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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51화 (51/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51화

그는 한층 더 집요하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루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루시는 서둘러 두 선배에게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계단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뒤에서 아드리안에게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는 필릭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루시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아 쌍둥이가 보이지 않게 되자 루시는 멈춰 섰다. 벽에 기대선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한테 왜 아드리안인 척 한 걸까. 내 이름은 왜 물어본 걸까.

설마 양호실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나기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루시의 마음속은 커다란 꽃망울들이 톡톡 터지는 것처럼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일 수 있는데도, 이 순간 느껴지는 감정이 창피함이나 초조함이 아니라 설렘이라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 * *

루시는 2학년 도서부장이 되고 나서부터, 3학년 도서부장인 아드리안과 상의할 일이 부쩍 많아졌다.

문제는 그녀가 아드리안을 찾아갈 때마다 종종 필릭스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마다 루시는 잔뜩 긴장한 채 그들에게 다가갔다.

예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녀가 아드리안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필릭스가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는 원래 루시가 주변에 있을 때에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도서부 신입 명부를 전해 주었던 날 후부터 그는 루시가 아드리안을 찾아올 때마다 묘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하는 것이었다.

좀처럼 다른 곳으로 옮겨 가지 않는 필릭스의 시선에 루시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렸다. 그러다가 아드리안과 대화가 끝나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갑자기 무슨 이유로 그렇게 쳐다보는지 알 수 없으니 루시는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의 알 수 없는 행동은 한 학기가 마무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필릭스는 또 한 번의 의문스러운 행동으로 루시는 물론, 모든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여름 방학이 지나고 아카데미로 돌아온 그가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타났던 것이다.

갑자기 왜?

원래도 똑같이 생긴 외모에 머리 길이까지 같아졌으니, 사람들은 더더욱 베르크 쌍둥이를 혼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루시는 괜히 필릭스를 아드리안으로 착각해 말을 거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각별히 신경 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노력을 한순간에 헛수고로 만드는 일이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무리넨의 역사> 아직 반납 안 됐어?”

한 여학생이 짜증스런 얼굴로 반납대 앞에 서서 물었다. 그녀는 루시와 같은 2학년으로 벌써 세 번째 그 책을 찾아 도서관을 들른 참이었다.

“음…… 그러게. 어제가 반납 기한이었는데.”

아르켈이 무리넨 왕국의 역사에 대한 과제를 낸 후, 그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모두 탄식을 흘렸다. 무리넨 왕국은 전해지는 역사 기록이 잘 없을뿐더러 다른 자료를 찾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나마 자료가 잘 정리된 <무리넨의 역사>라는 책을 구하기 위해 아카데미 도서관은 물론, 타운 내의 책방까지 뒤지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그 책을 구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아온 학생들은 모두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일주일이나 먼저 빌려 간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루시가 그 책을 빌려 간 사람을 찾기 위해 대출 카드를 뒤적거렸다. 곧 한 장의 카드를 집어 든 루시가 대출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필릭스 베르크.

놀랍게도 그 책을 빌려 가 놓고 반납하지 않은 사람은 필릭스였다.

“그럼 대체 언제 그 책을 받아 갈 수 있는 건데?”

필릭스의 이름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데, 앞에서 또 한 번 짜증스런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벌써 세 번이나 허탕을 친 여학생은 단단히 화가 난 듯 보였다.

“난 그 책을 대출하기로 예약까지 했단 말이야. 그게 꼭 필요하다고!”

루시는 그 여학생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그 여학생뿐만 아니라 아르켈의 수업을 듣는 2학년생 몇 명이 더 찾아와 루시를 채근해 대자, 루시는 차라리 그곳에서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도대체 왜 반납을 제때 안 하는 거지?”

옆에서 리타가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직접 가서 책을 받아 와야 할 것 같아. 안 그랬다간 내일도 미첼 반스의 짜증을 들어줘야 할지도 몰라.”

그러더니 그녀가 루시에게 눈짓했다.

“응?”

루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타가 한 번 더 눈치를 주었다.

“나보고 가라고?”

루시가 뒤로 주춤 물러서며 물었다. 그러자 리타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난 곧바로 수업 가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루시가 무어라 핑계를 댈까 우물쭈물하는 사이 리타는 벌써 가방을 챙겨 나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럼 부탁해.”

리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서관을 떠나 버렸다.

“잠깐, 리타……!”

루시가 불렀지만 그녀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제가 갈까요?”

그때 루시의 등 뒤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1학년 신입 노엘 로먼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붙임성 좋은 미소를 띤 채 밝은 기운을 내뿜으며 서 있었다.

“이런 심부름은 원래 신입이 해야죠. 제가 갈게요.”

노엘의 말에 루시는 속으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래?”

“네.”

노엘은 곧 대출 카드에 적힌 ‘필릭스 베르크’라는 이름을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와, 필릭스 베르크 선배님이라니! 꼭 한 번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요!”

그가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아드리안 선배도 엄청 멋진데, 필릭스 선배도 그럴 것 같아요! 분명 똑똑하고 친절하고 상냥하시겠죠?”

기대의 찬 노엘의 말에 루시는 그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네가 기대하는 그런 모습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노엘이 반납 도서를 받으러 가지 않겠다고 말을 바꿀까 봐서였다.

“그래, 그럼 다녀와.”

“잠깐, 노엘!”

도서관을 나서려는 노엘을 제미마가 불러 세웠다. 그녀는 딱 봐도 무게가 상당히 나가 보이는 책을 들고 끙끙대며 서 있었다.

“넌 여기 책들을 정리하기로 했잖아!”

“아, 그건 내가 할게!”

루시가 얼른 제미마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제미마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요란하게 내저었다.

“안 돼, 안 돼! 이거 백과사전이라고! 너 같은 약골은 들지도 못할걸?”

그러더니 그녀가 노엘을 향해 닦달했다.

“빨리 와, 노엘!”

“……죄송해요, 루시 선배. 제가 보기에도 선배는 저 사전들 못 들 것 같아요.”

그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말하더니 제미마에게 터덜터덜 걸어갔다.

결국 필릭스에게 연체 도서를 받으러 가야 하는 사람은 루시가 되고 말았다. 그녀는 절망스런 얼굴로 제미마와 노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도서관을 나섰다.

* * *

정말 이상했다.

원래부터 그가 좀 이상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필릭스가 앉아 있는 벤치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은 루시가 곁눈질로 그를 살짝 훔쳐보았다. 그는 정말 뻔뻔한 얼굴로 책을 펼치고 있었다.

자신이 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리라더니, 정말로 루시를 옆에 앉혀 놓고 책을 읽을 셈인 것 같았다.

얼마나 뻔뻔하면 나더러 기다리라고 할 수 있지? 반납 기한을 이틀이나 어기고 예약 도서를 연체시킨 건 본인이면서.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해야 하는 거 아냐?

차마 입 밖으론 꺼내지 못할 불만들을 속으로 툴툴대면서 루시는 그가 어서 책을 돌려주기를 기다렸다.

애꿎은 마음에 괜히 구두로 땅을 쿡쿡 찍고, 근처의 이파리도 툭툭 건드렸다. 그러다 또 옆을 흘긋 확인하니 필릭스는 정말로 느긋하게 독서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건 루시뿐인 것 같았다. 도대체 필릭스가 자신에게 왜 이러는 것인지에 대한 추측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무래도 리모시움 약과 양호실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낸 게 틀림없어. 그래서 날 골탕 먹이려는 거야!

그렇다면 왜 아무 말 안 하는 거지?

아니면 내가 다른 실수를 한 게 있나?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나한테 관심이 있…… 을 리가 없는데?

여러 가지 짐작들이 떠올랐지만 하나같이 확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더욱 알쏭달쏭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3학년 남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벤치에 앉아 있는 필릭스를 발견하곤 곧장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두 명도 아닌 남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걸어오자 루시가 불편한 눈빛으로 필릭스를 살폈다. 그는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한 상태였다.

필릭스의 친구들이 점령해 버린 벤치는 굉장히 정신이 없었다. 더불어 책을 읽던 필릭스도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남학생 하나가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엉겨 붙자 그가 짜증을 내며 밀쳐 냈다.

남학생들의 거친 움직임을 피해 몸을 움츠리고 있던 루시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 자리에 더는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연체 도서는 그냥 아드리안 선배에게 받아다 달라고 하는 게 낫겠어.

그녀가 계획을 바꾸며 벤치를 떠났다.

하지만 다음 날, 루시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조금 더 기다려서라도 책을 받아 왔어야 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도서관을 열자마자 <무리넨의 역사>를 찾는 학생들이 연이어 들이닥쳤던 것이다.

“참나, 쟤넨 왜 우리한테 짜증을 내는지 모르겠어!”

제미마가 아니꼬운 얼굴로 도서관을 떠나는 2학년들을 째려보며 말했다.

“우리가 일부러 반납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하는 수 없이 루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꼭 받아 와야겠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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