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40화
어느 학교에서든, 수석으로 입학한 학생이 단상 위로 올라가 신입생 선서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니 오늘, 입학생 대표로서 단상 위에 올라가야 했던 학생 역시 루시인 게 당연했다.
그런데 막상 호명된 이름은 에릭 로먼이라고 하는 차석 남학생이었다. 듣기로는 어느 자작가의 장남이라고 했다.
이름이 호명된 후, 에릭 로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학부모 석에 앉아 있던 부부 한 쌍이 유독 요란한 박수를 쳤다. 아마 그 남학생의 부모인 로먼 자작 부부인 듯싶었다.
루시는 그곳에 보고 싶은 얼굴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곧 눈이 마주친 코너 남작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루시도 화답하듯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가족들이 안 와서 다행이야.
브롬에서 아카데미가 있는 수도 근처까지는 너무 먼 거리였기 때문에 루시의 가족들은 참석하지 못했다. 처음엔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다행인 것 같았다.
자신이 평민이라는 이유로 신입생 선서를 하지 못하는 광경을 본다면 가족들은 틀림없이 슬퍼했을 테니 말이다.
제노미움 아카데미가 평민 학생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불과 이십 년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귀족 자제만을 위한 명문 학교로서 폐쇄적으로 운영되어 오던 제노미움의 이러한 변화는 그 당시 제국에서 한창 화젯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름뿐인 변화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안은 여전히 귀족들만을 위한 교육의 장이었다.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 예로, 아카데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평민 학생을 학생 대표로 단상 위에 오르게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평민인 루시가 수석 입학을 하던 해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명문이라더니 순 엉터리.”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콜린이 중얼거렸다.
루시 역시 자신이 받은 차별에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대신 화를 내주는 친구가 있어 마음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래. 수업료 감면을 받은 것으로 위안을 삼자.
그렇게 루시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단상 위에서 대표로 선서를 하는 에릭 로먼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에릭 로먼의 선서가 끝이 난 후엔 교장의 환영사가 이어졌다. 그의 단조롭고 느릿한 말투는 금방 장내를 지루하고 따분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그의 긴 연설이 마침내 끝나자, 좌중에서 의무적인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 유머 감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교장이 어서 내려가 주길 바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교장의 순서를 뒤이어 단상 위로 오르는 한 남학생에 의해 그레이트 홀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 남학생에게로 향하는 동시에 장내에는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많은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돋보이는 장신의 키. 차분한 걸음걸이.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뒤로 넘긴 금발.
루시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토록 아름다운 금빛 머리칼을 예전에도 한 번 본 기억이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어떤 기억이 연기처럼 스멀스멀 그녀의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잠시 정적이 흐르던 장내가 다시금 술렁대기 시작했다. 루시 주위에 앉은 신입생들도 입을 모아 속닥거렸다.
“……2학년의 학생회장 선배야.”
“그 베르크 공자 말이야…….”
익숙한 이름에 루시는 숨을 멈췄다.
베르크 공자.
그녀의 눈이 잠시도 놓치지 않고 단상 위로 오르는 남학생의 뒷모습을 쫓았다.
마침내 단상 중앙에 선 그가 좌중을 향해 돌아섰을 때 루시는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훤칠하게 드러난 이마 아래, 사람들을 둘러보는 푸른 눈동자.
그 애야.
루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분명 그 애야.
7년 만이었지만 루시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저 남학생이 에버른가의 호수에서 보았던 소년이라는 것을.
저토록 빛나는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그 애밖에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물론 그녀 혼자만 알아본 것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예기치 못한 재회에 루시는 기분이 얼떨떨해졌다.
베르크 공자가 재학생 환영사를 시작하려는 듯 조용히 목을 가다듬었다.
루시뿐만 아니라 장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자랑스러운 제노미움의 새 가족이 되신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재학생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서게 된 아드리안 베르크라고 합니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홀린 얼굴로 베르크 공자의 환영사를 들었다.
“와, 진짜 잘생겼다.”
좀처럼 그런 말은 하지 않는 콜린이 루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으응…….”
베르크 공자의 환영사를 들을수록 루시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녀가 기억하는 베르크 공자는 등을 동그랗게 말고 웅크려 있던,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작은 소년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소년은 늠름한 청년이 되어 루시 앞에 서 있었다.
의젓하고 빈틈이 없어 보이는 그한테서는 7년 전 루시에게 짓궂게 굴던 소년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가 그의 목소리를 숨죽인 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내용에는 집중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베르크 공자의 얼굴만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어느새 환영사가 끝이 났다.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박수가 쏟아졌다. 돌처럼 앉아 있던 루시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따라 박수를 쳤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루시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던 목소리만큼은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맴돌았다.
“아드리안…….”
루시가 단상에서 내려오는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름이 아드리안이었구나.
* * *
“좋아, 결정했어! 난 연극부에 들 거야.”
콜린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선언하듯 말했다.
“그래. 어울린다.”
옆에 앉아 있던 루시가 대충 맞장구쳐 주며 대꾸했다. 심드렁한 루시의 반응에도 콜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든 종이들을 연신 그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아니면 검술부는 어때? 멋있잖아!”
“넌 검을 제대로 쥐어 본 적도 없잖아.”
“뭐 어때. 이제부터 배우면 되지. 아, 잠깐……, 입부 테스트가 있네? 그럼 여긴 패스!”
콜린이 가벼운 동작으로 종이를 구겨 던졌다. 이어 그가 다른 종이들을 집중해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점술부도 있잖아? 뭔가 재밌어 보여!”
“점술은 배우기 복잡하고 어려운 학문이야. 단순히 재미있어 보여 들어갔다간 큰코다칠걸.”
루시가 갈팡질팡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콜린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제노미움 아카데미 입학 삼 일째.
루시와 콜린은 아카데미에 적응할 새도 없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부서 활동 홍보지를 둘러보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는 학업만큼이나 부서 활동 역시 중요시했으므로 둘은 휴게실 테이블 위에 홍보지를 펼쳐 놓고 한참이나 고민을 이어 갔다.
“야, 루시. 그냥 나랑 연극부에 들어가자니까.”
“싫어, 나 연기 못 한단 말이야.”
단칼에 거절하는 루시를 향해 콜린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뭐 생각해 놓은 데라도 있어?”
그의 질문에 루시가 종이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뭐야!”
콜린이 냉큼 종이를 뺏어 들었다.
“도서부?”
그가 종이를 들여다보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심지어 입부 신청서까지 적어 두었잖아?”
콜린은 루시에게서 빼앗아 든 종이가 홍보지가 아닌 루시의 글씨로 빼곡히 채워진 입부 신청서라는 것을 깨닫고 말했다.
“너는 여기 와서까지 책에 파묻혀 살고 싶어?”
“그게 뭐가 어때서!”
루시가 신청서를 다시 홱 빼앗으며 쏘아붙였다.
“아휴, 재미없어! 생각만 해도 지루하다.”
콜린이 일부러 하품을 하는 척하며 말했다. 하지만 루시는 대꾸하지 않고 신청서를 고이 접어 가방에 넣었다.
“너도 이참에 책 좀 읽어. 제국에서 장서가 많기로 손에 꼽히는 도서관이 있는 아카데미에 왔으면 적극 활용을 해야지.”
“난 됐거든?”
콜린은 시큰둥한 얼굴로 대꾸하며 다른 부서의 홍보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친구 몰래 루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은 콜린이 알아챌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자신이 도서부에 들어가려는 진짜 이유를 말이다.
입학식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아드리안 베르크는 신입생들 사이에서 단연 화젯거리가 되었다.
잘생긴 외모뿐 아니라 뭇 여학생들을 설레게 하는 다정한 성격까지 더해져 그의 인기는 날로 치솟는 중이었다.
여기저기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 덕분에 루시는 아드리안에 대한 많은 소문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제노미움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일 뿐만 아니라 도서 부장까지 맡고 있다는 것. 게다가 입학 이래 단 한 번도 학년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
그게 가능한가?
아드리안에 대해 들으면 들을수록 루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난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힘들었는데.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거지?
아드리안이 아카데미에서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인간이 아니라 초인적인 체력을 가진 괴물에 대해서 듣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루시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의 평판에 관한 말들이었다.
사람들은 아드리안 베르크의 훌륭한 인품과 예의 바른 태도에 대해서도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 댔다.
그 얘기들을 몰래 엿듣던 루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
상냥하고 친절하고 겸손하다고?
걔가?
사람한테 말똥 냄새가 난다고 막말이나 하던 애가 어떻게 그런 완벽한 모범생이 될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