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44화
그녀는 리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필릭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는 한 손에 턱을 괸 채, 비스듬한 자세로 칠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책을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루시는 그 무료해 보이는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 모든 일을 따분하게 여기는 것 같은 사람.
그런데 곤란한 이가 있으면 제일 먼저 눈치채고 도와주는 사람.
정말이지 거만한 건지 친절한 건지 알 수 없는 애였다. 7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루시는 손에 쥐고 있던 리본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런 뒤 필릭스가 정리해 준 배열에 맞춰 책을 책장에 꽂기 시작했다.
모든 정리를 마치고 루시가 슬며시 교실을 떠날 때까지,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건 필릭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별 이유 없이 도와준 거겠지.
교실 문을 닫기 전, 루시는 필릭스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의 심드렁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짐작이 사실인 것 같아 루시는 왠지 모르게 섭섭한 기분을 느끼며 문을 닫았다.
* * *
따뜻한 햇살이 지면 위로 쏟아졌다. 촉촉하고 향긋한 땅 위로 새 생명들이 움텄다. 봄바람은 교정 구석구석을 핥으며 지나갔다. 아카데미에 비로소 봄이 찾아온 것 같았다.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루시는 신입생 티를 한 겹 벗고 제법 행동이 여유로워졌다.
넓은 교정과 복잡한 아카데미 건물 안에서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누가 갑자기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도 없었다. 낯설고 어색한 타인들이 가득한 교실 안에서 이유 없이 움츠러드는 일 또한 줄어들었다.
물론 새롭게 마주한 환경 속에서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향수병이 찾아왔다.
꽤 오랫동안 가슴속이 텅 빈 듯 허전하고 공허한 느낌이 계속되었다. 밤마다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드는 날도 많았다.
눈을 뜨면 금방이라도 할머니의 얼굴이 보일 것 같았다.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냐는 엄마의 잔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른 새벽 눈을 뜰 때마다 보이는 건, 여전히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고급 가구들로 가득 채워진 기숙사 방이었다.
‘어쩌면 영영 이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루시는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석 자리를 반드시 지켜 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순간부터였다.
그녀가 아카데미로부터 받은 장학금은 오직 첫 학기 동안의 수업료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수석 자리를 지켜 내지 못한다면 다음 학기의 장학금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게 될 터였다.
게다가 감면된 수업료 외의 기숙사비나 생활비 문제도 있었다. 제국 명문 아카데미의 기숙사 비용은 일반 학교에 비하면 놀라울 만큼 높은 수준이었고, 지방에 비해 훨씬 비싼 수도의 생활비도 꽤나 부담스러웠다.
루시네 가족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이 모든 비용은 바로 코너 남작가에서 후원을 해 주고 있었다. 루시의 할머니가 ‘다 생각이 있다’고 했던 방법은 바로 남작의 후원을 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루시는 코너 남작가의 재산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변방 시골인 브롬은 영지민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수도의 귀족들과는 다르게, 코너 남작이 거두어들일 수 있는 세금 또한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콜린을 제노미움 아카데미에 보내는 것조차 큰 예산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루시의 기숙사 비용과 생활비까지 후원하는 것은 남작에게 부담스러운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루시는 자신을 위해서도, 또 자신을 기꺼이 믿어 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수석 자리를 끝까지 지켜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결코 남작님과 가족들에게 이 이상 경제적 문제를 보태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거의 책상 앞에서 살다시피 했다.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의 피곤한 얼굴을 본 콜린이 제발 적당히 하라며 걱정할 정도였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에 쏟다 보니 루시는 친구를 사귈 기회도 많지 않았다.
거기다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먼저 다가오는 학생들도 별로 없었고 말이다. 그녀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깊고 진지한 교우 관계를 나눌 사람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입학 후에도 루시는 대부분의 시간을 콜린과 보냈다. 콜린이 옆에 있으니 친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절박함도 생기지 않아서 더더욱 친구 사귀는 일에 열을 올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그녀에게 새로운 인연의 끈을 만들어 준 것은 도서부였다.
도서부에는 루시와 함께 신입 부원으로 들어온 제미마와 리타라는 두 여학생이 있었다. 둘은 루시를 볼 때마다 꼬박꼬박 인사를 해 주고 친근하게 말을 걸어 주는 유일한 학생들이었다.
제미마는 수도 출신의 귀족 영애로 발랄하고 쾌활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루시는 그녀의 넘치는 기운을 감당하기 힘들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긍정적이고 기운이 넘치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리타는 루시처럼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성격이었다. 게다가 수도 출신이 아닌 먼 북부 지방에서 왔기 때문에 루시와 통하는 점도 많았다. 루시가 향수병으로 우울해할 때 옆에서 제일 먼저 알아보고 토닥여 준 사람이 바로 리타였다.
셋은 도서부 활동을 하며 친해진 뒤, 가끔 함께 점심을 먹기도 하고 교정을 산책하기도 했다. 덕분에 콜린과 있을 때와는 느껴 보지 못했던, 여자들만의 감정 교류도 루시는 새롭게 느껴 볼 수 있었다.
사실 그들과 더욱 친해지도록 만들어 준 사람이 있었다. 그건 바로 도서부 2학년 선배인 앨런 그로스였다.
항상 얼굴에 짜증이 가득해 보이는 그는, 마치 새로 들어온 후배들을 쫓아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그만큼 하루도 빠짐없이 신입들을 갈구어 댔다.
일부러 옮길 필요가 없는 무거운 책들을 나르게 하는가 하면, 자신의 개인 심부름까지 시키기도 했다. 덕분에 루시와 제미마, 리타는 앨런이 없을 때마다 몰래 그의 욕을 하기 바빴다.
앨런은 도서부에 들어온 모든 여학생들은 분명 아드리안에게 다른 마음을 품었으리라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그는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신입 부원들이 아드리안에게 말이라도 걸라치면 매섭게 쏘아보았다. 베르크 가문의 호위병들도 그처럼 삼엄하게 아드리안을 지킬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입부 초의 얘기였다. 그 구박들에도 불구하고 루시와 제미마, 리타는 도서부에 꿋꿋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앨런의 편견과는 달리 그녀들은 성실하고 일도 잘했으며, 눈치도 빨랐다.
마침내 앨런은 그녀들을 계속 데리고 있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대놓고 하는 구박도, 치졸한 괴롭힘도 없어졌다.
그러나 신입들을 탐탁지 않은 눈길로 보는 것은 여전했다. 반납대가 깨끗함에도 불구하고 도서를 제때 정리하지 않는다며 혼내는 것은 물론, 깨끗하기만 한 도서관을 다시 청소하라고 트집을 잡는 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도서부 신입들에게 아드리안의 존재는 도리어 크나큰 위안이 되었다.
루시는 아드리안과 친해질수록 그에게 의외의 면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바르고 성실하고 빈틈이 없는 학생회장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인간적인 면도 많이 보였던 것이다.
그는 신입 부원들이 빠르게 일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가벼운 장난을 친다든지 농담을 건넨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전부 루시 아빠가 던지곤 하던 그런 썰렁한 수준의 농담인지라, 재미는 없었다.
하지만 그저 완벽한 도련님인 줄만 알았던 아드리안의 의외의 모습을 발견한 뒤, 오히려 루시는 그와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은 어쩐지 그의 쌍둥이 형, 필릭스를 생각나게 했다.
필릭스 베르크.
그에게서 리본을 돌려받은 이후로는 사실 그와 큰 접점이 없었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는 게 다였는데, 그때마다 필릭스는 루시를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나쳐 갔다. 루시는 그를 몰래 흘끔 보았지만, 필릭스는 그녀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필릭스는 사실 수업을 많이 듣는 것 같지도 않았고, 수업이 없을 땐 아카데미 건물 안에서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두문불출했다. 아드리안과 다르게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는다더니 정말인 것 같았다.
루시는 그가 어릴 적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싫어서 몰래 호숫가에 숨어 있던 것을 떠올렸다.
어쨌거나 그와 더 엮이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더 얘기할 기회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필릭스 베르크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날이 갈수록 루시의 일상에서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 * *
“쟨 왜 또 여기 있어?”
제미마가 물었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엔 콜린이 있었다. 콜린은 도서관 소파에 앉아 한가롭게 빈둥대는 중이었다. 정신없이 도서관 업무를 마무리 중이던 제미마의 눈에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쟤도 도서부에 들겠대?”
그녀가 재차 묻는 말에 루시는 고개를 저었다.
콜린은 지금처럼 루시를 보러 도서관에 와서 죽치고 앉아 있기 일쑤였다. 딱히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콜린은 명예 도서부 회원이나 마찬가지지.”
뒤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아드리안이 끼어들었다. 그는 콜린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살짝 정신을 없게 만들긴 하지만, 일손이 부족할 때 도서부 일을 도와주는 건 콜린밖에 없으니까.”
“그건 그래요.”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던 제미마도 금방 수긍하며 대답했다.
“힘들어서 아무도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없는데 먼저 나서 주고.”
“저번 신착 도서 정리 때는 저보다 더 많이 나른 것 같다니까요.”
제미마의 말을 받으며 어느새 끼어든 리타까지 콜린을 칭찬하고 나섰다.
“앞으로도 잘 구슬려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미마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무슨 얘기해?”
그때 소파에 누워 있던 콜린이 몸을 일으키곤 다가왔다. 모여 수군거리던 도서 부원들이 냉큼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무것도 아니야.”
루시가 둘러대는 모습을 수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콜린은 이내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번 주말이지? 키넌 아저씨가 오시는 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