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43화 (43/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43화

아드리안의 말에 가득했던 그 간절함과 애절함의 의미를, 루시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정말 이 책을 이번 주 안으로 모두 옮겨야 하나요?”

며칠 후, 도서관에 모여 아연실색한 얼굴로 서 있던 신입생들 중 하나가 벙한 얼굴로 물었다. 루시를 비롯한 신입 도서부원들 앞에는 두꺼운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응. 이번 주 안으로.”

아드리안이 대답했다.

“원래 학기 초엔 신착 도서가 많아서 할 일이 많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해야 하지. 그 점 기억해 둬.”

그렇게 말한 뒤, 아드리안은 팔짱을 끼며 신입 부원들을 죽 둘러보았다.

“자, 이쯤이면 나올 때가 되었는데.”

그의 중얼거림과 함께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아드리안이 지목하자, 그가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죄송한데 도서부 탈퇴하고 싶은데요.”

아드리안은 이미 예상한 일이라는 듯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입을 열어 나지막이 말했다.

“또 탈퇴하고 싶은 사람?”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으로 손이 올라왔다.

결국 처음 손을 들었던 학생과 함께 신입 도서 부원의 절반이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부를 나갔다. 남은 것은 루시와 단 두 명의 신입생뿐이었다.

“역시 내가 예상했던 사람들이 남았네.”

그 세 명을 둘러보며 아드리안이 말했다. 인원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씁쓸한 상황일 텐데도, 그는 침울해하기 보다는 남은 신입들을 바라보며 희망적이게 웃어 주었다.

“너흴 처음 봤을 때 난 그런 느낌이 들었어. 거친 풍파에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단 느낌. 근성이 있을 거란 느낌.”

지금 상황에서는 칭찬이라기보다 회유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루시를 비롯하여 탈퇴의 타이밍을 놓쳐 버린 세 명의 신입 부원은 제법 비장한 얼굴로 책 더미 앞에 가 섰다.

“좋아. 너희들과 함께라면 이 책을 이번 주 안에 다 옮길 수 있을 것 같단 느낌이 들어.”

“너희 같은 후배들이 신입으로 들어와서 참 다행이야. 난 정말 복 받았어.”

“하아……, 양심에 찔려서 안 되겠다. 마지막으로 기회 줄게. 탈퇴하고 싶은 사람.”

“그래, 난 너희를 믿었어.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아드리안의 응원을 들으며 신입 부원들은 책을 나르기 시작했다. 첫날부터 만만치 않은 노동에 루시는 연신 이마에 맺히는 땀을 훔쳤다.

“뭐야, 다 어디 갔어?”

문가에 또 다른 2학년 선배가 나타나 휑뎅그렁한 도서관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는 이전에 복도에서 루시의 입부 신청서를 들고 창피를 주었던 앨런이라는 남자 선배였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하여튼 얼굴만 보고 우르르 들어왔다가…….”

그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또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으려다 아드리안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큼큼거리며 괜히 헛기침을 하던 그는 남은 신입생들의 얼굴을 확인하다가 루시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그녀를 바라보는 앨런의 눈빛은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루시가 다른 속셈을 품고 부서에 들어온 것인 양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선배 조심해.”

옆에서 책을 쌓아 올리던 제미마가 루시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붉은 단발머리에 발랄하게 생긴 1학년으로 루시와 함께 들어온 신입 부원이었다.

“히스테리 부리는 게 일상이라 다들 기피한다더라. 잘못 걸리면 그날 하루 종일 고생이래.”

제미마의 충고에 루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앨런의 신경질적인 면은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어 그녀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루시는 최대한 앨런의 눈에 띄지 않는 동선으로 책을 날랐다.

하지만 앨런의 날카로운 눈은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처음부터 루시만을 쫓고 있었다.

“저 선배 계속 너만 쳐다보는데?”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제미마가 귀띔해 주었다.

아, 정말.

도대체 내가 뭘 했다고 저러는 거지.

루시는 바짝 몸을 사리며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 행동했지만, 앨런의 눈은 집요하게 그녀를 따라왔다.

설상가상으로 아드리안이 수업을 가기 위해 도서관을 잠깐 비우게 되자, 앨런은 그 틈을 타 1학년들에게 명령질을 해 댔다.

물론 제일 많이 부림을 당한 것은 루시였다.

신입 부원 셋 중 루시가 제일 작은 체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무거운 책들을 들도록 시켰으니 결코 그녀만의 착각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앨런은 꽤 묵직한 상자 하나를 발로 가리키며 루시에게 말했다.

“너, 베르타어 교실이 어딘지 알지?”

그가 거만하게 발을 까딱거리며 지시를 내렸다.

“이 책들 들고 가서 책장에 정리해 놓도록 해. 물론 문자 순서에 따라 정렬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네.”

도서부 선배의 이유 모를 텃세에 루시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순순히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루시가 낑낑대며 상자를 들어 올린 뒤 도서관을 나왔다.

책이 든 상자는 무거웠지만 앨런의 감시하는 눈이 없으니 속이 후련할 뿐이었다.

앨런이 말한 베르타어 교실은 1층에 있었다. 그나마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교실을 찾아 들어간 루시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는 2학년 선배들이 수업이 시작되길 기다리며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상자를 들고 앞문으로 나타나자 교실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한꺼번에 쳐다보았다.

아, 뒷문으로 들어올걸.

하지만 이미 늦었고, 루시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교실 뒤편에 자리한 책장을 향해 다가갔다.

빨리 정리하고 나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책상 사이를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익숙한 사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들 수업 준비를 끝내고 앉아 있는 와중에 맨 뒷자리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필릭스 베르크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책상 위에 늘어진 긴 금발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루시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학업에 그리 뜻이 있는 건 아닌가 보다.

금발 뒤통수에서 그만 눈을 떼고 책장 앞으로 간 그녀는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았다. 베르타어 선생이 수업을 위해 교실로 들어오기 전에 얼른 정리를 끝내고 나가야만 했다.

서둘러 상자를 연 루시는, 그러나, 안에 든 책을 보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제목이 모두 베르타어 문자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문자 순서에 따라 정렬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건방진 표정으로 말하던 앨런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루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상자 안을 내려다보았다.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는 필수로 배우는 언어라지만, 그녀는 베르타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어쩌지. 일단 그냥 꽂아 놓고 나중에 와서 정리할까?

누구한테 도와 달라고 해야 하지? 제미마는 베르타어를 할 줄 알까?

드르륵.

그때 앞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루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베르타어 수업을 위해 들어온 선생이란 것쯤은 눈치껏 알 수 있었다.

큰일 났다. 그냥 두고 나가야겠어.

루시는 얼른 상자의 뚜껑을 닫은 뒤,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선생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도서부 학생.”

루시를 발견한 선생이 반가운 기색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전에 내가 신청한 베르타 문학 전집인가요?”

“아…….”

당황한 루시가 책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책 표지 그 어디에도 루시가 읽을 수 있는 문자는 없었다.

“그게…….”

“뭐, 수업 시간이라도 괜찮으니 지금 정리해 주고 나가면 고맙겠어요. 아, 문자 순서대로 꽂는 거 잊지 말아요.”

루시의 사정을 모르는 베르타어 선생은 그녀에게 곤란한 지시를 내리고는 수업을 시작해 버렸다.

“어, 어떡해…….”

루시의 황망한 손이 책 위를 더듬거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책들이 저절로 배열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웃겠지?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못 하면…….

시간이 부족했어도 베르타 문자는 다 외우고 입학했어야 했는데…….

그녀는 아는 글자를 하나라도 발견해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어찌할 바 모를 상황에 눈물마저 나올 것 같았다.

턱.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커다란 손이 나타나더니 상자의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루시는 흠칫 놀라며 상자에서 떨어졌다.

손의 주인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채 상자를 자신의 옆으로 끌어 가져갔다.

곧 그가 수업 중인 베르타어 선생 몰래 상자 속의 책들을 배열하기 시작했다.

루시는 책장 앞에 조그맣게 쪼그리고 앉아 거침없이 움직이는 필릭스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상자 안에서 피아노를 치듯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가 순서대로 책을 정리하는 데는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책을 재배열한 필릭스는 다시 상자를 루시 앞으로 밀어 주었다.

“가, 감사합니…….”

루시의 작게 웅얼거리듯 하는 인사는 그의 귀에까지 가 닿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필릭스는 다시 칠판을 향해 몸을 돌렸다.

루시는 필릭스에게 커다란 고마움을 느끼며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해결된 일에 안도감은 한참 후에나 찾아왔다. 그녀가 천천히 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다행이다…….

한숨 돌린 루시가 상자 안의 책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책 위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돌돌 말린 채로 가만히 놓여 있는 그것은 이전에 도서관에서 필릭스에게 빌려 주었던 리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