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52화
도서관을 나온 루시는 남자 기숙사로 향했다. 그녀가 알기론 이 시간대에는 아드리안에게 수업이 없었다. 그를 찾아가 빠른 시간 내 필릭스에게 도서를 받아 와 달라고 얘기할 작정이었다.
나한테는 기다리라느니, 이상한 소리만 하니까. 아드리안 선배 말은 듣겠지.
남학생 기숙사에 도착한 루시는 로렌 사감에게 허가증을 받은 뒤, 아드리안과 필릭스의 방이 있다는 이 층으로 향했다.
문 앞에 도착한 루시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한 번 더 두드리려는 찰나 벌컥 문이 열렸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갑자기 마주한 두 사람이 동시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부스스한 금발에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베르크 공자가 루시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시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썹이 꿈틀거리고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보니 틀림없는 필릭스 베르크였다. 아니나 다를까, 방 안 침대에서 스르륵 고개를 든 다른 베르크가 루시를 보며 말했다.
“루시?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루시는 상황을 설명한 뒤, 연체 도서만 받아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또 상황이 예상치 않게 흘러갔다.
아드리안이 아침을 먹겠다며 방을 나선 후 둘만 남게 되자, 필릭스는 또 이상한 요구를 해 왔던 것이다.
“저기 앉아서 기다려.”
그가 아드리안이 일어난 침대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는 소파에 앉더니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니까, 어제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정말 왜 저러는 거야!
그냥 먼저 물어볼까…… 혹시 리모시움 약 때문에 이러는 거냐고. 그리고 양호실에서 있었던 일도…… 기억하고 있는 거냐고.
하지만 이내 루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저히 그 일에 대해서 먼저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루시는 어깨를 움츠리고 앉아 괜히 주변만 둘러보았다. 침대 헤드에 교복 셔츠 하나가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었다. 루시는 단번에 필릭스의 셔츠임을 알아보았다. 소매 부분이 둘둘 말려 있었기 때문이다. 필릭스는 평소에도 재킷 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녔고, 아드리안은 아무리 더워도 소매를 걷지 않았다.
침대 옆 협탁에는 필릭스의 이름이 적힌 노트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아, 여기 필릭스 선배 침대구나.
……다른 데 앉을까.
고민하던 루시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러나 필릭스가 책장을 넘기며 움직이는 기척을 보이자 깜짝 놀란 루시가 다시 주저앉았다.
깜짝이야.
머쓱해진 루시가 머리를 긁적였다.
둘 중 누구 하나 입을 떼지 않는 정적 속에서 필릭스의 책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어색하게 앉아 있던 루시가 침대 헤드 위에 걸린 초상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곧 그 초상화 속의 얼굴을 알아본 루시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건 필릭스의 어릴 적 모습이었다.
아드리안의 침대 헤드 위에도 똑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아이의 초상화가 걸려 있긴 했지만, 루시는 딱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그림 속 아이가 필릭스라는 것을.
어릴 적, 호숫가에서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 언짢은 기색이 오직 그 초상화에만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져 가는 얼굴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초상화로 다시 보니 바로 어제 만난 것처럼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아, 그때 정말 꿀밤 한 대만 때리고 싶었는데!
루시는 그때의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라 슬쩍 웃음이 났다.
필릭스가 독서에 몰두해 있는 모습을 몰래 확인한 후, 루시는 초상화 속 어린 필릭스의 이마에 살짝 꿀밤을 먹였다.
얼른 책 내놔!
물론 꿀밤을 맞은 어린 필릭스는 아무 말 없이 뚱한 표정으로 루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앳된 얼굴을 보니 루시는 괜히 미안해져서 소년의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래, 넌 아무 잘못이 없지. 이상한 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를 저 선배지…….
탁!
책 덮이는 소리에 깜짝 놀란 루시가 화들짝 놀라 그림에서 손을 거뒀다. 돌아보니 필릭스의 눈이 어느새 자신을 향해 있었다.
“……가져가.”
갑자기 그가 다 읽지도 않은 책을 내밀었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난 얼굴이었다.
루시가 침대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필릭스에게 다가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아…… 어떡해…… 꿀밤 때리는 것까지 다 봤나 봐…….
그녀가 눈을 질끈 감으며 필릭스에게서 책을 받아들었다. 루시가 방을 나가던 순간, 싸늘한 표정의 필릭스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저거 내 초상화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루시는 새하얘진 얼굴로 재빨리 문을 닫았다.
왜 꿀밤을 때려서는!
도망치듯 긴 복도를 걸으며 루시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필릭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였을지 생각하자 루시는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분명 이상한 애로 보였겠지?
아니, 차라리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다행이었다.
지난 학기부터 자신에게 묘한 태도를 보이던 그가, 이제는 정말로 무언가를 따져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뒷골이 서늘해졌다.
이제 정말로 그 선배와 마주치지 말아야겠어.
루시는 또 한 번 다짐하며 남학생 기숙사를 뛰쳐나왔다.
* * *
그런데 필릭스의 행동은 루시의 예상을 또 한 번 뛰어넘었다.
루시와 마주칠 때마다 집요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그가, 책을 돌려받은 뒤부터는 그녀를 철저히 무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필릭스 베르크가 타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므로 이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루시만은 확신했다.
그는 정말 대놓고 루시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다.
아드리안과의 대화를 위해 가까이 다가가면 그는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분명 그녀의 목소리가 들릴 텐데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가끔은 아예 자리를 피해 버리기도 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루시는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연체 도서를 빌미로 사람을 바로 옆에서 기다리게 만들 땐 언제고, 이제는 투명 인간 취급이라니.
“꿀밤 때린 게 그렇게 못마땅했나.”
루시가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참나, 진짜 때린 것도 아니고 고작 그림에다가 그랬을 뿐인데.
* * *
이유도 모르고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바람에 조금 우울했던 루시는 ‘문학의 밤’이 돌아오자 정신이 없어지기까지 했다. 준비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 다른 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1학년 때와는 다르게 그녀에겐 파트너도 있었고, 시 낭송회가 끝난 뒤 있을 무도회를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근사한 드레스가 필요했다. 게다가 장신구와 머리 모양까지.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그녀를 에스코트하기로 한 콜린은 ‘그깟 드레스쯤 아무렴 어때? 그냥 아무거나 입어.’ 같은 말을 해서 루시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아무리 남매와 다름없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편한 것을 떠나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듯한 그 태도에 루시는 골이 났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건, 그때마다 왜인지 필릭스 베르크가 문득 떠올랐다는 점이었다.
그는 며칠 전, 무려 도서관에서 3학년의 로제 밀라드라는, 무척 아리따운 여학생에게 공개적으로 파트너 신청을 했다.
평소 연애에는 관심이 없던 그가 로제 밀라드에게 거의 닦달하듯이 파트너 신청을 밀어붙였다는 이야기는 이미 온 아카데미에 소문이 난 지 오래였다.
물론 루시 역시 그 현장에 있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을 했다.
사실 그날 아침에, 루시는 기숙사에서 3학년 선배들이 떠드는 어떤 소문 하나를 들은 참이었다. 바로 로제 밀라드가 무려 ‘베르크 공자’에게 파트너 신청을 할 거란 소문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루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베르크 공자? 어느 베르크 공자?
……둘 중 어느 쪽 말인데?
그때부터 루시의 얼굴에선 초조한 기색이 사라지질 않았다.
도서관에 아드리안과 필릭스가 나타났을 때, 루시는 일찍이 도서관 업무를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떠날 생각을 못 했다.
로제 밀라드 선배가 파트너 신청을 하려는 사람이 필릭스 선배인 걸까?
그런데 필릭스 선배는 그런 행사에 관심이 없어 보이던데. 작년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아마 신청을 받는다 해도 거절하지 않을까?
아니, 로제 밀라드 선배는 멋지니까. ……어쩌면 이번엔 승낙할지도 몰라.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주머니 속의 초대장을 만지작거리는 루시의 얼굴은 어느새 울상이었다.
맞아. 로제 선배 정도는 되어야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거겠지. 다른 여학생이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
그때 도서관 문이 벌컥 열리더니 붉은 머리칼이 매혹적인 로제 밀라드가 나타났다.
왔다.
루시는 잔뜩 긴장한 채로 그녀가 베르크 쌍둥이에게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로제가 파트너를 신청한 사람은 바로 아드리안이었다.
휴!
루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 자신이 왜 안도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로제는 필릭스에게 관심도 없어 보였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차에 갑작스레 안도감이 찾아오자 온몸에 힘이 풀렸다. 루시는 책 수레에 몸을 지탱하며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가는 건 어때, 로제?”
루시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곧장 필릭스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가 들은 말은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 필릭스 베르크가 로제 밀라드에게 파트너 신청을 한 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안도감으로 가득 차 있던 루시의 마음속에서 실망감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마음 한구석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그가 로제에게 파트너 신청을 하던 목소리는 문학의 밤이 열리는 당일 저녁까지도 루시의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드레스를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선 루시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곧바로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들을 털어 냈다. 더는 그 선배 때문에 축 처져 있고 싶지 않았다.
지금 루시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준비한 드레스가 과연 남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을 만큼 구색을 갖추고 있는가?’였다.
오늘만큼은 루시도 책상이 아닌 거울 앞에 서서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녀는 영 어색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수수한 베이지색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무도회에 가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지금 입은 드레스가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아닌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어울리고 뭐고 할 것도 없어, 루시.”
그녀가 걱정하는 모습을 본 제미마가 자신의 드레스를 입으며 말했다.
“네 드레스는 무난 그 자체야. 너무 특징이 없어서 괴상한 부분도 있을 수가 없다고. 아니, 그나저나 난 허리에 살이 붙었나?”
몸에 딱 붙는, 관능적인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던 제미마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꽉 끼는 거야!”
그녀가 좁은 드레스를 끌어올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휴! 이걸 누구더러 입으라고 이렇게 작게 만들었담!”
리타가 얼른 다가가 제미마를 도와 드레스를 잡아당겼다.
한참을 거울 앞에서 꾸물거린 끝에, 세 사람은 준비를 끝냈다. 파티를 많이 다녀 본 제미마와 리타는 한껏 치장한 드레스 차림새가 익숙한 건지 연신 거울 앞에 서서 자신들의 모습에 심취해 있었다. 하지만 루시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기만 했다.
“루시, 설마 그 구두 신고 갈 건 아니지?”
리타가 루시의 까만 구두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평소 루시가 교복에 신고 다니는 신발이었다.
“어…….”
아니라고는 대답할 수 없었던 루시가 우물쭈물대자 제미마와 리타가 경악을 했다.
“세상에…… 구두랑 드레스가 완전히 따로 놀잖아!”
리타는 잠시 방 밖으로 사라지더니 곧 상자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자, 이거 빌려줄게. 제미마는 발이 커서 너한테 맞지도 않을 테니 내 걸 신고 가.”
그녀가 상자를 여니 루시가 입은 드레스와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 흰색 구두가 들어 있었다.
루시가 신고 있던 검정 구두를 벗고 리타가 가져온 구두를 신어 보았다. 살짝 크긴 했지만 걷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와, 고마워!”
리타의 구두로 제법 근사해진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며 루시가 말했다. 행사 준비로 정신이 없었던 요 며칠 동안의 피곤함이 깨끗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루시는 마지막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이제 나가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저 콜린과 재밌게 놀다가 오면 되는 거야.
게다가 직접 쓴 시도 발표한다고 했으니까 열심히 응원해 줘야지.
루시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