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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41화 (41/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41화

루시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다시 만난 베르크 공자는 이제껏 루시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의 평판을 듣고 있었다.

그렇게 날로 커져 가는 의문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아드리안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레 커져 갔다.

원래 루시가 도서부에 들려고 했던 이유는 도서관 업무를 맡아 일하는 부원들에게 소정의 장학금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드리안이 도서 부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는 장학금보다 그를 가까이서 한번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큰 이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루시는 도서부에 들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도서부 입부 신청서를 항상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신청서를 낼 기회는 멀지 않게 찾아왔다.

다음날, 우연히 복도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나가는 아드리안 베르크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속하게 신청서를 가방에서 꺼내 든 것과는 달리, 루시의 발은 자리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그야말로 사람들의 파도에 휩쓸려 가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던지 루시는 감히 그에게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감을 잃은 채 벽 뒤로 가 숨었다.

아드리안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은 거의 신입생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여학생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설마 다들 신청서를 내려는 애들은 아니겠지?

신입생들이 하나같이 손에 종이를 들고 아드리안의 눈앞에 팔랑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루시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경쟁률과 맞닥뜨린 그녀가 발만 동동 굴렀다. 이러다가는 도서부 가입은커녕 신청서도 내 보지 못할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2학년으로 보이는 한 남학생이 나타났다.

그는 곧장 아드리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아드리안을 둘러싸고 있는 학생들을 쫓아내듯 버럭 소리를 질러 댔다.

놀란 신입생들이 부랴부랴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제야 아드리안은 인파 속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침내 혼자가 된 아드리안이 루시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루시는 들고 있던 신청서가 구겨질 만큼 꽉 쥐었다. 지금이 기회인 것 같았다.

벽 뒤에 숨어 있던 루시가 아드리안 앞으로 불쑥 나섰다.

“안녕하세요, 아드리안 선배님!”

긴장한 나머지 그녀의 입에서는 생각보다 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갑자기 맞닥뜨린 여학생 앞에서 놀라 아드리안이 급히 멈춰 섰다.

그를 놀라게 했다는 사실에 더 놀란 루시도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루시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갑자기 경쾌한 웃음소리가 루시의 정수리 위로 내려앉았다. 곧 부드러운 손길이 루시의 어깨를 잡더니 가만히 그녀를 일으켰다.

“괜찮아.”

고개를 들자 상냥하게 웃고 있는 아드리안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일인데?”

그의 목소리는 너무 부드러워서 루시는 누군가 깃털로 자신의 귀를 간지럽히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루시가 아드리안에게 입부 신청서를 슬며시 내밀었다.

“저…… 도서부에 들어가고 싶은데요…….”

“아.”

아드리안이 루시가 내민 종이를 받아들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그것을 홱 낚아챘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루시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 아드리안의 주변에 몰려 있던 신입생들을 내쫓아 버린 그 남학생이었다.

그가 싸늘한 표정으로 루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몇 번을 말하는 건지……. 내가 분명 여러 번 말하지 않았던가? 도서부 입부 신청서는 아드리안이 아니라 나에게 내라고!”

그가 톡 쏘아붙이듯 말하며 루시의 입부 신청서를 신경질적으로 공중에 흔들었다.

“다들 속셈이 아주 뻔해, 아드리안! 입부는 핑계고 다들 너와 어떻게든 엮여 보려는 속셈으로 접근하는 거라고!”

복도에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이름도 모르는 선배의 난데없는 비난에 루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앨런!”

지금껏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던 아드리안이 처음으로 인상을 쓰며 언성을 높였다. 그가 남학생에게서 종이를 다시 빼앗았다.

그의 냉랭한 반응에 앨런이라는 남학생이 우물쭈물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난…… 여자애들이 하도 널 성가시게 하니까…….”

“이 애는 그저 나에게 종이 한 장 전해 주려던 게 다였어.”

무언가 더 웅얼거리던 앨런은 곧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여전히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시를 향해 아드리안이 조용히 물었다.

“루시 키넌, 맞지?”

루시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설마, 날 기억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이름을 알려준 적은 없는데.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아드리안의 말에 루시는 다시 긴장이 풀렸다.

“이번에 수석으로 입학한. 며칠 전에 교장실로 들어가는 널 봤어. 넌 날 못 본 것 같았지만.”

“아…….”

아마도 그는 입학식 날, 수석과 차석이 교장실을 방문했을 때 루시를 본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거 영광인데. 1학년 수석이 우리 부에 신청서를 내러 와 줄 줄은 몰랐는걸.”

그가 얼굴에 친절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친절해.

루시는 그런 그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생각했다.

상냥해.

정말로 딴 사람 같아.

대체 7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머리에 벼락이라도 맞았나?

“도서부에 신청서를 낸 사람은 면접도 따로 봐야 하는데. 그런데 내가 지금은 수업이 있어서…….”

루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아드리안이 미안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이따 점심시간에 도서관으로 올래?”

“네, 그럴게요.”

“그래, 그럼.”

아드리안은 마지막까지도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으며 복도를 떠났다. 혼자 남은 루시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루시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게다가 7년 전의 그 소년과는 딴 사람인 것처럼 시종일관 예의 바르고 친절했다.

와…… 공작가 교육이 대단하긴 한가 봐.

멀어져 가는 아드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시는 생각했다.

그 싸가지 없던 애가 아주 딴 사람이 되었네.

* * *

점심시간이 되어 루시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앞서 약속했던 대로 아드리안은 홀로 도서관을 지키고 있었다. 루시가 나타나자 그가 예의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아, 어서 와.”

루시는 아드리안의 안내에 따라 도서관 한구석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아드리안이 미리 받아 두었던 루시의 신청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곧 그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을 들고 나타났다.

“밖에 춥지?”

“네, 조금요.”

아드리안이 앞에 내려놓은 찻잔을 감싸 쥐며 루시가 대답했다. 손안에 온기가 느껴지며 긴장이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3월 중순까지는 쌀쌀한 날씨가 계속될 거야. 그러니 뭐라도 걸치고 다녀.”

아드리안이 말했다. 루시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면접을 볼 생각에 긴장을 했던 그녀지만, 아드리안의 차분하고 나른한 음성을 듣고 있자니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면접이라곤 하지만 그렇게 거창한 건 아냐. 그냥 네가 얼마나 도서관 일에 성실한 태도로 참여할 수 있을지 보려는 거니까. 아무래도 사서 선생님이 계시긴 하지만, 대부분의 도서관 업무는 도서부가 자체적으로 결정하고 운영하고 있거든.”

그의 말에 루시는 당장이라도 열정을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허리를 바로 세워 앉았다.

평소 조용하고 나서길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책에 대해서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도서관 하나 없는 작은 시골 동네에서 자랐지만, 고전이나 유명한 문학에 관해서는 빠짐없이 읽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자, 그럼 면접을 시작해 볼까?”

아드리안이 루시의 입부 신청서를 집어 들었다. 루시는 긴장되는 마음을 털어 내려는 듯 뻣뻣할 정도로 허리를 바로 세우고 앉았다.

아드리안이 무언가 질문을 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첫 마디를 내뱉기도 전에 별안간 도서관 문이 벌컥 열렸다.

조용한 도서관의 평화를 깨는 그 소리에 루시와 아드리안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남학생이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삐딱하게 서 있었다.

아드리안만큼이나 장신의 키,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금빛 머리카락, 무언가 언짢은 듯 날카롭게 뜬 눈.

그리고 그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호수 같은 눈동자.

그를 보는 루시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

문가의 남학생을 바라보는 루시의 표정이 어리벙벙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드리안을 보았다. 그다음엔 다시 문가의 남학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반듯한 이마와 눈썹, 푸른 눈동자, 콧대, 입술, 결 좋은 금발까지.

마치 한 쪽은 거울에 비친 모습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두 남자는 생김새가 똑같았다.

쌍둥이……?

루시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녀는 태어나서 이렇게나 닮은 쌍둥이는 본 적이 없었다. 닮아도 너무나 닮아 있었다. 머리 길이를 빼면 모든 것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나타난 남학생을 보자마자 아드리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핀잔을 주었다.

“꼭 그렇게 시끄럽게 들어와야 돼?”

“어차피 사람도 없네.”

그 남학생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가 이마 위로 흘러내린 금빛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자 다시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꽤 쌀쌀한 바깥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는 코트를 벗어 손에 들고 있었는데, 이마와 목 주변에는 땀까지 맺혀 있었다.

“회의는 어땠어?”

“똑같았지, 뭐. 집안 늙은이들이 모여서 땅따먹기하자는 내용.”

아드리안의 질문에 그 남학생은 질린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근처까지 다가온 그가 루시와 등을 맞댄 뒤쪽 소파에 털썩 앉았다. 루시의 뒷덜미로 그가 몰고 온 초봄의 찬바람이 서늘하게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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