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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46화 (46/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46화

루시는 아카데미의 학생들과 있을 때면 여전히 자신이 지방에서 온 시골 소녀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아빠와 있으니 마치 수도 토박이가 된 것처럼 여유로움이 생겼다.

그녀가 처음 베델에 와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도시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던 것처럼, 아빠도 휘황찬란한 베델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루시는 아빠에게 무언가를 알리고 보여 주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신이 나서 베델의 명소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광장, 시장, 황궁, 등등.

아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처럼 감탄하는 모습을 보니 루시는 기분이 뿌듯하고 좋았다.

게다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할 때의 긴장감을 내려놓고 가족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안했다. 입에서는 자연스러운 웃음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그래서였을까.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은 다른 때보다 빨리 흐르는 것 같았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금세 헤어질 순간에 다다랐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루시는 슬프고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아빠와 손을 잡고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짧게요?”

이 주 후에 브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빠의 말을 듣고 루시가 낙심한 얼굴로 말했다. 마음 같아선 가지 말라고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마을의 유일한 의사가 한 달 가까이나 자리를 비우는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불편일지 알고 있기에 루시는 그 마음을 꾹 참았다.

아빠가 머무르는 이 주 동안에 한 번 더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당장 이 주 후에 중간고사가 시작되었으므로, 루시는 아빠를 만나기 위해 또 한 번 주말 일정을 비우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수석 자리를 지켜야 하니까. 장학금을 받아야 하니까.

루시는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을 숨기며 아빠에게 사정을 말했다.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는 루시의 말에 아빠 역시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해 주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렴.”

아빠는 다정한 어투로 루시를 달랬다.

“여름 방학 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여름 방학.

그때가 아득할 정도로 멀게만 느껴졌다.

손을 꼭 붙잡고 걸어가던 부녀의 걸음은 어느새 마차 앞에 도착했다. 아빠는 한사코 개인 마차를 타고 가라고 했지만 루시는 거절했다. 어차피 개인 마차는 모두 사람을 태우고 나간 뒤여서 한 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차피 걸리는 시간은 비슷하던데요, 뭐.”

루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여러 사람이 탈 수 있는 합승 마차로 걸어갔다.

그 마차는 벽이 없었으며, 지붕 대신 천막을 씌워 겨우 비만 막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마차였다. 사실 마차라기보단 커다란 수레에 더 가까웠다.

“자, 아카데미 앞까지 가는 마차입니다! 5분 후에 출발합니다!”

마차 옆에 서 있던 나이 든 마부가 소리쳤다.

아빠는 루시에게 손을 내밀어 마차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루시가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마차에 올랐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마차 한구석에 먼저 앉아 있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은 놀랍게도 필릭스였다. 식당에서 보았던 그의 친구들도 함께 있었다.

루시는 깜짝 놀란 마음을 겨우 숨기며 입구와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바로 대각선 맞은편에 그가 앉아 있었다.

이런 마차도 타나?

개인 마차가 한 대도 남아 있지 않기는 했지만, 공작가의 자제가 이런 북적북적하고 낡은 마차를 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필릭스와 그의 친구들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마주 보고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루시.”

자리를 잡고 앉은 루시의 등 뒤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가 돌아보자 그가 마차 옆에 서 있었다.

“아빠도 늦었으니 이만 가 보세요.”

“그래. 그리고 이거.”

아빠가 품속에서 작은 헝겊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공중에서 흔들리는 주머니가 짤그락 소리를 냈다. 루시가 꾸러미를 받아들자 손안이 꽤 묵직했다.

“이게 뭐예요?”

“얼마 안 되지만…… 필요한 게 있으면 이걸로 사.”

“됐어요. 이거 혹시 아빠 여행 경비는 아니죠?”

루시가 다시 주머니를 돌려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아빠는 고개를 내저으며 받지 않았다.

“예상보다 비상금을 쓸 일이 많지 않을 것 같아 일부를 너에게 주는 거야. 걱정 말고 받아도 돼.”

한사코 서로 돈을 받지 않으려는 두 사람 사이에서 주머니가 여러 번 왔다 갔다 했다. 결국 루시는 아빠를 이기지 못하고 주머니를 챙겨 품속에 넣었다.

“고마워요, 아빠.”

아빠가 두 팔을 벌려 루시를 꼭 안아 주었다.

“사랑한다, 우리 딸.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렴.”

“저도 사랑해요, 아빠.”

루시 역시 아빠와 힘차게 마지막 포옹을 했다.

이윽고 출발하겠다는 마부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섭섭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를 놓아주었다.

“무슨 일 있으면 곧바로 편지해야 한다.”

아빠의 마지막 당부의 말이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바퀴 소리를 헤치고 들려왔다. 루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곧 말들이 가벼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주 손을 흔드는 아빠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 갔다.

마침내 아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루시는 손 흔드는 것을 멈추고 바로 앉았다.

아.

무심코 앞으로 시선을 돌리던 루시는 자신을 보고 있던 필릭스와 눈이 마주쳤다. 덜컹거리는 마차 위에서 붉은 석양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 함께 일렁거렸다.

루시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침을 삼켰다.

그러나 더 놀랄 새도 없이, 필릭스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 후 눈이 더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루시는 놀라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는 거지?

눈 한 번 마주쳤다고 이런 반응을 보이는 자신이 우스웠다.

필릭스는 이제 그녀에게서 몸을 돌리고 노을 지는 하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에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눈이 마주친 것도 우연이지.

쿵쿵대던 심장이 차차 진정되었다.

루시도 그에게서 몸을 돌리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마차는 덜그럭거리며 잘도 나아갔다.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동안, 해는 점점 내려앉아 사방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희붐한 달빛 아래 마차는 정문 앞에 멈추어 섰다.

학생들이 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났다. 그중 문가에 가까이 앉아 있던 루시가 제일 먼저 내리게 되었다.

조심스럽게 땅을 딛고 내려서려 했지만, 루시는 그만 치마 밑단을 밟고 휘청거리고 말았다.

“아!”

아주 다행스럽게도, 볼품없이 땅바닥에 철퍼덕 넘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까스로 땅을 밟고 중심을 잡은 루시가 똑바로 일어나 섰다.

짤그락.

그러나 품에 넣어 두었던 주머니 하나가 빠져나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빠에게서 받은 동전 꾸러미였다.

낡은 헝겊 속에서 동전들이 쏟아져 흙바닥 위를 데굴데굴 굴러갔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동전들을 보고 얼굴이 새하얘진 루시가 얼른 바닥에 엎드렸다. 그녀가 팔을 이리저리 뻗어 흩어진 동전들을 줍기 시작했다.

뒤에서 내리던 어느 여학생과 남학생 한 쌍이 그 모습을 흘긋 보더니 동전들을 피해 지나갔다.

허겁지겁 동전을 줍는 손 위로 발 몇 개가 더 스쳐 갔다. 루시는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바보, 루시.

그녀가 속으로 말했다.

하필 여기서 휘청거릴 건 뭐야.

뒤에서 내릴 사람이 또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1실버짜리 동전을 이렇게 꾸러미로 들고 다니는 사람은 이 아카데미에 나밖에 없을 거야.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계속 동전을 주워 담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빨리 지나가 버리길 기다리던 사람의 발은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뒤 루시는 누군가 그녀의 뒤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동전을 줍다 말고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필릭스와 그의 친구 두 명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루시가 얼른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은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루시는 필릭스가 어서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발을 뗄 생각을 안 했다.

뭐야, 나 동전 줍는 걸 구경하겠다는 건가?

루시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찡그린 채 생각했다. 온몸에 수치스러움이 몰려왔다.

차라리 이 순간이 꿈이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손안에 잡힌 동전의 감각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때, 석양빛을 받아 발그레하고 커다란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그 손은 루시가 미처 보지 못하고 놓친 동전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필릭스였다. 그가 갑자기 땅 위로 엎드려 마차 밑을 살피더니 긴 팔을 넣어 동전 여러 개를 꺼냈다.

“저기도 있네.”

곁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필릭스의 친구 중 하나가 그의 발치에 있던 동전 하나를 가리켰다.

“야, 필릭스. 이 아래에도.”

다른 친구도 마차 바퀴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너네도 주워.”

필릭스가 언짢은 얼굴을 들며 불평스럽게 말했다.

“그냥 네가 엎드린 김에 다 주우면 되잖아.”

그러나 매섭게 노려보는 필릭스의 눈빛에 둘이 슬그머니 앉더니 동전을 줍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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