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49화
“필릭스 선배?”
루시가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눈만 떴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분명 양호실에 올 때는 멀쩡히 걸어서 왔다고 했는데, 지금 이렇게 정신이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증상이 뒤늦게 찾아온 것 같았다. 리모시움 물약과 섞인 탓에 나타난 증상일지도 몰랐다.
필릭스는 무언가 불편한 듯이 몸을 꿈틀거리다가 갑자기 가슴팍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앗!”
루시가 황급히 그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왜 이래요!”
그녀의 머릿속에 조금 전 체스터가 해 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의 학창 시절, 고름 나무 수액 냄새를 맡은 한 학생이 환각에 빠져 교실 한가운데서 옷을 벗었다던…….
그런 건 절대로 눈앞에서 보고 싶지 않았다. 루시는 필사적으로 그가 셔츠 단추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말렸다.
루시에게 붙들리고도 계속 꼼지락거리던 필릭스의 손에서 어느 순간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다행히 그는 다시 얌전해졌다.
깜짝 놀랐네.
루시가 그의 손을 놓아주며 한숨을 쉬었다.
필릭스는 여전히 초점이 없는 눈으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체스터의 말에 따르면 환각은 일시적인 것이라 했지만, 루시는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그녀가 손바닥을 펴서 필릭스의 눈앞에 휘휘 내저어 보았다.
“선배, 제 손이 보이세요?”
“…….”
“필릭스 선배.”
탁!
얌전히 누워 있는가 싶던 필릭스가 순식간에 손을 뻗어 루시의 손목을 붙잡았다. 루시가 자리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튀어 올랐다.
필릭스의 눈동자가 천천히 루시에게로 옮겨 왔다. 초점이 없던 눈빛은 사라지고, 어느새 그의 푸른 눈이 생기로 반짝였다. 마치 루시의 얼굴을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비비.”
“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의미 모를 중얼거림이었다.
“비비.”
갑자기 그가 루시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목소리마저 낮게 깔며 말했다.
“안 돼.”
“그게 무슨…….”
루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필릭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정신이 없어 보였지만 정확히 루시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비비, 안 돼.”
그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는 소용없는 질문을 던지려던 찰나, 필릭스가 다른 쪽 손을 번쩍 들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루시의 머리를 턱, 짚었다. 그러더니 루시의 머리칼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마구 헝클어뜨렸다.
“악!”
루시가 비명을 질렀다. 단정하게 묶고 있던 그녀의 머리가 필릭스에 의해 엉망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필릭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레일리는 대체 뭘 하는 거지? 털이 이렇게나 자랄 때까지 방치해 두다니…….”
이번에는 필릭스가 기르는 개에게 하듯 루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시는 당황스러운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필릭스는 그녀를 자신이 키우는 개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필릭스 선배, 정신 차려요!”
루시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말이 소용 있을 리가 없었다.
일시적인 거라고 했으니 금방 제정신으로 돌아오겠지?
루시가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는 와중에도 필릭스는 그녀의 머리를 잡고 놓지 않았다.
“선배, 저 비비 아니에요! 놔주세요!”
“빗질도 제대로 안 해 줬나 보군. 털이 엉망이야.”
필릭스는 그녀의 말을 싹 무시하며 멋대로 중얼거렸다.
“비비, 손.”
갈수록 가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환각 속의 비비에게 줄곧 “손!”을 외쳐 댔다. 그의 한쪽 손에 머리가 붙들려 있던 루시는 결국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이 상황이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개와 놀아 주는 환각이라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걸까.
높은 곳에 올라가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자신에게 한쪽 손바닥을 내민 채 아직도 “손!”을 외치고 있는 필릭스를 루시는 웃음을 참기 어려운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평소의 무뚝뚝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병상에 반쯤 드러누워 보이지도 않는 개에게 앞발을 달라고 닦달하는 필릭스 베르크의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비, 손!”
“네, 여기요.”
루시는 체념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그의 손바닥 위에 척 올려놓았다. 그러자 필릭스의 얼굴 위로 뿌듯함과 즐거움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곧 그가 씨익 웃더니 루시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잘했어, 비비! 말을 잘 들었으니 상을 줘야지.”
그가 루시의 머리를 자신에게로 가까이 끌어당긴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쪽.
루시의 이마에 뭔가 말캉하고 간질간질한 것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뭐야.
루시가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뭐야?
툭.
필릭스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던 루시의 손이 바닥으로 맥없이 떨어졌다.
방금…… 내 이마에 뭐가 닿았던 거야?
얼이 빠져 있던 것도 잠시, 서서히 정신이 돌아온 루시가 엄청난 힘으로 필릭스를 밀쳐 냈다.
연신 ‘비비’를 중얼거리며 히죽거리던 필릭스가 침대 위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루시의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갰다.
“으으……, 비비…….”
필릭스가 널브러진 채로 신음을 흘렸다.
루시가 그런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커튼 밖으로 뛰쳐나왔다.
“뭐, 뭐야, 도대체!”
루시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방금 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고, 얼굴은 막 화덕에서 꺼낸 오리구이처럼 뜨거웠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약재료를 품에 안은 체스터가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안 갔네.”
양호실에 멀뚱히 서 있는 루시를 본 그가 말했다. 이내 루시의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갛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걱정스런 낯빛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정말 두통만 있는 거 맞아? 온 얼굴이 빨간데.”
“괘, 괜찮아요!”
자신에게 다가오는 체스터를 지나쳐 루시는 양호실 밖으로 후다닥 튀어 나갔다. 체스터의 의아한 눈길이 뒤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쓸 정신도 없었다.
복도에서 루시는 창턱을 짚고 섰다.
방금 일은 단지 사고야.
그냥 부딪힌 것뿐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부딪힌 것뿐인데 왜 이렇게 심장이 쿵쾅거리는 거지?
게다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좀처럼 가라앉을 생각을 안 했다. 루시의 모든 감각과 감정들이 방금 있었던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별거 아니야.”
그녀가 이마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복도를 떠나는 그녀의 얼굴에선 여전히 당황스러움이 떠나질 못하고 있었다.
* * *
“요즘 무슨 일 있어?”
며칠 후, 기숙사에서 나와 아카데미로 가는 길에 제미마가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루시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 옆에서 걷고 있었다.
양호실에서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솔직히 말할 수 없었던 루시는 그저 고개만 도리도리 내저었다.
“세상에, 열이 엄청 나네.”
루시의 빨간 얼굴을 보고 이마를 짚어 본 제미마가 말했다.
“시험이 코앞이라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오늘만이라도 잠깐 쉬는 게 어…….”
루시는 자신을 걱정하는 제미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가장 가까운 건물로 잽싸게 뛰어갔다.
“루시!”
뒤에서 제미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건물 안에 숨은 루시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방금까지 자신이 서 있던 곳으로 필릭스가 걸어오고 있었다.
휴, 하마터면 마주칠 뻔했네.
루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름 나무 수액 냄새를 맡고 잠시 정신이 나갔었던 필릭스는, 다음날 멀쩡한 모습으로 아카데미에 나타났다. 그는 양호실에서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면서도, 루시는 어쩐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복도에서 루시를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니, 사실 여전히 그는 루시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루시는 그를 볼 때마다 괜히 민망해져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기 바빴다.
뜻하지 않게 필릭스를 환각 상태로 빠트린 건 루시의 잘못이 맞았다. 그러나 그 뒤에 벌어진 일은…….
급작스럽게 입술을 가져다 대던 필릭스의 모습이 또 한 번 떠올라, 루시는 벽에 이마를 쿵 찧었다. 그 생각만 하면 온몸의 열이 얼굴로 몰려드는 것 같았다.
“루시, 너 정말 쉬는 게 좋겠어. 이러다 쓰러질 것 같아.”
루시를 쫓아 건물로 따라 들어온 제미마가 무언가 오해한 듯 말했다.
“벌써 며칠째 밤을 샌 거야?”
제미마의 말대로 루시는 요 며칠 동안 잠을 포기한 채 시험공부를 했다. 이건 그 양호실에서 있었던 일과도 관련이 있었다.
필릭스의 과제를 위해 리모시움 물약을 만드느라, 그리고 양호실에서 나온 뒤에는 혼이 빠져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많은 분량의 시험 범위가 밀려 있던 상태였다.
수석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빠와의 주말 약속까지 포기했던 그녀의 의지가 허무하고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잠을 줄여서라도 밀린 분량을 해내야 했다. 그래야 다음 학기에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렇게 공부에만 미친 듯이 몰두한다면 자꾸만 머릿속에 불쑥불쑥 나타나 자신을 괴롭히는 그 선배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