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47화
세 명의 사람이 붙어 줍자 빠르게 모든 동전을 찾을 수 있었다.
필릭스의 친구들이 루시에게 다가왔다. 루시가 얼떨결에 주머니를 내밀자, 그들이 그 안에다 동전을 떨어뜨렸다.
짤그락, 짤그락.
경쾌한 소리와 함께 주머니가 채워졌다.
“감사합니다.”
루시가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했다.
“야, 필릭스. 뭐 해.”
친구 하나가 뒤에서 멀뚱히 서 있는 필릭스를 향해 말했다.
필릭스는 자기 손바닥 위의 동전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 위에서 동전들이 반짝 빛났다.
그러나 루시의 눈은 금빛 머리칼 속에 감춰진 그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어…….
지금 그의 표정을, 루시는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바로 호숫가에서 무릎을 감싸고 웅크리고 있던 어느 소년에게서.
도대체 왜…….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야, 필릭스!”
친구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필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은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루시에게 다가왔다.
그가 자신이 주운 동전들을 천천히 주머니 안으로 떨어뜨렸다.
짤그락.
경쾌한 소리와 함께 모든 동전들이 무사히 루시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가자.”
필릭스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루시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도 전에 필릭스는 몸을 돌려 아카데미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루시는 손안의 묵직한 동전의 감촉을 느끼며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그의 쓸쓸한 표정이 지워지질 않았다.
* * *
다시 시작된 일주일.
봄 햇살이 하얀 실크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와 교실 안을 비추었다. 따뜻한 날씨와 나른한 아르켈의 말소리를 이겨 내지 못하고, 학생들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그 속에서도 꿋꿋이 바른 자세로 앉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을 루시가 어쩐 일인지 흐리멍덩한 눈으로 앞 사람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녀가 쥔 펜이 노트 위에 의미 없는 동그라미들을 그려 나갔다.
머릿속에서는 어떤 얼굴이 계속해서 둥둥 떠오르고 있었다.
긴 금빛 머리칼을 가진 사람.
호수같이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사람.
그리고 여전히 슬프고 쓸쓸한 표정을 짓는 사람…….
“루시 키넌!”
조용한 교실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루시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르켈 선생이 교탁 앞에서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너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일어나서 90페이지를 읽어 보라고 두 번이나 말했다!”
아르켈의 호통에 루시는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허둥지둥 아르켈이 말한 페이지로 책을 넘겼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진도는 벌써 열 페이지나 넘게 나가 있었다.
진짜 미쳤구나, 루시 키넌!
루시가 속으로 스스로를 나무랐다.
없는 정신까지 끌어모아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넋을 빼놓고 있다니!
흠흠, 목을 가다듬은 루시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르켈은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다행히 더는 혼을 내지 않았다.
책을 다 읽은 루시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신 차려.
그녀가 자신의 팔을 세게 꼬집었다. 너무 세게 꼬집은 나머지 눈물까지 찔끔 나올 것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수업에 집중해!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칠판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로 딴생각 안 할 거야.
그녀는 머릿속에 쉼 없이 떠오르던 얼굴을 억지로 몰아냈다. 굳게 마음을 먹은 듯 두 주먹을 꽉 쥐는 루시의 얼굴이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도서관에서도 그녀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루시는 쉼 없이 반납 도서를 정리한 뒤, 이제는 걸레까지 들고 와 정신없이 빈 테이블 위를 닦았다. 그것도 모자라 애꿎은 화분 위치까지 이리저리 옮기기에 이르렀다.
일부러 바쁘게 움직여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생각을 떨쳐 내 버리겠단 시도였다.
“루시, 오늘따라 기운이 넘치네?”
아드리안이 그 모습을 보더니 말했다.
루시는 무언가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잠시 후, 그녀가 조심스럽게 아드리안에게 다가갔다.
“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우물쭈물대는 루시를 아드리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침내 루시가 마음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요즘 별일 없죠?”
……그러니까 선배네 집에요.
그녀의 물음에 아드리안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별일? 없는데. 그건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싱거운 루시의 대답에 아드리안이 픽 웃었다. 그가 돌아서려는 찰나, 루시가 또 한 번 질문을 던졌다.
“혹시 아픈 데 있어요?”
……그러니까 선배네 가족 중에요.
아드리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픈 데? 글쎄. 없는데.”
아드리안이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루시에게 다가왔다.
“오늘 좀 이상한데, 루시. 왜 자꾸 그런 걸 물어?”
하지만 루시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떠났다.
* * *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계속 필릭스가 떠오르자, 이제 루시는 스스로의 자제력까지 의심하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집중을 못 하는 사람이었던가?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시험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험 준비에, 도서부 일까지 동시에 해 나가려면 더욱더 시간을 잘 분배해서 쓸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아빠와 엄마, 할머니를 생각했다. 그리고 코너 남작과 남작 부인의 얼굴도 떠올렸다.
그건 일종의 양심 요법이었다.
그녀를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도록 응원하고 후원해 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림으로써,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던 자신에게 양심의 가책을 지우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면 자신이 천하에 둘도 없는 쓰레기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눈치 없이 머릿속에 불쑥불쑥 나타나던 필릭스의 모습도 잠시나마 잠잠해졌다.
“역시 효과가 있어.”
루시는 더 나아가 양말을 몇 번이나 기워 신던 할머니, 한겨울에도 벽난로 하나에만 불을 때던 코너 남작의 모습 등을 떠올렸다. 역시 놀라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잡생각들이 사라졌다.
루시는 이제 집중하여 시험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복도에서 필릭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루시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필릭스를 발견하는 건 언제나 그랬듯이 어렵지 않았다. 제일 아름다운 금발을 찾기만 하면 되니까.
그는 약초학 교실 앞에 서서 어제도 함께 있던 그 친구들과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의 얼굴에 짜증과 귀찮음이 가득해 보였다.
“에스트리드 선생님이 리모시움 물약 제출 기한을 연장해 주시겠대. 그러니까 내일 오후까지…….”
“그럴 필요 없는데. 난 그 과제에서 0점을 받아도 상관없어.”
“야, 필릭스! 그 선생님 고집을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 아마 네가 새로 과제를 제출할 때까지 들들 볶아 댈걸?”
필릭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애초에 내 약병을 깨트린 건 너잖아, 알렉!”
“그래서 내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다시 제출할 기회를 얻어 왔잖냐.”
“됐어. 귀찮게 두 번이나 만들 생각은 없어. 그냥 0점 받고 말지, 뭐.”
그들은 약초학 수업의 과제 중 하나인 ‘리모시움’ 물약 만들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필릭스가 과제로 제출한 리모시움 물약을 그의 친구가 실수로 깨 버린 모양이었다. 어서 다시 만들어 제출하라는 친구들과 자신은 점수를 받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필릭스가 한참 동안이나 실랑이를 벌였다.
저 바보!
루시가 필릭스를 향해 속으로 외쳤다.
그 약이 얼마나 만들기 쉬운 약인데!
약방을 운영하는 할머니 밑에서 자란 루시는 눈을 감고도 만들 수 있는 약이었다.
그녀는 안타까운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제노미움 아카데미의 선생이 기한까지 연장해 주며 과제를 다시 받아 주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루시였다면 너그러이 자신의 사정을 봐준 에스트리드에게 큰절이라도 올렸을 것이다.
정말 금방 만들 수 있는 약인데.
그녀의 머릿속에 약을 만드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필요한 재료가 잡다하게 많긴 하지만 비교적 구하기 쉬운 편이었고, 다른 약들과는 다르게 만드는 시간도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점수를 거저 주겠다는 에스트리드 선생의 넓은 마음이 엿보이는 과제였다.
가만 보자.
루시의 눈이 창밖을 향했다. 넓은 화단에 노란 민들레들이 고개를 내밀고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민들레는 리모시움 물약에 들어가는 재료 중 하나였다.
민들레와 함께 다른 재료를 떠올리던 루시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창문에 그녀의 경악한 얼굴이 비쳤다.
미쳤어? 시험공부 안 할 거야? 네가 그걸 만들 생각은 왜 해?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루시가 꾸짖었다.
필릭스 베르크한테서 이만 신경 꺼!
이제 루시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기까지 했다. 필릭스를 위해 물약을 만들어 주기까지 한다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이 바보가 될 것 같았다.
마음을 굳게 먹은 루시가 창가에서 떨어진 뒤 곧장 몸을 돌렸다. 그리곤 성큼성큼 걸으며 복도를 떠났다.
귓가에서 필릭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이제 다시는 그에 대한 생각이나 걱정을 하지 않으리라, 또 한 번 다짐했다.
* * *
“난 바보야.”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화단에서 민들레를 잡아 뜯던 루시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바구니 안에는 이미 여러 화단에서 뽑아 모은 민들레가 한 움큼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