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53화
여학생 기숙사 앞에는 벌써 많은 남학생들이 자신의 파트너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제미마와 리타도 루시에게 인사를 한 뒤, 자신들의 파트너를 향해 사라졌다.
루시도 콜린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아.”
그러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말았다. 필릭스였다.
검은 정장 차림에 평소 이마 위로 늘어뜨리고 다니던 금발을 뒤로 흐트러짐 없이 넘긴 그의 모습은 낯설지만 매혹적이었다. 어쩐지 예민해 보이는 그의 날카로운 표정이 그를 한층 더 신비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각자의 파트너가 옆에 서 있다는 사실도 잊고 그를 훔쳐보기에 바빴다.
필릭스는 무언가 언짢은 듯 눈을 매섭게 뜨고 있다가 루시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는 루시와 마주칠 때마다 곧바로 시선을 돌리거나 외면해 버리곤 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커다래진 눈으로 루시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눈을 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루시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콜린이 자신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콜린!”
그녀가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갔다.
루시는 콜린이 내미는 팔을 슬쩍 잡았다.
“어서 가자.”
얼른 이 자리를 떠나 도서관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학생들이 계단 위를 올려다보며 한꺼번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수런거림에 루시와 콜린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붉은 머리칼을 아름답게 틀어 올린 채 새하얀 드레스를 차려입은 한 여학생이 우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로제 밀라드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루시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와……! 너무 아름다워.
그녀는 마치 눈 위에 피어난 한 송이 장미 같았다.
그 화려함에 학생들은 홀린 듯한 얼굴로 그녀를 우러러보았다. 로제는 그런 시선에도 전혀 부담스러움을 느끼지 않는지, 오히려 당당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로제가 필릭스를 발견하고는 자리에 멈추었다. 그녀는 필릭스가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필릭스는 정신이 딴 곳에 팔려 있는 듯 엉뚱한 곳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 여전히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루시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필릭스의 에스코트를 기다리던 로제는 언짢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더니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곧 그녀를 발견한 필릭스와 로제가 무언가 아옹다옹하며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잠시 후, 순식간에 불만 가득한 표정을 얼굴에서 지워 버린 로제가 필릭스에게 팔짱을 끼며 걷기 시작했다.
루시 역시 콜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도서관을 향해 갔다.
난생처음 신어 보는 높은 구두에 걸음이 자꾸만 삐걱거렸다. 게다가 오늘 밤 자신의 자작시를 발표할 생각에 잔뜩 고무된 콜린이 파트너의 걸음 속도는 생각지도 않고 걷는 바람에 루시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자신의 어색하고 우스꽝스런 걸음걸이가 더욱 부끄러웠던 건, 바로 뒤에서 필릭스와 로제가 뒤따라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제 밀라드의 드레스 자태와 걸음걸이가 얼마나 우아하고 능숙할지, 루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루시는 자신을 로제와 비교하고 있었다.
로제 선배의 우아한 걸음을 보다가 나처럼 형편없이 걷는 애를 보면 얼마나 웃길까?
하지만 루시는 곧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떨쳐 내기 위해 애썼다. 이렇게 우울한 생각만 하다간 오늘 밤을 망쳐 버리게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오늘은 소중한 친구가 자신의 자작시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날이었다. 시무룩해 있기보다는 콜린을 응원하고 격려해 주어야 했다.
루시는 콜린과 일부러 웃고 떠들며 기분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도 콜린이 잘 맞장구쳐 준 덕분인지, 도서관 건물 앞에 도착할 때쯤엔 루시의 기분이 한결 밝아진 상태였다.
루시와 콜린은 문학의 밤이 진행될 도서관 홀로 들어섰다. 파트너가 없이 행사 진행에 집중하기로 한 아드리안과 다른 몇몇 도서 부원들이 행사를 진행할 준비를 끝마쳐 놓은 상태였다.
아드리안의 준비성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행사 진행은 물 흐르듯 완벽했고, 문학의 밤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서정적이고 깊은 가을밤 속으로 빠져들었다.
특히 로제 밀라드가 무대로 올라와 풍부한 목소리로 <황금의 여왕>을 불렀을 때는 분위기가 최고조로 치닫는 듯했다.
그녀는 오페라 가수 못지않게 뛰어난 음색과 가창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노래를 돈도 내지 않고 들을 수 있다니.
루시는 감탄했다. 그러나 그 순수한 마음과는 별개로, 마음 한구석이 어쩐지 찌릿했다. 로제가 빛나면 빛날수록 자기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자꾸 아무런 상관이 없는 로제와 자신을 비교하게 되는 것인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왜 자꾸, 어떤 한 사람이 신경 쓰이는지도.
루시는 무심코 필릭스가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녀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필릭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파트너, 로제가 아니라 바로 루시 자신을.
루시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제는 그의 행동을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언제는 완전히 무시하다가, 이제는 또 이유를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 온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 *
모든 발표가 끝이 났다. 분위기가 반전된 홀 안에는 이제 경쾌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홀 중앙으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제일 신난 건 콜린 같았다. 성공적인 자작시 발표를 마친 그는 기분이 아주 좋은 듯, 자꾸만 루시를 이끌고 댄스홀 중앙으로 나가려는 바람에 무척이나 난감했다. 더군다나 긴장을 풀라며 그가 건네준 사과주를 마신 후부터는 얼굴에 열이 오르기까지 했다.
기운이 넘치다 못해 폭발해 버린 것 같은 콜린을 감당하기에 루시는 너무 피곤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사과주를 채워 놓아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선 홀을 빠져나왔다.
“후아.”
루시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어 냈다. 가을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찬 공기를 마시니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발표회가 무사히 끝난 것 같아서 다행이야.
창고에서 사과주가 든 궤짝을 찾아내며 루시는 생각했다.
도서 부원들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무도회만 무사히 끝나면 편한 마음으로 기숙사에 돌아가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훌륭한 행사로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하며 궤짝을 끌어내던 루시가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기 때문이다.
루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필릭스의 환영이 보이는 건, 자신이 너무 피곤해서라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가슴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눈앞이 살짝 어지러운 것도 그 탓이라고.
하지만 환영이라고 생각했던 필릭스는 뚜벅뚜벅 창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서로를 발견한 둘 사이에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고요한 만큼 숨 막히는 대화도 몇 번 오갔다. 필릭스는 루시의 뒤꿈치에 난 상처를 발견하더니 잠깐 앉아 있으라는 수상한 배려의 말까지 보탰다.
루시는 점점 얼굴에 열이 오르고 정신이 아롱거렸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평소였다면 그의 앞에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갔을 루시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필릭스의 옆에 앉아 있었다.
진정하지 못하고 세차게 뛰는 심장과 다르게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다.
옆에서 그가 무어라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구두에 관한 얘기인 것 같았다. 루시는 그가 시키는 대로 발을 흔들어 구두를 벗은 뒤 옆에 놓아 두었다.
왜 이렇게 졸리지…….
그녀는 눈을 뜨고 있기 위해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졌다. 그중에서도 제일 무거운 건 그녀의 눈꺼풀이었다.
결국 밀려오는 잠을 이겨 내지 못한 루시가 눈을 감았다.
* * *
시끄럽게 지저귀는 새소리에 루시는 스르륵 눈을 떴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따가울 정도로 눈부셨다.
“이제 일어났어?”
제미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루시에게 다가왔다. 입꼬리에 음흉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보통 제미마가 그런 미소를 보이는 건 무언가 놀랍고 재미있는 가십거리를 발견했을 때였다.
루시가 어지러운 머리를 꾹꾹 누르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나 왜 여기 있지…… 분명 도서관 창고에서…….”
그제야 창고에 사과주를 가지러 갔다가 필릭스의 옆에 앉아 있게 되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뒤의 기억이 뚝 끊겨 있었다.
“나…… 여기 어떻게 돌아온 거야?”
“기억 안 나? 필릭스 선배가 업고 왔잖아.”
“뭐……?”
루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누구……? 누가 업고 왔다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제발 잘못 들은 것이기를 빌며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러나 제미마는 그녀의 바람을 무참히 깨부수며 신난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필릭스 선배 말이야! 어제 창고에서 그 선배랑 단둘이 있다가 잠들었다며? 콜린이 준 술 때문에! 그래서 그 선배가 널 여기까지 데려다준 거고!”
털썩.
루시가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뭐야, 자세히 말해 봐!”
제미마가 루시 곁으로 뛰어들더니 그녀를 마구 흔들어 댔다.
“응? 둘이 언제부터 친했는데? 어제 창고에서 뭐 했는데?”
그러나 제미마의 질문에도 루시는 반응이 없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필릭스 베르크 앞에서.
창백했던 루시의 얼굴은 이제 파랗게 질려 가고 있었다.
“……나 오늘 수업 안 갈래.”
멍하니 중얼거리는 루시의 말을 들은 제미마가 과장되게 놀란 척을 하며 창밖을 확인했다.
“이상하네, 해는 동쪽에서 떴는데.”
그녀는 다시 루시에게 다가와 그녀를 억지로 일으켰다. 하는 수 없이 루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업에 갈 준비를 했다.
무거운 걸음을 옮겨 여학생 기숙사를 나서려던 찰나,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루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