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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6화 (36/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6화

어떤 아이였다.

그 애는 어느 참나무 밑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금빛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찬연하게 빛났다.

루시는 잠시 망설였다.

다가가도 되나?

잠시 뒤, 그녀는 조용히 그 아이에게로 걸어갔다. 아이는 루시의 기척을 듣지 못한 건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와, 아름다워…….

멀찍이 떨어진 곳에 멈춰 선 루시는 결 좋고 윤기 나는 금발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물론 브롬에도 금발을 가진 사람이 있긴 했다. 과수원집 딸 로아라든지, 꽃집의 안나 언니라든지.

그들은 자신의 아름다운 금발을 자랑스러워했으며 관리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루시도 가끔 금실 같은 그들의 머리칼을 부러운 손길로 만져 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아이의 금발은 이제껏 루시가 보아 왔던 금발들은 금색이 아니라 말하고 싶을 정도로 빛이 나고 아름다웠다. 마치 태양을 물레에 돌려 실로 짜낸 것 같았다.

말 걸어도 되나?

루시는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아이가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잘생긴 남자아이였다.

우와…….

루시는 또 한 번 감탄했다.

바로 옆 호수의 빛깔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푸른 눈이 아이의 얼굴에서 빤짝이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뚱한 표정으로 루시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우는 건가? 혼난 건가? 왜 혼자 이러고 있지?

루시는 가만히 그 소년을 지켜보았다. 금발에 정신이 팔려 뒤늦게 발견한 사실은 그가 입고 있는 옷 또한 비싸고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귀부인들과 함께 온 아이 중 한 명일까? 그런데 여긴 여자들만 올 수 있는 모임이라고 했는데.

루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소년과 조금 떨어진 근처에 앉았다.

먼 곳에서 산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수가 출렁이는 소리와 맞물려 숲은 더욱 한적한 느낌이 났다.

여기는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아.

루시가 상쾌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소년이 자신의 팔을 긁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루시는 깜짝 놀랐다.

소매를 걷어 올린 팔 여기저기에 흉터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팔을 긁었고, 이윽고 상처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루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년에게 쪼르르 달려간 그녀가 황급히 말했다.

“긁으면 안 돼! 피나잖아!”

“…….”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여전히 피가 나오는 팔을 긁고 또 긁었다. 이내 그가 목덜미를 긁기 시작했다. 목덜미에도 상처가 가득했다. 루시가 경악하며 외쳤다.

“긁지 말래도!”

“저리 가.”

금발 아래서 시무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긁으면 더 가려워.”

루시는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가렵단 말이야.”

루시는 그의 얼굴에 난 울긋불긋한 자국을 보았다.

“이건…….”

그녀는 아버지를 찾아왔던 똑같은 증상의 환자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의 몸에도 소년의 것과 같은 붉은 자국들이 온몸에 올라와 있었다.

“아마도 마르암 알레르기?”

루시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방팔방이 참나무 밑동을 휘감은 채 자라나고 있는 마르암 덩굴 천지였다.

“알레르기도 있으면서 왜 여기 앉아 있는 거야?”

루시의 물음에 소년이 입술을 불퉁 내밀며 대답했다.

“내 맘이야. 여기 있는 게 맘이 편하단 말이야.”

가려워서 피가 날 때까지 긁어 대면서 여기가 더 편하다고?

루시가 의아한 얼굴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그 와중에 소년은 이제 새로운 부위를 찾아 긁으려 하고 있었다. 그가 바짓단을 걷어 올리더니 이번에는 발목을 긁기 시작했다.

“잠깐만!”

루시가 황급히 그를 말렸다.

그녀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금방 모가나 풀을 찾아낸 그녀는 그것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빻았다. 그리고 그것을 소년의 발목 위에 올리려고 했다.

“뭐야! 그걸 왜!”

“가만히 있어 봐!”

루시를 밀어내려던 소년은 갑작스레 발목에서 느껴지는 시원함에 움직임을 멈췄다.

“어때? 시원하지?”

그녀의 물음에 소년이 요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찝찝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로 시원하다는 얼굴이었다.

이내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건 모가나라는 풀이야. 돌로 찧어서 몸 위에 올려놓으면 시원한 기분이 들어.”

“여기도 올려 줘.”

그가 불쑥 상처 난 팔을 내밀었다.

“거긴 안 돼. 이미 피가 나고 있잖아. 소독하고 상처 연고를 발라야지.”

루시가 늘 매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서 조그만 연고 통을 꺼냈다. 그녀가 그것을 소년에게 내밀었다.

“자.”

하지만 소년은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됐어. 뭔지 모를 약은 함부로 안 발라.”

“이건 우리 할머니가 만든 거야! 우리 할머니는 브롬에서 제일 유명한 약방 주인이라고!”

“…….”

“어휴.”

까탈스럽네.

결국 루시는 약통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소년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가 싶더니 다시 고개를 무릎 사이에 묻어 버렸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인 것 같았다. 루시도 더 이상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애는 너무 거만하고 까칠했다.

루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원이나 더 둘러봐야지.

알지도 못하는 남자애한테 시간을 쏟느니 꽃구경을 더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의 발은 자리에서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눈이 자꾸만 웅크려 앉은 소년의 상처 많은 뒷덜미로 향했다.

루시는 옛날부터 상처만 보면 마음이 약해졌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다시 가방에서 연고를 꺼냈다. 그리고 소년의 발치에 그것을 툭 내려놓았다.

“자, 여기 둘게. 바르든 버리든 네 마음대로 해.”

루시의 말에 소년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연고를 내려다보았다. 주워서 챙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필요 없다는 말도 안 했다.

으휴, 새침데기.

루시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찰나, 소년이 웅얼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한풀 꺾인 기세로 인사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루시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래도 아주 삐뚤어진 애는 아닌가 봐.

그녀는 슬쩍 웃으며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다시 앉았다.

옆에서 연고를 집어 주머니에 챙겨 넣느라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까지 이 남자애로 인해 언짢았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루시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남자아이처럼 무릎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잔잔하게 흔들리는 호수의 표면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색을 뽐내는 꽃, 정원사의 훌륭한 솜씨로 잘 다듬어진 토피어리, 아름다운 분수대…….

그런 것들도 좋긴 하지만, 역시 루시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더 행복했다.

더군다나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한 빛깔의 호수는 처음 보는 것이니까.

문득 목 언저리에 느껴지는 따뜻한 숨결에 루시가 얼굴을 들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던 그녀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엄마야!”

그녀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제 무릎에 고개를 푹 파묻고 있던 소년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냄새를 맡듯 코를 씰룩이고 있었다.

“뭐야?”

루시의 황당한 물음에 소년이 다시 상체를 바로 하더니 말했다.

“너한테서 풀 냄새 나. 그리고…….”

그가 말을 잠깐 멈추었다. 루시가 다음 말을 기다리며 침을 삼켰다. 소년이 또 한 번 코를 씰룩하더니 말을 이었다.

“말똥 냄새도.”

마, 말똥 냄새?

“너 마구간에서 일하냐?”

그의 물음에 루시가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난 일 안 해!”

뒤로 넘어진 채로 소년의 입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루시가 버럭 성을 냈다.

“아직 열 살이라고! 그리고 오늘은 손님으로 온 거야!”

“알 게 뭐야.”

알 게 뭐냐니? 네가 먼저 물어봤잖아!

루시는 하마터면 빽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방금 전 아주 삐뚤어진 건 아닌가 보다 했던 생각은 취소였다. 아주 심보가 고약한 녀석이었다.

수도 애들은 다 이런가?

루시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쓰고 있던 모자를 슬쩍 벗어 등 뒤로 감추었다.

소년이 맡은 냄새는 아마 이 모자에서 나는 냄새일 것이다.

그 모자는 일 년 전 아빠가 타 도시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사 온 것이었다. 옅은 분홍색에 하얀 레이스 리본으로 장식된, 나름 귀여운 모자였다.

루시는 남작님의 생일잔치나, 마을 숲으로 소풍을 가거나, 엄마와 옆 마을 시장에 갈 때 항상 그 모자를 썼다.

그건 루시가 가진 모자 중에 제일 소중한 모자였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모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사교 모임에 오기 전, 저택의 하녀들이 골라 준 드레스로 갈아입었을지언정 모자는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루시는 갑자기 화가 났다.

“이건 말똥 냄새가 아니라, 그냥 흙냄새야.”

루시가 무뚝뚝한 얼굴로 소년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흙이랑 풀, 나무, 농장 냄새 말이야.”

물론 마구간 냄새랑 흙냄새도 구분 못 하는 넌 아무리 설명해 줘도 못 알아듣겠지만.

루시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소년은 루시의 해명에 별 흥미가 없는 듯했다.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다시 팔에 턱을 괴었다.

루시 역시 뚱한 얼굴로 드레스에 묻은 낙엽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 쓰러질 때 땅을 짚느라 손바닥에 묻은 먼지까지 탁탁 털어 냈다.

자리에서 그만 일어나려는데 옆에서 또 시선이 느껴졌다. 소년이 자신의 옆모습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또 왜.”

루시가 냉랭한 말투로 물었다.

이번엔 개똥 냄새가 나니?

그렇게 쏘아붙여 주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네 눈 말이야.”

소년은 생뚱맞게 루시의 눈을 걸고 넘어졌다. 루시가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눈을 치뜨던 찰나 소년이 뜻밖의 소릴 했다.

“에메랄드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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