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55화
필릭스와 로제가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보며 루시는 어쩐지 섭섭함을 느꼈다. 게다가 이전에 필릭스가 로제에게 파트너 신청을 했던 사실까지 떠오르자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하긴, 로제 선배는 엄청 아름다운 데다가 집안도 좋고……. 굳이 따지자면 나보단 로제 선배가 필릭스 선배랑 훨씬 더 잘 어울릴…….
아니, 내가 왜 이런 비교를 하고 앉았지?
루시는 번뜩 정신을 차리며 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부티크를 나오며 루시는 필릭스가 손에 든 쇼핑백을 흘끔 훔쳐봤다. ……분명 그 모자였다. 자신의 눈에도 예뻐 보였던.
그리고 로제 선배가 살까 말까 고민하며 잠깐 들어 보았다가 다시 내려놓았던.
로제 선배에게 줄 건가? 아까 그렇게 쏘아붙이더니 은근 미안했나 봐.
루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필릭스는 겉으론 티 내지 않았지만, 로제의 기분을 상당히 신경 써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한테 관심 있다고 생각했던 건 역시 착각이었어.
식당으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계속 투닥거리는 필릭스와 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시는 생각했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 저 선배가 나한테 관심이 있다니.
루시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쓰라린 느낌이 들었다.
필릭스와 로제가 나란히 붙어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리고 그 둘이 장난을 치며 대화를 나누고 편하게 서로를 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루시는 바늘로 심장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마음이 아파 왔다.
* * *
그래서 그 순간에 그렇게 놀랐는지도 모른다.
짙은 가을밤, 덤불 아래서 숨죽이며 루시는 프레드 영감의 발소리를 들었다. 과연 지금 세차게 뛰는 이 심장이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열심히 고민하며.
문지기에게 들킬까 봐서인지, 아니면 바로 옆에,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함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선배가 옆에 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긴장감에 가만히 숨을 참아 보았지만,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더 잘 느껴질 뿐이었다.
그때 머리 위를 부드럽게 감싸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모자였다.
필릭스는 그녀의 머리에 모자를 씌워 놓고는 아닌 척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루시는 자신의 머리에 올려진 모자를 가만히 만져 보았다. 감촉만으로 알 수 있었다. 부티크에서 자신이 마음에 들어 했던 바로 그 모자라고.
“알레르기 약을 만들어 주는 데 대한 내 보답이야. 사양하지 말고 받아 줘.”
필릭스의 나직한 음성이 꿈결처럼 들려왔다.
아……. 날 위해 산 모자였구나.
로제 선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
그 순간, 안도감마저 들었던 건 왜일까.
루시의 가슴 속에 때아닌 봄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기뻤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상대를 신경 쓰고 있었던 건, 이 선배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음을.
그를 볼 때마다 붉어지던 얼굴, 세차게 뛰던 심장, 자꾸만 흘끔거리는 눈.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와 행동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고민하던 시간들. 그가 다른 여학생과 친근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콕콕 찌르듯 아파 오던 심장…….
모두 다, 자신이 이 선배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 * *
자정이 가까운 시간, 루시는 옷장 앞에 앉아 모자를 들고 있었다. 깊은 잠에 든 제미마의 숨소리가 방안에 느릿하게 흘렀다. 사방은 어두웠고, 오직 창밖에서 흘러드는 달빛만이 루시와 모자를 희미하게 비추어 주었다.
루시는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슬며시 써 보았다. 필릭스가 그녀에게 모자를 씌울 때 스쳐 지나갔던 가을밤의 공기가 그대로 묻어 있는 듯했다.
코끝에 느껴지는 가을 냄새에 마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루시의 입가에 옅은 설렘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루시는 모자를 다시 벗어 내려놓으며 심란한 얼굴이 되었다.
어차피 안 될 걸 알잖아.
에버른가에서 필릭스 베르크를 처음 만났을 땐, 그저 짓궂고 제멋대로인 남자애라고만 생각했다.
자신과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귀족 가문의 도련님. 단지 그렇게만.
수년의 시간이 흘러 아카데미에서 뜻하지 않게 재회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베르크 공작가의 후계자였고, 그녀는 그에 한참 못 미치는 평민 집안 출신이었다. 그와 그녀는 아무런 접점도, 엮일 만한 구실도 없었다.
그래서 루시는 자신이 필릭스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내가 그 선배를?
그녀가 베르크 공작가의 후계자와 이어질 일은 절대로 없었다. 루시는 자신이 그런 허황된 감정을 시작해 버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설렘은 잠시뿐, 루시는 현실을 자각해야만 했다.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필릭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은 꾹꾹 눌러 숨겨야 마땅한 것이라고.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필릭스는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루시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먼저 루시를 찾아왔으며, 먼저 말을 걸고, 먼저 함께 공부할 것을 제안했다.
루시는 얼떨떨했다. 줄곧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던 그 선배의 적극적인 행동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틈엔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함께 공부를 하고, 밥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그런 달콤한 시간에 정신이 팔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기대를 하게 되었다.
어쩌면…… 정말 기적처럼 그와 자신이 잘 될지도 모른다고.
필릭스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더 상처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날의 일이.
* * *
“필릭스, 당장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해!”
“무슨 일이야?”
“베르크 공작께서 오셨어. 지금 교장실에서 널 기다리고 계셔.”
갑작스러운 공작의 방문과 함께 필릭스는 정원을 떠났다. 그는 정원에서 사라지기 전 잠깐 루시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걱정과 불안이 떠올라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와 함께 있으며 보여 주었던 편안한 웃음은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
평화롭고 즐거웠던 시간이 산산조각 나 버렸다. 루시는 혼자 공터에 남아 한참을 제자리에서 서성거렸다.
얼마 후, 필릭스가 없어 허전한 마음을 안고 그녀는 정원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카데미 건물이 보일 때쯤이었다. 덤불 뒤쪽의 벤치에 앉은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였다.
루시가 몸을 낮춰 덤불 뒤로 숨었다. 그들의 대화 속에 필릭스의 이름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교장실로 들어가는 공작님의 표정이 상당히 안 좋았다던데…….”
“뻔하지, 뭐. 하필 필릭스가 그 평민 여자애와 단둘이 있을 때 들이닥치셨으니. 어쩌면 공작님이 그 모습을 보셨을지도.”
루시는 숨을 훅 들이켰다. 저들이 말하는 평민 여자애는 분명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필릭스가 운이 안 좋았지. 걘 그저 그 여자애랑 잠깐 즐기려 했을 뿐이었을 텐데.”
“차라리 로제 밀라드와 있다가 들킨 거면 사정이 좀 나았을지도 몰라.”
“그런데 어쩌다 로제에서 그런 여자애로 취향이 바뀐 걸까?”
그들이 비웃음을 섞어 가며 내뱉는 말을 들으며 루시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여린 손바닥 위로 깊은 손톱자국이 찍혔다. 얼굴이 뜨거웠다.
자신을 두고 하는 말보다 필릭스를 향한 말들에 더 화가 났다. 저들은 필릭스에 대해 아무렇게나 떠들고 있었다. 정작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모르면서.
“그래도 공작님이 눈감고 넘어가 줄지도 몰라. 자기도 젊었을 땐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고 다녔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평민 여자애는 좀…….”
그들의 말은 날카로운 화살처럼 루시의 가슴으로 날아와 콱콱 박혔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이리저리 오르내리는 경험은 처음이라,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더 있다간 참지 못하고 후회될 말을 소리쳐 버릴 것 같아, 루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신경 쓸 필요 없는 말이야.
루시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계속해서 되뇌었다.
잘 모르면서 떠드는 말일 뿐이야.
하지만 그들의 말은 귀찮은 날벌레처럼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필릭스는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루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말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 그런 말을 떠들어 대는 사람이 나쁜 거야.
하지만 만약, 나와 함께 있는 게 정말로 필릭스 선배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면?
루시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동안 필릭스와 보낸 시간들이 너무 즐거워서,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이 필릭스 선배에 대해 나쁘게 떠들어 댄다면?
나 때문에 베르크가의 후계자인 그를 우습게 본다면?
그런 씁쓸한 생각들이 걷잡을 수 없이 떠오르고, 루시는 처음으로 자신의 신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브롬에서 콜린과 격의 없이 장난치고, 웃고, 떠들며 지낼 때에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고민을.
심지어 입학식 날, 에릭 로먼에게 신입생 선서 기회를 빼앗겼을 때도 그저 허탈하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을 뿐, 지금처럼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냉혹한 세상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자신과 귀족 사이의 벽을 바로 눈앞에서 목도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 루시는 스스로가 부끄럽고 우스웠다. 필릭스와의 관계에 있어 일말의 가능성을 가졌던 것이.
어쩌면 그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어리석은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