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48화
“내가 미쳤지, 미쳤어.”
루시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분명 루시는 필릭스를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며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그런 뒤 그녀가 곧장 향한 곳은 바로 기숙사였다.
방으로 올라간 그녀는 바구니와 채집 도구를 들고 화단으로 나왔다. 그다음, 망설임 없이 땅 위로 조그맣게 얼굴을 내민 민들레를 채취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마치 머리와 몸이 다른 자아를 가진 것처럼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웅크리고 앉아 민들레를 뜯는 루시를 몇몇 학생이 이상하다는 눈길로 쳐다보며 지나갔다. 얼굴이 붉어진 루시가 서둘러 채집을 마무리한 후 화단을 벗어났다.
약초학 교실에서 구하기 쉬운 나머지 재료까지 챙긴 그녀는 아카데미 삼 층으로 향했다. 그 복도 끝에는 옛 약초학 교실로 쓰이던 오래된 교실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창고처럼 쓰이는 빈 교실이었다.
책상과 의자가 마구잡이로 쌓인 교실에서 루시는 나무 찬장을 열었다. 그 안에 재료를 넣고 끓일 수 있는 검은색 냄비 하나와 작은 화로를 꺼냈다. 약초학 교실로 쓰이던 시절, 학생들이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책상 위에 재료를 가지런히 꺼내 진열하며 루시가 중얼거렸다. 시험공부를 했다면 벌써 책의 절반을 들여다봤을지도 모를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미 벌여 놓은 일이었다. 루시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냄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물이 끓자 차례대로 재료를 집어넣었다.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리모시움 물약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완성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엄지 크기만 한 크리스털 약병에 물약을 담았다. 그리고 ‘리모시움’이라고 쓴 작은 이름표도 붙였다.
그런 뒤 그것을 챙겨 3학년들의 사물함이 있는 이 층 복도로 갔다.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루시가 필릭스의 사물함을 찾아 편지 투입구 안으로 작은 약병을 조심스레 넣었다.
짤랑.
약병이 사물함 바닥으로 무사히 착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으로 그녀의 임무는 끝이 났다. 물론 필릭스가 그 약을 과제로 제출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약을 의심해 쓰레기통에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루시가 약을 만드느라 들인 시간도 헛수고가 될 것이다.
하지만 황급히 사물함 앞을 떠나는 루시에게 후회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동안 필릭스에게 본의 아니게 도움받은 게 많았던 터라, 한 번쯤은 그녀도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 그 선배가 계속 생각난 건, 고마운 일이 많아서야.
이제 더는 필릭스를 생각하지도, 그의 일에 참견하지도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녀는 삼 층의 빈 교실로 올라갔다. 물약을 만드느라 어질러 놓은 책상 위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테이블 위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는 옅은 보라빛의 연기였다. 정확히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냄비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옅은 보라빛 연기…….
화들짝 놀란 루시가 황급히 옷소매를 당겨 코와 입을 막았다. 계속해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냄비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자 냄비 벽에 보라색의 진득한 액체가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철그럭!
몸을 낮춘 루시가 재빨리 냄비 뚜껑을 닫았다. 하지만 이미 피어오른 보라빛 연기들이 교실 천장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루시는 얼른 창문을 열어 연기를 밖으로 내보냈다.
냄비 속 액체의 정체는 고름 나무 수액이 분명했다. 보라빛을 띠는 식물의 수액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름 나무 수액은 음용하거나 냄새를 맡게 되면 일시적인 환각 증상을 일으키는 물질이었다. 특히 가열하게 되면 특유의 보라색 연기를 피우며 사방으로 번지는 탓에 보호 장비를 착용한 뒤 취급해야만 했다.
애석하게도 빈 교실에서 찾은 냄비는 꼼꼼히 세척하지 않았는지 이전에 사용했던 고름 나무 수액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냄비 속에서 굳어 검게 변한 탓에 루시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앗!”
그 순간 루시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필릭스의 사물함에 넣어 둔 리모시움 약이었다.
굳어 있던 수액이 녹기 시작한 건 약을 만들기 시작하고 꽤 시간이 지난 후라 소량만 스며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문제였다. 리모시움 약에 고름 나무 수액이 섞이면 어떤 약이 되는지 루시는 알지 못했다.
서둘러 빈 교실을 나선 그녀가 복도를 내달렸다. 필릭스가 사물함에서 그 약을 발견하기 전에 먼저 그것을 회수해야만 했다.
이 층으로 내려온 루시가 자리에 멈춰 섰다. 저 멀리 사물함 근처에서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설마…….
루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천천히 다가가자 무리 사이에서 빈 크리스털 약병을 들고 있는 남학생이 보였다. 아드리안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 손으로는 턱을 매만지며 약병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필릭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드리안 선배…….”
루시가 부르는 소리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 루시.”
그가 곧 미안한 표정으로 먼저 말했다.
“미안한데, 지금 일이 생겨서. 도서부 일이라면 나중에 얘기할래?”
“아니, 그게…….”
루시의 눈이 아드리안이 들고 있는 약병으로 향했다.
“그거…….”
“아, 이거.”
아드리안이 빈 약병을 들어 보였다. 밑 부분이 깨진 약병은 텅 비어 있었다.
“누가 필릭스의 사물함에다 깨진 약병을 넣어 놨는데, 리모시움이라고 이름표가 붙어 있지만 아닌가 봐. 필릭스가 사물함 냄새를 맡아 보더니 무슨 고름 냄새가 난다 하더라고.”
“냄새…… 를 맡았어요?”
루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선배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요?”
“머리가 어지럽다더니 양호실에 갔어.”
“쓰러졌나요?”
루시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멀쩡히 걸어서 갔는데.”
“괜히 수업 듣기 싫어서 머리 아프다고 핑계 댄 거 아냐?”
“그래, 걷는 게 너무 멀쩡했다고.”
옆에 있던 남학생들이 한마디씩 했다.
“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진찰을 받아 보는 게 좋겠지.”
아드리안이 다시 약병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루시는 뒷걸음질 치며 자기들끼리 떠들어 대기 시작한 남학생 무리 속에서 빠져나왔다.
바보, 루시!
이 일을 대체 어떻게 수습할 거야?
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루시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발걸음을 돌린 그녀가 서둘러 양호실로 향했다.
* * *
양호실 앞에 도착한 루시가 슬그머니 문을 밀었다. 빼꼼 안을 들여다보니 책상 앞에 양호 선생인 체스터가 앉아 있었다.
루시가 양호실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돌아보았다.
“1학년?”
“저…… 네.”
“어디가 아픈데?”
“어…… 머리요.”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그리곤 눈을 굴리며 필릭스를 찾았다.
“오늘 머리 아프단 사람이 많네. 일단 저기 누워 있어.”
그가 커튼이 열린 침대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바로 옆에 커튼으로 가려진 침대 하나가 더 있었다.
“너도 고름 나무 수액 냄새를 맡았니?”
“네?”
체스터의 말에 루시가 고개를 홱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반응에 체스터가 의아한 표정이 되더니, 커튼이 쳐진 침대를 턱짓했다.
“방금 연보라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시큼한 냄새를 맡고 머리가 아프다며 온 학생이 하나 더 있거든. 아무래도 고름 나무 수액인 것 같은데.”
“아, 아뇨. 전 그냥 평범한 두통이에요.”
“그래?”
체스터는 서랍에서 두통약을 꺼내더니 루시에게 건넸다.
“먹고 두통이 나으면 교실로 돌아가.”
“네…… 그런데 선생님, 고름 나무 수액 냄새는 얼마나 위험한가요?”
“얼마나 위험하냐고?”
루시의 갑작스런 물음에 체스터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 그냥 일시적인 환각에 빠질 뿐이야.”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체스터가 곧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바꾸었다.
“아니다, 꽤 위험하지……. 맞아, 죽고 싶을 만큼 큰 고통이 찾아올 수 있기도 해.”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학창 시절 때, 친구 놈 하나가 고름 나무 수액 냄새를 맡고 교실에서 발가벗은 적이 있었어. 환각으로 자기 집 욕탕인 줄 알았거나, 뭐, 그랬겠지. 정신을 차리고 나서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들었을 땐,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걸?”
체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약 제조대로 향했다. 그가 찬장에서 여러 가지 약병과 찻잎들을 꺼내 진열했다.
“그 수액 자체는 인체에 위험한 것이 아니지만, 재수가 없으면 죽을 수 있기도 해. 길인 줄 알고 걸어갔는데 낭떠러지여서 실족사한다던가……. 뭐, 그런 경우도 있으니까.”
환각에 빠진 필릭스가 아카데미 건물 위에서 떨어지는 광경이 절로 상상이 되어 루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심각한 사고를 친 것 같았다.
괜히 나섰어, 괜히!
필릭스의 과제를 대신해 주려다가 하마터면 그를 골로 보내 버릴 뻔했다. 필릭스가 양호실로 제대로 찾아온 게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고 자신도 모르는 위험한 곳으로 향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루시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체스터는 이것저것 약 재료를 만져 보다가 찾는 것이 없는 듯 잠시 양호실을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루시가 슬그머니 침대에서 내려왔다. 커튼 너머 바로 옆 침대에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필릭스 선배님.”
루시가 가만히 그를 불러 보았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망설이다가 새하얀 커튼을 열어젖혔다. 필릭스는 침대에 잠이 든 듯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루시가 침대 근처로 다가가 앉았다.
“선배님…….”
조금 전보다 더욱 큰 목소리로 불러 보았지만, 필릭스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잠든 건가…….”
마음이 불안해져서 루시는 그의 코 밑에 손가락도 대 보고, 숨을 쉬는지도 확인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필릭스의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선배님.”
루시가 울먹이며 말했다.
“제 잘못이에요. 냄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서…… 애초에 아무 냄비나 함부로 쓰는 게 아니었는데…….”
“으음…….”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쥐어뜯던 루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필릭스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