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50화
날밤을 새다 코피 흘리기를 여러 번. 부족한 잠에 길을 걷다가 비틀거리기도 여러 번.
그 고통을 겪은 후에, 비로소 루시는 목표했던 양의 공부를 모두 해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1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서 1등을 차지했다. 다음 학기의 장학금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선 것이다.
그 덕으로, 입학식 날 차석 남학생에게 신입생 선서를 빼앗기는 바람에 수석임에도 존재감이 미미했던 루시는 동급생들 사이에서 조금 유명해졌다.
몇몇 이름도 모르는 귀족 출신 여학생들에게서 주말마다 열리는 티 파티에 초대를 받기도 했다. 어색한 자리가 싫었던 루시는 끝내 거절해 버렸지만.
중간고사에서 1등을 한 것을 시작으로 루시는 계속해서 높은 등수를 유지했고, 그 결과 여름 방학이 다가오기 전 기말고사에서도 1등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전 과목에서 최고 등급을 받은 성적표를 가족들에게 보여 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리하여 처음 맞이하는 여름 방학 기간 동안, 루시는 두 가지 일을 하며 평화롭게 보냈다. 첫 번째는 할머니가 온 마을에 손녀의 성적표를 자랑하고 다니는 것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수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마르암 덩굴 알레르기 약을 만드는 것이었다.
방학 직전까지도, 루시는 필릭스를 야무지게 피해 다녔다. 이제 양호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벽에다 머리를 박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지는 증세는 사라졌다. 그래도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만 루시는 리모시움 물약 사건이 공작가의 귀에 들어가 큰 사건으로 번질 뻔한 것을 필릭스가 애써 무마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루시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아무리 별일 없이 끝난 사건이라곤 해도, 평민인 그녀가 공작가 후계자의 사물함에 수상한 물약을 넣었다는 게 밝혀지기라도 했다면, 감히 아카데미에 남아 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루시는 필릭스를 위해 알레르기 약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제대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아카데미로 돌아온 루시는 아드리안에게 알레르기 약을 주었다. 딱히 필릭스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쌍둥이를 챙기는 그라면 필릭스와 나누어 먹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음에도 루시는 여전히 필릭스를 피해 다녔다. 양호실에서 있었던 일이 벌써 몇 달 전의 일인데도, 그를 볼 때마다 쿵쾅거리는 심장이나 붉어지는 얼굴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괜히 그의 주변에 있다가 바보 같은 행동을 해 비웃음을 사는 것보다는 아예 그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필릭스를 피해 다니는 동안 남은 1학년도 마저 지나가 버렸다.
* * *
계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봄이 찾아왔다. 겨울 방학을 보내고 아카데미로 돌아온 루시는 정신없이 바쁜 새 학년을 맞이했다. 뜻하지 않게 루시가 도서부 2학년 부장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미마는 부장 자리가 신경 쓸 게 너무 많을 것 같아 하고 싶지 않다며 일찍이 못 박아 둔 상태였다. 리타 역시 자신이 없다며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부장 자리는 루시에게로 돌아왔다.
아카데미로 돌아오자마자 루시는 도서부 홍보지를 만들었다. 온 교정을 돌아다니며 보이는 게시판마다 홍보지를 붙이고 다니느라 루시는 진이 다 빠졌다. 게다가 쉴 틈도 없이 신입 부원 면접도 진행해야 했다.
아드리안의 인기 덕분인지 도서부에 들어오려는 1학년 지원자들이 넘쳐났다. 벌떼처럼 달려드는 신입생들로부터 신청서를 받느라 루시는 복도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원자가 많다고 해서 신입 부원들을 수월히 충원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일 년 동안의 도서부 활동을 통해, 도서관 업무가 얼마나 힘든 육체적 노동인지 깨달아 버린 루시는 일찍부터 걱정이 되었다.
일 년 전, 아드리안이 면접 합격자들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내며 붙잡고 싶어 하던 그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탈퇴하고 싶은 사람?”
면접에 합격한 열 명 남짓의 1학년들을 향해 루시가 물었다. 그녀 뒤에는 그날 막 도착한 신착 도서들이 어마어마한 높이를 뽐내며 쌓여 있었다. 그 위용에 벌써부터 하얗게 질려 버린 합격자 중 절반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예상했던 결과에 루시는 덤덤히 고개만 끄덕였다. ‘도서관 사서 도우미’라는 고상한 활동을 기대하고 지원한 이 귀족 신입생들이 육체 노동까지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루시가 나가도 좋다는 손짓을 해 보이자, 탈퇴하고 싶다며 손을 들었던 합격자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오직 다섯 명뿐이었다.
“오, 그래도 우리 때보다는 많이 남았네.”
제미마가 루시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제미마는 흐뭇한 눈길로 어색하게 서 있는 1학년 여학생 네 명과 남학생 한 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 노엘이라는 남자애, 꽤 귀여운 것 같아.”
그중 갈색 곱슬머리에 곱상한 얼굴을 가진 남학생을 몰래 눈짓하며 제미마가 슬쩍 말했다.
“흠흠.”
루시는 그녀에게 자중하라는 뜻으로 헛기침을 한 뒤, 신입 부원들을 향해 말했다.
“도서부가 된 걸 환영해. 처음이라 모르는 것이 더 많겠지만, 선배들이 잘 가르쳐 줄 거야. 앞으로 제노미움 도서관을 위해 너희가 큰 힘이 되어 줄 거라 믿어.”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힘’ 쓸 일이 많을 거야.”
제미마가 눈치 없이 경고하듯 덧붙인 말에 신입 부원들의 얼굴이 또 한 번 하얗게 질렸다. ‘그냥 아까 나갈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감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루시는 다섯 명의 신입들이 말을 바꾸어 나간다고 하기 전에 냉큼 신입 명단에 서명을 하도록 했다. 마지막 신입까지 서명이 끝나자 루시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제미마에게 말했다.
“나 대신 책 정리하는 법을 알려 줘. 아드리안 선배에게 명단을 전해 주고 올게.”
그녀의 말에 제미마는 격려하듯 신입들의 등을 두드리며 신착 도서가 쌓여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루시는 제미마가 노엘에게만 과도하게 붙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한 후, 명단을 챙겨 도서관을 나섰다.
* * *
아드리안을 찾아다니던 루시가 어느 교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베르크 쌍둥이가 친구들과 함께 모여 서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바라보는 루시의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그동안 머리카락 길이로 쉽게 구분할 수 있었던 두 베르크 공자가 똑같이 모자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둘 모두 머리칼을 모자 속으로 감춘 상태였기 때문에 누가 아드리안이고 필릭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다음에 다시 올까.
루시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여전히 루시는 필릭스를 피해 다니고 있었다. 필릭스는 양호실에서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루시는 달랐다. 그때의 일이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던 커다란 손의 감촉과 이마에 와 닿던 그 온기까지.
그 순간을 떠올릴 때면 루시는 저절로 몸이 뻣뻣해졌다. 필릭스의 앞이라면 더더욱 바보 같은 행동을 하게 될지도 몰라 나서기가 꺼려졌다.
그러나 오늘까지 꼭 명단을 넘겨 달라 부탁했던 아드리안의 말이 생각나 루시는 하는 수 없이 두 베르크 공자의 등 뒤로 천천히 다가갔다.
“저기…….”
그녀가 조심스레 부르자 둘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두 쌍의 푸른 눈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졌다.
필릭스와 아드리안은 가까이서 보니 더 똑같아 보였다. 차라리 도플갱어라고 하는 게 더 믿을 만할 것 같았다.
루시는 깊은 갈등에 빠졌다. 둘 중 어느 쪽이 아드리안일까 고민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때였다.
“아, 고마워.”
왼쪽에 서 있던 베르크 공자가 친절한 미소를 머금은 채 명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루시가 자신 앞에 내밀어진 커다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 이쪽이 아드리안 선배인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선뜻 그에게 명단을 건네지 못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루시가 고개를 들어 다시 베르크 공자의 푸른 눈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평소의 아드리안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있는데 눈빛이 어딘가 묘하게 달랐다. 루시를 바라볼 때의 그 반듯하고 신뢰 가득한 아드리안의 눈빛이 전혀 아니었다.
루시는 명부를 건네야 한다는 것도 잊고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베르크 공자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호수처럼 푸른 눈.
그 아름다운 두 눈동자 속에서 넘실대고 있는 것은 아끼는 후배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아니라…… 바로 호기심이었다.
루시는 전에도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필릭스가 자신의 초록색 눈을 들여다보며 에메랄드를 닮았다고 말했을 때였다.
짓궂은 호기심과 순수한 장난기가 뒤섞인 은근한 눈빛.
아드리안은 한 번도 루시를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 서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이 남학생은 아드리안이 아니라 필릭스인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루시는 긴장으로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양호실에서 필릭스가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던 순간 이후로, 그를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저…… 이건 아드리안 선배님께 드릴 도서부 신입 명부인데요.”
루시는 곧장 다른 베르크 공자에게 종이를 건넸다. 어서 이것을 전해 주고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필릭스, 장난치지 마.”
명부를 받은 아드리안이 유치한 장난을 친 자신의 쌍둥이 형을 나무랐다.
필릭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놀란 것 같기도 한 그의 얼굴에는 아드리안인 척 꾸며 내던 상냥한 미소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