝마쳤다.

교실에 도착한 루시는 책상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 선생님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나타난 피터 선생이 첫 줄부터 시험지를 나누어 주었다.

정신 차려야지.

그동안 수없이 생각했던 말을 또 한 번 되뇌었다.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수석 자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 내야 했다.

루시는 평소와는 다르게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신 앞에 놓인 시험지를 읽어 나갔다.

* * *

3일에 걸친 시험이 모두 끝났다.

며칠 후, 1층 게시판 앞에는 2학년 학생들이 우글우글 모여들었다. 게시판 중앙에 떡하니 붙어 있는 등수 표 때문이었다. 앞쪽에 서서 먼저 등수를 확인한 학생들이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렸다.

뒤쪽에 서 있던 루시와 콜린도 성적을 확인하기 위해 앞으로 파고들었다. 등수 표 앞에 선 루시가 항상 그래 왔듯이 제일 윗줄부터 이름을 확인했다.

1등 에릭 로먼

자신의 것이 아닌 이름을 본 순간, 루시는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 낯선 이름을 한참이나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보고, 또 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콜린이 어깨를 살짝 잡았다.

“루시…….”

평소의 쾌활한 목소리가 아닌, 안타까움이 서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루시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한 줄 아래로 옮겨갔다.

하지만 ‘2등’ 옆에도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3등’ 옆도 마찬가지였다. 루시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시선을 계속 내렸다.

4등 루시 키넌

처음 받아 보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등수가 거기에 있었다.

“4등…….”

루시가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충격이 너무 커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자신의 어깨를 살짝 흔드는 콜린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루시, 괜찮아?”

콜린이 그녀에게 가만히 물었다. 그제야 루시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몰래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학생들이 황급히 고개를 딴 데로 돌렸다.

“응, 괜찮아…….”

남들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꼴사나운 모습은 보일 수 없었기에, 루시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입가가 경련이 난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게시판 앞을 빠져나온 루시가 뒤따라오던 콜린에게 말했다.

“나 혼자 좀 걸을게.”

루시의 말에 콜린은 안쓰럽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혼자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콜린 대신 따라온 건 다른 학생들의 진득한 눈길이었다. 다들 루시를 쳐다보며 드디어 그녀가 1등 자리에서 내려온 것에 대해 열심히 수군대느라 바빠 보였다.

루시는 그들의 눈을 피해 도망치듯 교정으로 나왔다. 터덜터덜 걷던 그녀는 눈앞에 제일 먼저 보이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실망스러운 것보다 먼저, 걱정과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4등도 높은 등수였지만, 문제는 루시가 받은 점수와 에릭 로먼이 받은 점수가 꽤나 차이가 난다는 점이었다. 기말고사에서 루시가 다시 1등을 한다 하더라도 그녀가 2학년 2학기 전체 수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낮았다. 에릭이 기말고사를 완전히 망쳐 버리지 않는 한.

다음 학기의 장학금이 루시의 손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어떡하지.

루시가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 물었다.

물론 다음 학기 장학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녀는 계속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었다. 코너 남작이 알게 된다면 수업료까지 지원해 주겠다고 나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시는 남작가와 영지가 그다지 부유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여름, 브롬에는 심한 폭우와 홍수까지 덮쳐 영지민들의 사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코너 남작은 그런 상황이라 하더라도 루시에게 수업료를 지원하겠다고 나설 것이었다. 루시로선 그 일만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고뇌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 옆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루시 선배.”

어느샌가 다가온 노엘이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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