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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9화 (39/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9화

“고마워요, 할머니!”

그녀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할머니는 그런 루시를 마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루시는 할머니 품에 안겨 한참 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아빠와 엄마는 살짝 놀란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루시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뭐.

서로를 보며 슬며시 짓는 미소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 * *

그리하여 몇 달 뒤, 수도로 향하는 코너 남작가의 마차에 오른 건 콜린뿐만이 아니라 루시도 함께였다.

7년 전 수도 여행을 떠나며 그랬던 것처럼, 루시는 설레는 마음으로 창밖의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또 한 번 수도에 가게 되다니. 그것도 제국 내 제일 유명한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말이다.

루시의 부푼 꿈을 안고 마차는 수도를 향해 힘차게 내달렸다.

“와아! 콜린, 그때 봤던 광장 분수대야!”

7년 만에 수도에 다시 오게 된 루시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베델의 모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콜린! 콜린! 여기 디저트 카페도 그대로 있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추억을 떠올리듯 재잘대는 루시와는 다르게 콜린은 자못 점잖은 체하며 서 있었다.

사실 그는 루시와는 다르게 남작 부부와 몇 차례 더 수도 여행을 했던 것이다.

“루시, 왜 이래! 촌에서 올라온 거 온 동네에 자랑하고 다닐 일 있어? 좀 진정해 봐.”

능청스레 말하는 콜린에게 눈을 흘긴 것도 잠시, 루시는 다시 신이 나서 드넓은 베델 광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 모습을 콜린과 코너 남작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루시. 시험 치기 전에 마음껏 기분 전환해 두렴.”

남작의 말에 그들에게 뛰어오던 루시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안색이 금세 창백해졌다.

“아아, 시험…….”

당장 내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될지도 모르는 아카데미 입학시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는 먹은 음식이 그대로 올라올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하하, 내가 괜한 소릴 했구나.”

남작이 웃으며 루시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마라. 이전에 친 모의시험에서 넌 항상 결과가 좋았잖니.”

코너 남작의 말은 사실이었으나, 루시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연습과 실전은 다르다는 걸, 루시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상 수도에 올라오니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 놓았던 자신감이 한 번에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야, 루시! 네가 아니면 누가 그 아카데미에 들어가겠어? 너무 걱정하지 마.”

콜린이 옆에서 동생을 응원하는 오빠처럼 말했다.

루시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헙!” 하고 기합을 불어넣었다.

가족들의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짊어지고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절대 후회가 되는 결과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혼자였다면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그 순간 함께 시험을 치러 온 콜린과 보호자로 동행해 준 코너 남작의 존재가 그 누구보다 든든했다.

그래서 루시는 더 힘을 내고 싶었다.

다음 날, 드디어 시험을 앞두고 아카데미로 들어서는 루시와 콜린을 배웅하며 코너 남작이 말했다.

“긴장하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만 하거라.”

남작의 격려에도 루시는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콜린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루시의 등을 두드렸다.

“야, 루시! 화장실 한 번 더 갔다 오는 건 어때?”

“그런 거 아니거든!”

이 순간까지도 농담을 던지는 콜린에게 눈을 흘긴 뒤, 루시는 심호흡을 했다.

그래, 할 수 있어.

그녀가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넣듯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꼭 가족들에게 합격 소식을 보내 주어야지.

이어 루시가 시험장을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 * *

“콜린 코너 군과 루시 키넌 양 앞으로 편지가 왔습니다.”

테이블 위로 주문한 음식을 내려놓던 여관 주인이 덧붙이듯 말했다. 루시는 들고 있던 냅킨을 툭 떨어트리며 사색이 되었다.

입학시험을 치른 지 일주일 째.

루시와 콜린, 그리고 코너 남작은 수도의 한 여관에서 묵고 있었다. 브롬까지 돌아가는 길은 멀고 시간도 오래 걸렸기 때문에 그들은 시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수도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만약 아카데미로부터 합격 통지서를 받는다면 바로 기숙사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불합격을 받는다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브롬으로 돌아가게 될 터였다.

“자, 때가 되었구나.”

코너 남작이 루시 못지않게 긴장한 얼굴로 편지 두 통을 받아들었다.

루시는 봉투를 봉한 아카데미의 문장을 볼 수 있었다. 선명하게 찍힌 독수리 문양을 보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럼 각자 결과를 확인해 보렴.”

남작이 편지를 나누어 주었다. 루시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녀가 좀처럼 봉투를 열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옆에서 곧바로 지익, 하며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콜린이 거침없이 봉투를 여는 소리였다.

그가 곧바로 접힌 편지를 펼쳐 읽었다.

“합격이에요!”

콜린이 즉각 소리쳤다.

그 말을 듣자마자, 루시는 온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콜린에게 축하의 말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불합격이면 어떡하지.

이대로 콜린과 헤어져서 나만 브롬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면 어쩌지? 할머니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빠, 엄마에게는?

“루시, 어서!”

옆에서 콜린이 자신의 결과보다 루시의 합격 여부가 더 궁금한 듯 재촉해 왔다.

루시는 마음을 굳게 먹은 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콜린과 마찬가지로 한 번 접힌 종이가 나왔다.

차마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꾹 감은 채 종이를 펼쳤다. 천천히 눈을 떠 결과를 확인하려는 찰나.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엄청난 환호성과 함께 루시의 몸이 앞뒤로 요란하게 흔들렸다.

“으아아!”

그녀가 놀라 눈을 뜨자 바로 앞에 콜린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채 정신없이 흔들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도 크고 호들갑스러운 콜린의 목소리가 루시의 귓가에서 울려 댔다.

“합격이야, 합격! 루시! 무려 수석 합격이라고!”

평소 같았다면 아들의 행동을 나무랐을 남작까지도 얼른 루시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더니 곧장 눈앞으로 가져갔다.

편지를 읽고 콜린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남작까지 가세해 루시의 어깨를 쥐고 흔들어 댔다. 루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합격이야, 수석 합격!”

그 정신없는 와중에 콜린의 말만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합격이라니.

겨우 진정한 코너 부자가 루시를 놓아준 뒤, 그녀가 비로소 자신의 합격 편지를 읽었다.

내가 제노미움 아카데미의 수석 합격이라니!

편지를 읽고 또 읽어도 믿기지 않았다. 모든 게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들은 바로 가족들이었다.

그녀보다 더 그녀를 걱정해 주고 언제나 응원해 주던 아빠와 엄마. 그리고 할머니.

지금 여기에 함께 있었다면 분명 코너 부자보다 더 기쁜 얼굴로 그녀의 합격을 축하해 주었을 것이다.

당장 합격 사실을 들은 할머니의 행복한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

“루시! 이것 좀 봐! 장학 증서야!”

콜린이 루시의 편지 봉투에서 또 하나의 종이를 꺼내 팔랑거렸다.

그 종이는 제노미움 아카데미 입학 시, 첫 학기 동안의 수업료를 모두 감면해 준다는 내용의 장학 증서였다.

장학 증서를 바라보는 루시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놀라운 순간이었다. 그토록 걱정하던 학비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된 것이었다.

루시는 곧장 이 기쁜 소식을 담아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가 집을 떠나온 뒤, 오매불망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한시도 더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할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할지 상상하면 루시는 저절로 웃음이 났다. 처음으로 자랑스러운 손녀가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거렸다.

그리고 며칠 후, 루시는 콜린으로부터 상상치도 못했던 소식 하나를 전해 들었다. 그 때문에 루시는 입학도 전에 잔뜩 긴장해야 했다.

“루시, 루시! 수석 입학생은 입학식에서 대표로 신입생 선서를 한대!”

“뭐어?”

루시가 깜짝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대표로 단상 위에 올라가서 선서를 하는 거야!”

마치 자신이 단상 위에 올라가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흥분한 콜린이 설명했다.

“나…… 난 그런 거 못 해!”

“왜 못 해! 할 수 있어!”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자신만 쳐다보는 가운데 하는 선서라니.

루시는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아득해졌다.

“너희 할머니가 좋아하실 거야! 자랑스러워하실 거라고!”

콜린의 말에 루시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할머니가 좋아하실 거야!

아마 할머니는 그 순간을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자랑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루시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할머니에게 행복한 순간을 선물할 수 있다면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서 하는 선서도 용기를 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진짜 마음에 안 드네.”

입학식 당일. 콜린은 팔짱을 낀 채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보기 드물게 그는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자신의 좋지 않은 기분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매서운 눈빛을 한 채 단상 위로 올라가는 한 남학생을 노려보았다.

“수석 입학은 넌데 왜 쟤가 신입생 선서를 하는 거야?”

콜린의 눈빛이 점점 더 사나워졌다. 마치 눈빛만으로 에릭 로먼이라는 남학생의 등을 뚫어 버릴 태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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