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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7화 (37/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7화

“뭐어?”

루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느긋이 앉아 있던 소년도 깜짝 놀라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루시는 그 어느 때보다 경악스런 얼굴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그녀의 커다래진 눈과 떡 벌어진 입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루시의 반응에 소년이 얼떨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자기가 무슨 나쁜 말이라도 했나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루시는 여전히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그건……! 그건……!”

아빠가 엄마한테 청혼할 때 한 말이란 말이야!

루시는 뒷말을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처음 보는 여자애한테 그런 부끄러운 말을 서슴없이 하다니. 수도 애들은 원래 이렇게 당돌한가?

루시가 계속 입을 뻐끔대며 서 있기만 하자 소년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너 진짜 이상한 애다.”

루시는 그만 기가 막혀 실소를 터트렸다.

누가 할 소린데.

눈을 사납게 뜨고 쳐다보자, 소년 역시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해 왔다.

뭐야, 이번엔 눈싸움이야?

이번에는 절대 봐주지 않을 요량으로 루시는 눈을 더욱 매섭게 부라렸다.

그런데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삐딱하게 앉아 있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눈싸움이라기보단 무언가 관찰하는 눈빛으로 루시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더니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꾹 다문 입술이 무언가 불만이 있는 사람처럼 꿈틀거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소년은 루시의 눈을 바라보며 무언가 심각한 고민을 하는 듯했다.

“아, 생각났다!”

마침내 체증이 쑥 내려간 사람처럼 시원한 얼굴로 소년이 대뜸 외쳤다.

“네 눈 말이야.”

또 눈 얘기였다. 루시는 긴장한 얼굴로 소년에게서 한발 물러섰다.

이번엔 또 무슨 소릴 하려고.

“<마녀의 눈물>에 나오는 에메랄드를 닮았어.”

“……그게 뭔데?”

“<마녀의 눈물>! 숲의 마녀 이젤다가 에메랄드를 들고 있는 그림 있잖아. 천재 화가 루첸트의 그림 말이야.”

처음 들어 보는 그림에, 처음 들어 보는 화가였다.

루시가 소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눈만 끔뻑거리자 소년이 답답한 듯 재차 말했다.

“화가 루첸트!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화가, 몰라?”

“몰라.”

“어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루시는 발끈했다.

“난 그런 화가 몰라! 그런 그림도 본 적 없어!”

“당연하지! 그건 우리 집 복도에 걸려 있는데 네가 어떻게 봐!”

루시는 주먹을 꾹 쥐었다.

딱 한 대만 때리고 도망갈까.

루시는 진지하게 고민하며 소년의 얄미운 이마를 노려보았다.

“근데 넌 여기서 뭘 하는 건데?”

소년이 문득 물었다.

“왜 여기까지 왔어? 여긴 내 구역이야.”

이번에는 루시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네 구역 내 구역이 어디 있어? 여긴 그냥 호수야.”

소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다시 무릎을 감싸 안았다. 그러더니 힘없이 얼굴을 파묻었다.

별안간 풀 죽은 얼굴을 보고 왠지 모르게 미안해진 루시가 제안했다.

“……저쪽에 가면 맛있는 음식도 많은데. 너도 가서 먹지 그래?”

“…….”

“여자들만 초대받은 모임이지만 설마 쫓아내기라도 하시겠어?”

“너나 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소년이었다. 한가득 차려진 음식도 마다하고, 굳이 알레르기 증상을 일으키는 풀이 가득한 정원 구석에 숨어 있는 꼴이라니.

“부끄러워서 그래?”

“…….”

“내가 대신 말해 줄까?”

“……됐어. 난 혼자 있는 게 좋아. 사람 많은 거 질색이야.”

꽁꽁 감춘 얼굴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시는 소년의 울긋불긋한 목덜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혼자 있는 게 좋다고 말하는 소년의 표정이 왠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사라지고 싶다.”

또 한 번 흘러나온 소년의 목소리는 호수에서 불어온 가을바람과 함께 멀리 날아가 흩어져 버렸다.

“저기…….”

루시는 소년이 안쓰러워져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네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입술만 달싹거릴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정원 울타리 너머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커다란 나무 뒤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장을 보니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인 듯싶었다. 그녀가 웅크려 앉은 소년을 보더니 외쳤다.

“도련님!”

그녀가 헐레벌떡 소년에게로 달려왔다. 그녀는 남자아이를 서둘러 일으켰다. 그러더니 옷에 묻은 흙과 풀을 털어 주었다.

“아휴, 또 긁으셨네! 이 피 나는 것 좀 봐!”

옷을 정리해 주던 그녀가 피가 나고 있는 소년의 손등과 팔뚝을 보더니 말했다.

“이 풀은 또 뭐예요?”

소년의 바짓단을 정리해 주던 하녀가 발목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풀을 보더니 물었다. 소년이 심드렁한 얼굴로 루시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읊기 시작했다.

“이건 모가나라는 풀이야. 이걸 이렇게 찧어서 가려운 곳에 얹고 있으면…….”

그러나 시녀는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발목에 붙은 풀을 떼서 바닥에 버렸다.

“자, 어서 들어가요, 도련님. 여기 계속 있다간 증상이 더 심해지실 거예요.”

시녀는 멀뚱히 서 있는 루시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소년만을 챙겨 호숫가를 떠나려 했다.

소년은 귀찮고 성가시다는 얼굴로 무언가 툴툴거렸다. 하지만 억센 하녀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발을 떼었다.

호숫가를 떠나던 소년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호수 같은 눈과 루시의 에메랄드 같은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이윽고 그가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잘 가.”

“으응. 안녕.”

루시가 어색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 남자아이는 시녀의 손에 붙들려 무심한 표정으로 호숫가를 떠났다.

잠시 참나무 아래 우두커니 서 있던 루시는 고개를 내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너무 오래 있었다.”

트리아나 부인이 걱정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루시는 얼른 정원을 통과해 오찬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귀에 익숙한 말소리들이 들렸다. 오찬장이 가까워졌다.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시종들이 열심히 음식을 나르고 있었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하녀들이 디저트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디저트를 나르던 하녀들이 속닥속닥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렸다.

“……베르크 공자님을 찾았대. 또 정원에 혼자 계셨나 봐.”

“알레르기도 있으면서 왜 자꾸 정원에 들어가시는 걸까.”

베르크 공자.

하녀들의 이야기를 엿듣던 루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 애가 베르크 공자구나. 공작님의 아들 말이야.

그녀는 한 번도 공작같이 높은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공작의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공작 정도 되는 사람은 루시 같은 평민 소녀가 평생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수도에 살면서 황제 폐하를 도와 국정의 운영을 돕느라 브롬 같은 시골 마을에 올 일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처럼 우연히 들어간 정원에서 우연히 공작의 아들을 마주치는 것도 극히 드문 확률의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와! 내가 공작님의 아들을 만났어!”

루시는 또 한 번 수도에 온 것을 실감했다.

공작님 아들은 그런 눈부신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지고 있구나. 게다가 입은 옷도 엄청 좋아 보였어! 그리고 이런 좋은 집에서 매일매일 맛있는 음식만 먹겠지?

소년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던 루시가 곧 입을 빼죽 내밀었다. 그가 자신에게 던졌던 무례한 말들이 생각나서였다.

흥, 근데 공작님 아들도 별거 없네, 뭐! 브롬의 철없는 남자애들처럼 심보가 고약하잖아.

공작님 아들이면 말도 사근사근하고 예의 있게 해야 하는 거 아냐?

사람한테 말똥 냄새가 난다는 말이나 하고!

루시는 속으로 투덜대며 정원을 빠져나왔다.

곧 우아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귀부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오찬장은 그녀 없이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잘 굴러가는 중이었다. 트리아나 부인은 와인에 취한 건지 두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루시는 부인 옆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래, 루시!”

그녀가 루시를 보며 말했다.

“정원은 어떻더냐?”

“아름다웠어요! 처음 보는 꽃도 많았고요.”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

트리아나 부인이 흐뭇하게 웃었다.

곧 정원 탐험을 마치고 돌아온 작은 소녀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금방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부인은 살짝 취기가 오른 얼굴로 다른 귀부인들과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루시는 이제 이 모임에서 사람들과 친해져 보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

사람을 만나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대화를 나눈 것은 그 소년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루시는 사람이 아닌 테이블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음식들에게 아낌없이 관심을 쏟아붓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서야 시종들이 가져다 날라 주는 케이크와 과자들이 눈에 띄었다.

“우와!”

소년을 떠올리던 것도 잠시. 그녀는 테이블 위에 차려진 디저트들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주저 없이 가장 가까운 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안 먹으면 자기만 손해지.”

루시가 무심코 소년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으로 거기 웅크려 있었을까?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던 루시가 또다시 소년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는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그녀가 집어 든 과자를 크게 베어 물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난생처음 맛보는 진한 달콤함이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동안 베르크 공자에 대한 생각은 차츰 희미해졌다.

* * *

수도에서의 나날은 루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 번의 여행으로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있다던 트리아나 부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루시는 자신이 완전히 변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겉으로 보자면, 그녀의 삶은 전혀 바뀐 게 없어 보였다.

그녀는 평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할머니가 약초 다듬는 것을 도왔다. 엄마를 도와 가족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고, 마당으로 몰래 숨어드는 고양이를 쫓아냈다.

평범한 시골 소녀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깜짝 놀랄 만큼 넓은 세상이 그녀 안에 펼쳐져 있었다.

수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루시는 종종 찬란한 거리와 높은 건물들을 떠올리곤 했다.

그 어느 곳보다도 위엄이 넘치고 웅장했던 황궁.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을 것 같던 수도의 밤거리. 활력이 넘치는 시장.

루시는 종종 수도의 찬란하고 떠들썩한 모습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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