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54화 (54/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54화

여학생 기숙사 사감인 플로라였다. 그녀는 루시를 발견하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엄격하기로 소문이 난 그녀는 지옥의 수문장 같은 모습으로 여학생 기숙사 앞을 지키기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얼굴에 걱정만 한가득 떠올라 있었다.

“몸은 좀 괜찮니? 몸살이 났을 땐 푹 쉬어야 한다.”

“네? 아, 네에…….”

뜻밖의 질문을 받은 루시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플로라는 루시가 어젯밤 아파서 업혀 온 줄로만 알고 있는 듯했다. 실상을 알았다면 매서운 눈초리와 함께 ‘학생의 품위’ 어쩌고 하는 잔소리가 먼저 날아왔을 것이다.

“자, 이거.”

플로라가 작은 가방을 건넸다. 문학의 밤에서 루시가 미처 챙기지 못하고 도서관 홀에다 두고 온 것이었다.

“어젯밤 늦게 아드리안이 와서 맡기고 갔다. 그전에는 필릭스가 정신이 없는 널 업고 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루시는 엄마에게 혼이 나듯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섰다. 아카데미에 입학 후, 이런 일로 남에게 폐를 끼친 것은 처음이었다.

“저…… 필릭스 선배는 화가 많이 났던가요?”

“화가 났냐고?”

루시의 물음에 플로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낼 이유가 뭐가 있겠어? 네가 아프니 그 애 마음도 안 좋을 뿐이었겠지.”

“네?”

플로라의 대답에 이번에는 루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좋아하는 여학생이 아파 쓰러졌는데 얼마나 놀랐겠어?”

플로라의 말이 너무 뜬금없어서 루시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반응을 본 플로라가 아리송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둘이 교제 중인 거 아니야?”

“네에?”

루시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공중에 내저었다.

“절대 아닌데요!”

“그래? ……뭐,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플로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방까지 직접 데려가 침대에 눕혀 주고, 신발도 벗겨 주고. 게다가 네가 쓰러져서 적잖이 충격을 받은 표정이던데. 전혀 기억이 안 나?”

플로라가 설명해 준 어제의 전말에 루시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벙한 얼굴이 되었다. 무어라 대꾸할 생각도 못 한 채 그녀는 황급히 사감에게 인사를 한 후,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교정을 지나 교실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평소와 다르게 삐거덕거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하고 다른 학생과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그 선배가 그랬다고……?”

넋을 놓은 얼굴로 계단을 오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감 플로라의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선배가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해 줄 이유가 없는데…….

복도를 걸으면서도, 교실에 도착해서도 그녀의 의문은 끝이 나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필릭스가 루시에게 보여 준 태도들은 한두 가지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어느 날은 부담스러우리만치 빤히 쳐다보다가, 어느 날은 투명 인간 취급을 했다. 게다가 어젯밤엔 또 태도가 바뀌어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지 않은가.

그의 변덕스러운 행동들에 루시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제미마.”

수업이 끝난 후, 루시가 제미마를 살짝 불렀다.

“남자가 여자를 갑자기 빤히 쳐다보는 건 무슨 뜻일까?”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이렇게.”

루시가 미간에 주름이 잡힌 필릭스의 얼굴을 흉내 내며 물었다.

“이렇게 심각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거야.”

“몰라서 물어?”

제미마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관심 있는 거잖아.”

“관심?”

“그래, 이성적 관심.”

하지만 루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선배가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루시가 또 한 번 질문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또 싹 무시해 버리는 거야. 눈길도 주지 않고 일부러 자리를 피하면서.”

“관심 있는 거네.”

이번에는 반대쪽 옆자리에 앉아 있던 리타가 대답했다.

“일부러 무시하는 척하면서 눈길을 끌려는 속셈이지.”

역시나 루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가 너한테 그러는데? 설마.”

제미마가 즉각 짓궂은 웃음을 흘리며 몸을 기울였다.

“필릭스 선배?”

“뭐? 아냐!”

루시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말이 돼? 그 선배는 필릭스 베르크라고!”

“흐음.”

제미마는 여전히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선배는 여자에 관심이 없어 보이긴 해. 그래서 내가 깜짝 놀란 거 아냐. 어제 널 데려다줬단 얘길 듣고.”

그러더니 제미마가 팔짱을 끼고서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네가 설명한 그 남자애는 확실히 너한테 관심이 있는 게 분명해.”

“내 얘기 아니라니까.”

루시는 어물쩍 넘어가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그러나 가슴 속에서는 거대한 해일이 불어닥친 듯 심장이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관심 있는 거라고? 그 선배가?

나한테?

“말도 안 돼.”

루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 * *

제미마와 리타 앞에선 엉뚱한 소리로 치부하며 그냥 넘겨 버리는 척했지만, 사실 루시는 그들이 한 말을 계속해서 곱씹고 있었다. 이상한 기대감이 계속 부풀었다.

혹시 정말로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가?

어쩐지 울렁거리는 마음을 안고 교정을 걷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어떤 식물이었다.

아, 마르암 덩굴 알레르기.

루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덩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작년 가을, 그녀는 알레르기가 있는 베르크 쌍둥이를 위해 약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그 약도 다 떨어져 갈 때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 어젯밤엔 필릭스 선배도 나 때문에 고생했을 테니까……. 알레르기 약이나 만들어 주어야겠다.

루시는 홀린 듯이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이어 나갔다.

이건 절대로, 그 선배가 나에게 관심 있을 거란 말을 들어서가 아냐. 나도 도움받은 게 있으니 보답을 하려는 것뿐이지.

그리고 약이 완성되면 아드리안 선배를 통해서 전달만 해야지.

루시는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가며 알레르기 약 만들 준비를 했다.

그런 루시 앞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다름 아닌 필릭스 본인이었다.

그는 약을 만들기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루시를 찾아옴으로써 그녀를 또 한 번 놀라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럼 같이 가 주기만이라도 하면 좋을걸.”

“바쁘시잖아요. 정말 괜찮아요.”

“그럼 내가 갈게.”

약 재료를 사기 위해 타운에 나가야 하는 루시를 따라가 주겠다며 먼저 나서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 * *

“야, 루시. 필릭스 선배 말이야! 보면 볼수록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아르베나 부티크 안. 루시에게 이것저것 입어 보라며 드레스를 권하던 콜린이 귓가에 몰래 속삭였다. 자신도 필릭스와 친해지고 싶다며 떼를 써서 타운까지 따라 나온 그는 상당히 들떠 보였다.

“처음엔 무뚝뚝한 선배인 줄 알았는데, 은근 재밌고 자상한 구석이 있더라니까! 글쎄, 저번에는 나한테 귀를 잡아당기는 장난까지 치는 거 있지? 분명 내가 편해지신 게 틀림없어!”

뒤의 말에는 그다지 동의할 수 없었지만, 필릭스가 은근히 자상한 구석이 있다는 말에는 루시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줘. 무겁잖아.’

‘내 옆에 딱 붙어서 걸어.’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

그는 줄곧 루시가 불편해하거나 다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옆에서 신경을 써 주었다. 상점가에서도, 사람이 붐비는 대로변에서도.

그러니 그때마다 제미마와 리타가 했던 말이 저절로 귓가에 맴돌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관심 있는 거네.’

루시는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는 척하며 슬쩍 필릭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성용 가방과 신발들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대 앞에서 시큰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정말일까? 저 선배가 정말 나에게 관심이…….

“루시, 이것도 입어 봐!”

어디선가 콜린이 다른 드레스를 들고 나타났다. 루시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콜린을 슬쩍 나무랐다.

“그만 가져와! 어차피 사지도 못할 텐데.”

루시는 약의 재료를 사느라 큰 지출을 한 상태였고, 부티크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콜린과 로제는 새로운 드레스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아휴.”

루시는 콜린과 로제가 귀엽다며 머리에 씌워 놓은 모자를 벗었다. 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써 본 것이지만, 사실 루시의 눈에도 꽤 예뻐 보였다. 그녀가 슬쩍 모자의 가격표를 확인했다.

헉!

말도 안 돼! 모자가 이 가격이면 드레스는 대체 얼마란 거야?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루시는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슬쩍 입고 있던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비싼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서둘러 점원을 불러 드레스를 벗었다.

그와 반대로 로제는 끊임없이 물건을 주문했다. 마음에 드는 드레스가 있으면 고민도 없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와, 로제 선배는 저렇게 고민도 없이 턱턱 살 수 있구나.

루시는 신기함과 부러움이 담긴 눈길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적당히 좀 하지?”

그때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가 불쑥 날아들었다. 필릭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로제를 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구경할 생각인데? 죄다 비슷비슷한 옷들뿐인데.”

“네 눈에야 그렇겠지.”

로제가 즉각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그렇게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쇼핑하는 걸 도와주는 건 어때?”

“내가 왜 그딴 걸 도와줘야 하는데.”

“그럼 여긴 왜 따라왔어?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서 있을 거면 왜 왔냐고. 마네킹 하려고? 그럼 너도 드레스 입고 저기 서 있어!”

둘은 길에서 만난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에게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시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부부싸움 같잖아.

필릭스 앞에만 서면 왠지 모르게 몸이 굳어 말도 제대로 못 하게 되는 루시로선, 그에게 지지 않고 큰소리를 내는 로제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게다가 자신에겐 항상 짧고 무뚝뚝하게 대답하면서 로제에겐 무람없는 친구처럼 행동하는 필릭스의 모습 또한 새롭기만 했다.

둘이 정말 친한가 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