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8화
그리고 수도 여행을 떠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에버른 후작가의 정원에서 만난 그 소년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졌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요즘에도 그 호숫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건 아니겠지.
홀로 웅크린 채 피가 날 때까지 긁어 대던 소년의 기억은 한 번 떠오르면 좀처럼 루시의 머릿속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할머니, 마르암 덩굴 알레르기 약 만드는 방법도 아세요?”
루시의 물음에 약초를 말리던 할머니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르암 덩굴 알레르기?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게냐?”
“으음,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싱겁긴.”
할머니가 싱긋 웃으며 거칠거칠한 손으로 루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레르기 약뿐이겠니? 할머니는 모르는 약이 없단다!”
할머니의 호언장담에 루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게 루시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알레르기 약을 만들었다.
그렇다. 결국 약을 만들고 말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웅크리고 있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계속 떠오르는 건가 봐.
루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얄밉긴 했지만 어쩐지 신경이 쓰이더라고.
빗속에 떨고 있는 강아지만 봐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걸.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전해 줄 수 있을까.
루시는 완성된 약을 들고 고민했다.
베르크 공작가에 우편으로 부쳐 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다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무려 베르크 공작가였다. 제국의 유수한 의사들이 밤낮으로 공작 일가의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고 있을 게 분명했다.
거지가 부자 걱정하는 격이었다. 자신이 만든 약이 아니더라도 그 소년은 분명 최고의 치료와 보살핌을 받고 있을 터였다.
결국 루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약병을 진열장 깊숙이 넣어 두었다.
열심히 만든 시간과 정성이 아깝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누군가의 아픔을 위해 약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루시는 만족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소년을 떠올리는 나날들은 점점 줄어 갔고, 약을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도 점차 희미해졌다.
“루시, 저번에 만든 알레르기 약이 진열장에 그대로 있더구나. 누군가에게 주려고 만든 게 아니었니?”
가끔 할머니가 물어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루시는 의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만들어 본 거예요. 어떤 약이든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면 유용할 테니까요.”
루시의 대답을 들은 할머니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내가 알고 있는 약은 뭐든 다 가르쳐 줄 테니 걱정 말거라! 언젠가는 네가 이 약방을 물려받아 꾸려 갈 게 아니니.”
할머니의 말에 루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살짝 사라졌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활짝 웃었다.
“네, 그럼요.”
태연한 척 대답하는 루시의 마음 한구석에는 사실 또 다른 꿈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꿈.
그건 바로 다시 한번 더 수도에 가 보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브롬을 사랑하긴 했지만, 루시의 머릿속에서는 수도의 활기차고 웅장한 광경이 좀처럼 떠나가질 않았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할머니에게는 절대 내비칠 수 없는 그녀만의 비밀이었다. 할머니가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된다면 분명 서운해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커다란 세상을 가슴 속에 꽁꽁 숨긴 채, 루시는 다시 제국 변방의 시골 소녀로서 평화롭고 별다를 것 없는 나날들을 살아 나갔다.
* * *
하지만 소녀의 마음속에 심어진 작은 씨앗은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않고 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 루시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그녀가 ‘제노미움 아카데미’란 곳을 알게 되면서 드디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제노미움 아카데미?”
이번에도 콜린의 자랑으로 알게 된 아카데미의 존재가 루시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 수도 근처에 있는 명문 아카데미 말이야.”
“거길 간다고?”
“합격한다면!”
말과는 다르게 콜린은 이미 합격이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와!”
루시는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콜린을 바라보았다.
콜린은 남작가의 자제로서 든든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가 좋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될 것이라고 진작 전해 들은 바 있었지만, 그게 수도에 있는 아카데미일 것이라고 루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루시는 6년 전 트리아나 부인과 함께했던 수도 여행을 오랜만에 떠올려 보았다.
그때 보았던 풍경들은 수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조금 희미해졌지만, 마음으로 느꼈던 설렘과 감동만은 아직도 생생했다.
루시의 마음이 이상하고 묘한 감정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멀리 가는 거야?”
콜린이 제노 어쩌고 하는 아카데미로 가 버리면 아마 졸업할 때까지 볼 수 없을 것이다. 수도는 정말이지 멀고 먼 곳이었으니까.
루시는 제일 친한 친구가 자주 볼 수 없는 도시로 가 버릴 것이라는 사실에 섭섭해져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루시의 시무룩해진 표정을 본 콜린이 덩달아 시무룩해지더니 얼른 그녀를 달랬다.
“영원히 거기 있는 것도 아닌데, 뭘! 3년이야, 3년!”
3년도 길다!
루시는 속으로 외쳤다.
너 없으면 난 누구랑 놀아.
콜린이 아무리 달래도 루시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저녁을 먹을 때도,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며 침대에 누웠을 때도.
그녀는 무언가 허탈하고 서운한 기분을 느끼며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제일 친한 친구가 명문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다면 기꺼이 응원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루시는 자신의 좁고 삐딱한 마음을 혼내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콜린은 머리가 좋으니까 분명 합격하겠지. 섭섭해하면 안 돼. 콜린은 최고의 아카데미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한 영주님이 될 자격이 있어.
끊임없이 타이르고 타일렀다. 하지만 밤이 깊도록, 다음 날이 되어도, 여러 날이 흘러가도 루시의 가라앉은 기분은 통 나아질 줄을 몰랐다.
난 정말 콜린이 멀리 가는 게 서운해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루시는 몇 날 며칠을 자괴감에 빠져 고민했다.
그런 그녀를 줄곧 의미심장한 얼굴로 살피는 사람이 있었다. 루시의 할머니는 날이 갈수록 더 넋을 빼놓은 사람처럼 하고 다니는 손녀를 주의 깊게 살폈다.
“아마 콜린과 헤어지게 될 생각에 섭섭해서 저러나 봐요.”
“워낙 어릴 때부터 함께였으니까요.”
엄마와 아빠의 추측에도 할머니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야.”
루시를 살피는 할머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날 저녁, 식탁에서 할머니가 불쑥 말했다.
“몇 달 뒤에 콜린이 정식으로 아카데미에 시험을 보러 간다는구나.”
할머니의 말에 멍한 얼굴로 포크를 물고 있던 루시가 냉큼 고개를 들었다.
루시의 엄마는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잘 됐지 뭐예요. 콜린은 똑똑해서 분명 합격할 거예요.”
루시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요. 그럴 거예요.” 하고 중얼거렸다.
뒤이어 콜린의 바른 심성과 차기 브롬 영주로서 갖는 기대감에 대한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루시는 동의의 뜻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선은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 구석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할머니가 갑자기 말했다.
“루시도 함께 시험을 보는 건 어떻겠니?”
챙그랑!
루시가 물고 있던 포크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바닥에서 시끄럽게 구르던 포크는 잠시 후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자 식탁 위로 긴 정적이 찾아왔다.
예상치 못한 할머니의 발언에 가족들 모두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루시는 떨어뜨린 포크를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할머니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것만 같았다. 할머니는 그런 루시에게 잘못 들은 게 아니라고 말해 주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일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아빠였다.
“어머니…… 진심이세요?”
그 역시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학비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제노미움은 제국 최고의 명문 아카데미였다. 학비 역시 일반 학교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 점을 떠올린 아빠의 미간에는 살짝 주름이 잡혀 있었다.
“안 그래도 루시를 학교에 보내야겠단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제노미움까진 아니더라도……. 동부에도 좋은 학교들이 있으니 루시에겐 충분할 거예요.”
“충분한지 충분하지 않은지 네가 어떻게 알아.”
할머니는 단호하게 아빠의 말을 잘랐다.
“루시는 워낙 자기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애야. 그러니 아무도 이 애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모르지. 설령 네가 이 애의 아빠라고 해도 함부로 넘겨짚지는 마라.”
할머니는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루시는 어릴 적부터 딱히 가르치지 않아도 저 혼자 여러 학문을 독학하지 않았니. 수준 높은 교육을 받는 귀족가 자제들도 그렇게 하긴 힘들 거다. 나는 이 애에게 맞는 수준의 학교는 당연 제노미움이라고 본다.”
“저도 루시가 똑똑한 애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어머니. 우리 형편에 제노미움은 무리예요.”
“내가 널 의술원에 보낸다고 했을 때 마을 사람들도 똑같은 소릴 했지. 애한테 괜한 헛바람 불어넣지 말고 일찌감치 농사나 가르치라면서.”
무어라 더 반박하려던 아빠가 입을 다물었다. 식탁 위에 또 한 번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루시의 아빠가 얕은 한숨을 내쉬더니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지방 의술원과 수도 아카데미의 학비를 비교하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걱정 마라.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 꺼낸 말이다.”
할머니의 확고한 태도에 아빠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그 순간 가장 기뻐해야 할 루시는 자신에게 무한한 믿음을 보여 주는 할머니의 말에도 불구하고 좌불안석으로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다 생각이 있다고 했지만 그다지 믿음이 가지는 않는 말이었다. 루시가 보기에도 그녀를 제노미움 아카데미에 보내는 것은 집안 형편에 맞지 않는 결정이었다.
그냥 내가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해야 해.
그게 모두를 위한 일이었다.
그렇게만 하면 할머니와 아빠가 이 일로 언쟁을 벌일 필요도 없을 테고, 할머니도 손녀 때문에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을 테니.
“할머니, 전…….”
망설이던 루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딱히 제노미움에 가고 싶지는 않아요.
그 한 문장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루시는 할머니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갑자기 눈물을 터트렸다.
“고마워요, 할머니!”
그녀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외치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