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42화
그러나 그녀의 목 주변에 돋은 소름은 꼭 바람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드리안과 똑같이 생긴 사람의 등장에 루시는 굉장히 놀란 상태였다.
그 남학생은 더운 듯 셔츠 목 부분을 팔랑거리며 열을 식혔다.
“땀은 왜 또 그렇게 흘려?”
“걸어왔거든.”
“걸어와? 마차는?”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남학생 앞으로 갔다. 그의 갑작스런 등장에 루시의 존재는 잠시 잊혀진 것 같았다.
“레일리가 또 잔소리를 늘어놓으려기에 그냥 내려서 걸어왔어.”
“옷 상태는 또 왜 이래?”
“달리는 마차였거든.”
“……미치겠네. 그렇다고 거기서 뛰어내리면 어떡해.”
“레일리를 내리게 할 순 없잖아.”
남학생이 나름 억울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에게 말했다.
“내일모레 아흔인데. 그 노친네는 나 때문에 죽으면 정말로 구천을 떠돌면서 못살게 굴 것 같단 말이야.”
아드리안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남학생은 그런 표정을 못 본 척하며 뻔뻔하게 말했다.
“아드리안, 나 물 좀 줘.”
“네가 떠다 먹어.”
“시원한 물로 갖다 줘.”
아드리안이 구시렁대며 몸을 돌렸다.
“미안, 루시. 잠시만 기다려 줄래?”
그가 루시에게도 양해를 구한 뒤, 아까 전 차를 내왔던 곳으로 사라졌다.
아드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던 남학생은 자신의 바로 뒤편에 앉아 있는 루시에게도 잠시 눈길을 주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관심 없다는 듯 바로 얼굴을 돌렸다.
루시도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몸을 바로 세워 앉았다. 아니, 저절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했다.
그녀는 지금 몹시 혼란스러웠다.
등 뒤에서 남학생이 넥타이를 풀어헤치는 듯 부스럭거렸다. 이어 벗은 넥타이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는 그가 소파에 털썩 등을 기댔다. 짧은 진동이 루시의 등에까지 와 닿았다.
그 뒤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멍한 얼굴의 루시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쌍둥이. 똑같은 얼굴. 베르크 공자가…… 두 명.
그렇다면 7년 전 호숫가에서 본 그 소년이 아드리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래, 어쩐지 뭔가 느낌이 달랐어.
루시는 생각했다.
아드리안과 호숫가의 소년은 생김새가 닮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무언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느낌이 났다.
루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남학생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너무 놀라는 루시의 반응에 그는 조금 머쓱하게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
“미안.”
“…….”
루시는 들이쉰 숨을 다시 내뱉는 것도 잊은 채 그의 푸른 눈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교복 치마를 움켜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 남학생은 조금 이상한 사람을 보는 눈길로 루시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리본 있어?”
“네?”
질문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루시가 되물었다.
그러자 남학생은 소파 등받이에 걸쳐진 루시의 땋은 머리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그 끝에 달린 리본을 톡톡 건드렸다.
“이거, 하나 더 있냐고.”
“……아뇨.”
“그래.”
그는 자신의 뺨과 목을 간지럽히는 긴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다시 등을 돌렸다.
그의 금빛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던 루시도 번뜩 정신을 차리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뭐야, 깜짝 놀랐네.
등 뒤의 남학생은 어릴 적에 만난 그 소년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루시의 표정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맞나? 아닌가?
둘 중 어느 쪽이지?
남학생은 리본이 있냐는 질문을 끝으로 루시에게 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땀을 흘리며 목 뒤쪽에 붙은 축축한 머리칼을 떼어 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더워 보였다.
루시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머리를 묶고 있던 초록색 레이스 리본을 풀었다.
“저기요.”
그녀가 가만히 그 남학생을 불렀다. 그가 돌아보았다.
“여기.”
루시가 리본을 내밀자, 남학생이 리본과 루시의 얼굴, 그리고 루시의 풀린 머리를 차례로 쳐다보았다.
먼저 리본이 있냐고 물어볼 땐 언제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지 않은 채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뭐야, 왜 안 받아.
루시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그제야 남학생은 그녀의 손에서 리본을 집어 갔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었다.
곧장 몸을 돌린 그는 리본을 입에 물더니 손으로 머리를 빗질하며 머리칼을 한데 모았다. 햇살처럼 밝은 금발이 루시의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뼈마디가 툭 불거진 커다란 손이 레이스 리본을 쥔 채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 이질적인 광경은 어쩐지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루시는 그가 한데 모은 자신의 머리를 리본으로 매듭지어 묶는 광경을 눈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이내 능숙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묶은 그가 다시 루시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가 갑자기 자신을 쳐다볼 줄 몰랐던 루시는 벌리고 있던 입을 꾹 다물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무언가 관찰하듯 루시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사람의 눈을 빤히 쳐다보는 것은 실례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뭐, 뭐야.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눈을 들여다보는 그의 행동에 루시는 당황스런 나머지 시선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의 눈을 마주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에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그녀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나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한 걸까?
루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남학생의 눈썹이 자꾸만 꿈틀거렸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는 듯 고개를 자꾸만 갸웃거렸다.
휙.
그때 무언가 하얀 것이 날아와 남학생의 얼굴을 뒤덮었다. 루시의 눈앞에 있던 푸른 호수가 금세 사라져 버렸다.
루시는 흰 수건이 날아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드리안이 허리에 손을 짚은 채 루시와 남학생 앞에 서 있었다.
“왜 또 애를 괴롭혀.”
얼굴을 덮은 수건을 걷어 내는 남학생을 향해 아드리안이 말했다.
“내가 뭘.”
남학생은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아드리안이 던진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냈다.
“방금 루시를 노려봤잖아.”
아드리안이 그의 앞에 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생각났다! 너 <마녀의 눈물> 기억나?”
그런데 남학생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뭐?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루첸트의 그림 말이야. 이 층 복도 끝 방 맞은편에 걸려 있던.”
아드리안은 여전히 멀뚱한 얼굴로 그 남학생을 쳐다보았다.
“숲의 마녀가 커다란 에메랄드를 들고 있는…… 아니, 됐다.”
무언가 더 설명하려던 그가 말을 그만두며 아드리안이 준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런 뒤, 그가 소파에 내팽개쳐 두었던 코트와 넥타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
“네 잔소리 때문에 여기 못 있겠다.”
“기숙사 올라가면 당장 네 짐부터 정리해.”
“이것 봐. 또 잔소리.”
“정리 안 하면 다 내다 버릴 줄 알아.”
남학생은 아드리안의 잔소리를 피해 도망치듯 얼른 코트를 걸치더니 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필릭스!”
아드리안이 언짢은 얼굴로 소리쳤다.
필릭스라 불린 그 남학생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드리안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루시를 향해 서서 자신의 머리를 묶고 있는 리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고마워.”
필릭스가 말했다.
“뭐가?”
아드리안이 되물었지만,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순식간에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제멋대로인 그의 행동에 질려 버렸다는 듯 아드리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해, 루시.”
아드리안이 루시를 돌아보며 사과했다.
“쌍둥이 형인데 집에 일이 있어서 지금 아카데미에 도착했어. 너한테 무례하게 군 건 아니지?”
아드리안의 물음에 루시가 고개를 저었다.
“무례한 건 아니고, 그냥…….”
이상했어요, 여전히.
그녀가 속으로 말을 삼켰다.
* * *
그 후로 필릭스 베르크가 도서관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루시 역시 도서부 면접을 앞두고 있었으니 그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도서부 면접은 예상외로 금방 끝이 났다.
루시는 아드리안이 어떤 질문을 할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껏 읽어 왔던 무수한 책들의 내용을 떠올려 보려 애썼다.
고전 소설의 내용에 대해서 물어보는 건 아닐까?
철학서나 역사서에 대해 물어볼지도 몰라.
그런 생각과 함께 어려운 고전과 각종 철학, 역사서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는데 아드리안은 뜻밖의 요구를 했다.
“자, 루시. 일어나서 이 책들을 저쪽으로 옮겨 볼래?”
아드리안이 도서관 한구석에 높게 쌓여 있는 책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루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책을 한 아름 품에 들고 아드리안이 지시한 곳으로 갔다.
그녀가 무사히 책을 내려놓은 뒤 그를 돌아보자 아드리안이 냉큼 말했다.
“합격.”
“네?”
자신이 들은 말을 의심하듯 루시가 되물었다.
“이게 끝인가요?”
황당한 얼굴로 묻는 말에 아드리안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루시의 두 손을 꽉 붙들었다.
“응, 끝이야. 도서 부원이 된 것을 환영한다, 루시 키넌.”
그러고는 어쩐지 비장한 얼굴로 이렇게 덧붙였다.
“부디 오래오래 도서부에 있어 줘. 제발 탈퇴만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