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45화
그 말을 들은 루시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피었다.
입학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브롬에서 수도로 올라온 지는 무려 두 달째였다.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아빠가 이번 주말 수도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수도의 새로운 수술법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보통 루시의 아빠는 의술을 배우기 위해 먼 지역까지 방문하는 일이 없었지만, 이번엔 딸을 보기 위해서 긴 여행길을 선택한 듯싶었다.
할머니와 엄마가 함께 오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루시는 아빠를 만날 생각에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만이 기다려졌다.
* * *
그토록 기다리던 주말.
아침 일찍부터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끝마친 루시는 서둘러 마차를 타는 곳으로 향했다. 여러 대의 마차가 학생 손님들을 기다리며 아카데미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루시는 그중 개인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승합 마차와 달리 개인 마차는 운임이 비쌌다. 혼자 탈 수 있었고, 출발 시간이 정해진 승합 마차와는 달리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는 아빠를 만나는 중요한 날이니만큼 개인 마차를 빌려 타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타운 중심가에 도착한 루시는 곧장 아빠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를 향해 뛰어갔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 거리가 혼잡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루시는 한눈에 아빠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빠!”
루시의 작은 목소리는 거리의 소음에 금방 묻혀 버렸다. 하지만 루시가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아빠를 알아보았듯이, 그도 금세 루시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루시!”
북적북적한 사람들을 헤치며 루시가 곧장 아빠에게 달려갔다. 아빠를 꽉 껴안은 루시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브롬의 냄새였다. 엄마와 할머니의 냄새이기도 했다.
이 얼마나 그리워했던 품인가.
루시는 그 순간이 꿈만 같았다. 그동안 지독한 향수병으로 텅 비어 있었던 마음속이 금세 행복과 안도감으로 꽉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루시, 왜 이렇게 야위었니?”
아빠가 루시의 얼굴을 감싸 쥐고 물었다. 그녀의 마른 팔뚝과 어깨가 안쓰러운 듯 아빠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그러나 루시는 아빠와 다시 만난 그 순간이 그저 행복할 뿐이었다.
곧 부녀는 팔짱을 끼고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오붓한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하는 루시의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아빠, 아카데미 건물이 진짜 멋있어요! 오늘 아빠한테 구경시켜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참, 저 도서부에 들어갔어요! 거기 부장 선배가…….”
분명 아빠를 만나면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들려주리라, 결심했던 루시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아빠 앞에서 마음이 너무 들뜬 나머지, 하고 싶은 말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아빠는 그녀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저 흐뭇한 듯 미소만 지어 보였다.
한 조용한 식당에 도착한 그들은 창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사 중에 아빠는 가방에서 잡다한 꾸러미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루시는 꾸러미를 포장한 보자기를 풀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우선 동그란 상자에 포장된 것은 분명 할머니가 만든 쿠키일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상자를 열자마자 시나몬 가루를 넣어 할머니가 직접 만든 쿠키가 나왔다.
“어머니가 어찌나 이것저것 싸 주려고 하시던지…….”
아빠는 쿠키를 보고 좋아하는 루시를 보며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분명 베델까지 오는 길에 상할 거라고 말씀드려도 계속 챙겨 주려 하시더구나. 결국 이 쿠키만 가져가는 것으로 타협을 봤단다.”
할머니가 보자기에 고기파이며, 칠면조 요리며 이것저것 싸는 모습이 상상되어 루시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른 꾸러미에는 루시의 엄마가 직접 뜬 카디건이 들어 있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에 입기 딱 좋은 두께였다. 그리고 단정하게 접힌 카디건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은 새 레이스 리본이었다.
루시는 리본을 집어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머릿속에 문득 누군가 떠오른 탓이었다.
“어디 아프니?”
아빠가 루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얼굴이 빨갛구나. 감기 걸린 건 아니지?”
“아니에요.”
루시가 얼른 리본을 카디건 위에 올려놓고 보자기로 다시 감쌌다.
“쌀쌀해서 그런가.”
루시는 일부러 양팔을 문지르며 추운 척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엔 봄 햇살이 식당 안까지 들어와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빠는 그녀가 둘러대는 말에도 별 의심 없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건강 조심하거라. 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유독 자주 감기에 걸렸잖니.”
루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정말로 날씨가 급격하게 바뀔 때마다 한 번씩 앓고는 했다.
할머니가 끓여 준 라벤더 차 한 잔이면 금방 나았는데.
루시는 속으로 생각했다.
감기에 걸렸을 때마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할머니가 가만히 다가와 거칠거칠한 손으로 이마의 열을 재어 주곤 했었다. 그리고 루시의 손에는 따뜻한 차가 담긴 잔이 쥐여졌다.
지금 루시는 할머니의 차 대신 앞에 있는 물잔을 가만히 쥐고 있었다. 물 위에 비치는 그녀의 표정이 쓸쓸했다. 할머니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아카데미에서 힘든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기운 없는 얼굴로 앉아 있는 루시에게 아빠가 물었다.
“아니요, 재밌어요!”
아빠의 물음에 루시가 금세 환한 표정으로 바꾸며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아빠는 조금 안심한 듯 말을 이었다.
“사실 아까부터 네가 아카데미 이야기를 할 때마다 행복해 보여서 마음이 놓였단다.”
그러더니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네가 입학시험 치는 걸 반대해서 너무 미안하다, 루시. 네가 이렇게 제노미움에 오고 싶어 했는지 몰랐어. 그리고 이렇게 잘 해낼 줄도 말이야.”
아빠의 말에 루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말 마세요, 아빠. 솔직히 우리 집 형편에 제노미움이 무리인 건 사실이었잖아요. 아빠는 그저 현실을 더 생각한 의견을 낸 것뿐이에요.”
“그래도 아빠로서 널 믿어 주지 못한 것 같아서 참 미안해.”
아빠가 루시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이젠 네가 뭘 하든 응원한단다. 물론 엄마도 마찬가지야.”
아빠의 말에 루시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사실 섭섭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믿는다는 아빠의 말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서운함은 모조리 녹아 사라져 버렸다.
딸랑.
루시와 아빠가 여전히 손을 꼭 잡고 있는 사이, 식당 문이 열렸다. 이어 세 명의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루시는 저절로 그들에게 시선이 향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중 긴 금발을 가진 청년에게로 눈이 향했다.
그는 간편한 사복 차림의 필릭스였다. 함께 있는 두 명은 아카데미에서 그와 자주 같이 다니는 남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빈자리를 찾아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루시의 테이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루시는 황급히 눈을 돌리며 그쪽을 보지 않은 척했다.
“졸업하면 수도에서 의사가 되는 건 어떻겠니?”
아빠가 질문을 던졌다. 멍하니 접시를 내려다보던 루시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잠깐 딴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는 한 박자 늦은 뒤에 아빠의 질문을 알아들은 듯 입을 열었다.
“아…… 의사요? 하지만 제가 계속 수도에 있겠다고 하면 할머니가 섭섭해하지 않을까요?”
“글쎄, 그런 마음도 없지는 않으시겠지. 하지만 할머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절대 반대하지 않으실 게다. 그리고 할머니는 네가 이왕 수도에 간 김에 더 많은 일들을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
“정말요?”
루시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음, 그런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래. 넌 아직 어리니까. 미래를 벌써부터 결정할 필요는 없다. 제노미움에 다니면서 이것저것 많이 경험해 보고 네가 뭘 하고 싶은지 천천히 알아보렴……. 그런데, 아는 애니?”
아빠가 별안간 고개를 돌려 근처의 테이블 하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조금 전부터 루시의 눈이 자꾸만 다른 곳을 흘끔댄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뇨! 모르는 애들이에요.”
루시가 서둘러 부인했다. 하지만 아빠는 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학생들을 하나하나 관찰하듯 살펴보았다. 곧 그의 시선이 한 명의 남학생에게서 멈췄다.
“잘생겼구나.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을 것 같은데.”
아빠는 필릭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근데 대장간의 한스는 어떡하고?”
“그런 거 아녜요! 한스 오빠랑도 아무 사이 아니고요!”
루시가 테이블 위로 주먹을 콩콩 내려치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루시를 보며 아빠는 그저 귀엽다는 듯이 웃을 뿐이었다.
“다 드셨죠?”
루시는 서둘러 짐을 챙겨 일어나려 했다.
“이만 나가요, 베델 구경을 시켜 드릴게요.”
루시를 놀리듯 아빠는 일부러 느릿느릿 짐을 챙겨 들었다. 그런 아빠에게 새침하게 눈을 흘긴 뒤 루시는 먼저 테이블을 떠났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루시는 저도 모르게 필릭스가 있는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는 누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른 채, 친구들과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동석한 친구 중 한 명이 무언가 싱거운 농담을 던진 듯 그가 팔짱을 낀 채 피식 웃었다.
좋아 보이네.
루시는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복도에서도, 교정에서도 잘 보이지 않아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막상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이어 그녀가 필릭스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아빠와 식당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