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5화
브롬에 있는 집들을 모조리 옮겨 놓아도 빈 공간이 남을 것 같은 거대한 광장. 마차 열 대도 거뜬히 지나다닐 것 같은 널찍한 도로. 코너 남작의 저택보다 더 크고 화려한 길거리의 건물들.
그리고 온갖 화려한 옷들을 차려입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마차 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루시의 눈동자가 쉼 없이 움직였다.
마차는 놀란 두 아이와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귀부인을 싣고서 저택을 향해 경쾌하게 달려갔다.
루시와 콜린이 수도를 여행하는 동안 머무르게 된 트리아나 부인의 저택은 코너 남작의 저택보다 배는 큰 규모였다.
부인은 루시와 콜린을 정식 손님으로 대우하며 각자에게 호화스런 손님방을 내주었다.
고향 집만 한 방 크기에 놀라 우두커니 서 있던 것도 잠시, 루시는 신이 나서 고급스럽고 높은 침대 위로 기어올랐다.
안락하고 폭신폭신한 느낌에 감탄하고 있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목욕물이 준비되었는데 지금 씻으시겠어요?”
아, 아가씨?
난생처음 들어 보는 호칭에 루시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대답이 없자 문밖에서 재차 하녀가 물었다.
“아가씨? 안에 계세요?”
“아, 저…….”
루시가 즉시 침대에서 내려와 문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녀가 문을 열고 밖을 빼꼼 내다보았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던 하녀가 루시를 의아하게 내려다보더니 곧 친절한 미소를 보내 왔다.
“지금 씻으시겠어요? 아니면 만찬 후에 다시 목욕물을 준비해 드릴게요.”
세상에! 고작 자신을 위해 목욕물을 두 번 데우는 수고를 기꺼이 하겠다니.
루시는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지, 지금 할게요!”
루시가 얼른 방을 나와 안내해 주는 하녀의 뒤를 따랐다.
놀랍게도 그 하녀를 따라간 곳에는 향유가 부어진 커다란 욕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더 놀랍게도 안내해 준 하녀가 직접 목욕 시중을 들어 주었다.
엄마와 할머니가 아닌 사람이 씻겨 주는 낯선 손길에 어색해하던 것도 잠시, 따뜻한 물속에서 여행에 지쳐 있던 그녀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벽에 달린 은은한 촛불이 그녀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처음 해 보는 여행. 처음 해 보는 경험.
루시는 설렜다. 황궁, 시장, 박물관, 신전. 그 모든 것들을 방문할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이제껏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던, 무언가 엄청난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 * *
그리고 루시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수도 여행 중, 루시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그 일’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그곳은 꼭 가 보고 싶었던 황궁도, 온갖 신기한 물품을 파는 거대한 시장도, 박물관도, 신전도 아니었다.
바로 에버른 후작이라는, 처음 들어 보는 귀족의 저택에서였다.
수도를 방문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던 날, 트리아나 부인은 루시에게 에버른 후작 부인이 주최하는 모임에 함께 갈 것을 제안했다.
그 모임은 나이에 상관없이 여성들의 사교를 위한 모임이라고 했다.
콜린을 떼어 놓고 가야 한다는 점이 미안하긴 했지만 루시는 흔쾌히 부인을 따라나섰다.
사교 모임에 초청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설레기도 하고 떨리기도 했다.
에버른 후작가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렸을 때 루시는 그 장엄한 저택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트리아나 부인의 사치스럽고 화려한 저택과 비교하면 좀 더 차분한 느낌이었지만, 그 거대한 규모가 주는 위압감은 감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사교 모임의 오찬장은 정원에 마련되어 있었다. 향긋한 장미로 장식된 테이블 주변에 먼저 도착한 귀부인들이 우아한 자태로 서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몇몇 테이블에는 귀부인들뿐만 아니라 루시 또래의 여자아이들도 모여 있었다. 그 아이들은 루시를 보자마자 하던 대화를 멈추고 뚫어지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루시는 조금 겁을 먹은 채 트리아나 부인 옆에 꼭 붙어 섰다.
막상 따라오긴 했으나 영 어색했다.
부인 뒤에 숨어서 귀족가의 영애들이 모여 앉아 재잘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루시는 다시 저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와, 수도에 있는 저택은 모두 이렇게 근사한가?
흰 벽돌로 지어진 저택은 이제껏 본 집 중에 제일 아름다웠다.
저택을 황홀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던 루시의 눈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정원 쪽을 향해 난 테라스였다.
그곳에는 눈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유, 유령?
루시가 눈을 크게 떴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여인의 검은 머리칼이 스산한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나풀거렸다.
어두운 밤하늘 같은 머리색과 대비되어 그녀의 피부는 더욱 창백해 보였다.
그 유령 같은 여인은 한참 활력이 넘치는 오찬장에는 관심이 없는 듯,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테라스에 서서 정원 너머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
“부인, 저기 좀 보세요.”
루시가 트리아나 부인의 옷자락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부인이 고개를 돌리자 루시가 손가락으로 테라스를 가리켰다.
“저기 유령이 있어요.”
유령이라는 말에 트리아나 부인뿐만 아니라 주변에 앉아 있던 귀부인들까지 그 테라스를 올려다보았다.
“쉿!”
그중 한 부인이 얼른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모두 그쪽은 쳐다보지 마세요!”
그녀가 주의를 주었다.
“에버른 후작님의 따님이세요. 베르크 공작 부인 말예요!”
그녀의 말에 부인들이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근처에 서 있던 다른 부인이 작게 말했다.
“듣자 하니 공작과 다투고 친정으로 가출해 있다죠?”
“쉿!”
그 귀부인이 또 한 번 주의를 주었다.
“다들 못 본 척해요! 에버른 후작 부인의 눈에 거슬렸다가 좋을 것 하나 없으니.”
그녀가 멀리 상석에 앉아 있는 후작 부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 말에 귀부인들은 들고 있던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큼큼 헛기침을 했다.
아, 유령이 아니었구나.
다들 그 창백한 여인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는 와중에 루시만은 여전히 그녀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테라스의 여인은 오찬장에 모여 있는 레이디들이 자신을 흘끔흘끔 보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는지, 한참이나 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하염없이 흔들리던 그녀는 마침내 어깨를 웅크리며 숄을 여미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걸까?
여인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루시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테라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몰래 그녀에 대해 수군대던 귀부인들은 금세 흥미가 식어 버렸는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루시가 이해하기엔 어렵고 관심도 없는 주제의 대화들이 테이블 위를 오갔다. 또래의 귀족 영애들은 저들끼리만 모여 있는 탓에 루시는 금방 따분해졌다.
다들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이 오찬에 참여하고 있었다. 오직 루시만이 ‘사교 모임’이라는 취지에 맞지 않게 멀뚱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 혼자 똑 떨어진 것 같았다. 도저히 다른 여자아이들에게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트리아나 부인.”
루시가 부인을 조심스레 불렀다.
“정원을 구경해 봐도 될까요?”
다른 귀부인들과의 얘기에 몰두해 있던 부인이 인자하게 웃으며 루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루시. 듣자 하니 넌 꽃에도 관심이 많다지? 널 여기에 데려오고 싶었던 것도 그 때문이란다. 에버른가의 정원은 제국 내에서도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 있거든.”
트리아나 부인이 마치 자신의 정원을 자랑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원은 초대된 손님에게는 항상 공개되어 있단다. 그러니 마음껏 들어가서 구경하렴.”
그 말에 루시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너 남작님의 저택에도 정원이 있긴 했다. 코너 남작 부인의 소박한 취향에 따라 소담한 꽃들과 수수한 모양의 식물들이 가득한 정원이었다.
하지만 에버른가의 정원은 규모부터가 남달라 보였다. 가을 장미가 활짝 핀 울타리 너머로 신비한 빛깔의 화단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트리아나 부인의 허락을 받은 루시는 곧장 정원으로 달려갔다.
오찬장의 활기찬 분위기와 점점 멀어지자, 정원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찾아왔다.
들리는 소리라곤 새의 맑은 울음소리와 어디선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뿜고 있는 분수대 소리뿐이었다.
루시는 자신이 마치 거대한 꽃바구니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정원에는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꽃들도 있었지만, 난생처음 보는 꽃들도 가득했다. 그것들은 베로스 제국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들여온 것인지 생소하고 이국적인 생김새를 뽐내고 있었다.
루시는 꽃들의 아름다운 자태와 알록달록한 색채에 눈이 어지러웠다.
그렇게 꽃에만 정신이 팔려 걷기를 한참.
앞을 가로막는 울타리가 나타나더니 정원도 끝이 났다. 울타리 너머로는 울창한 참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숲 안에는 그 무엇보다도 루시의 눈을 사로잡는 풍경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바로 커다란 호수였다.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호수 가장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의 파도가 천천히 출렁거렸다.
“와, 예쁘다!”
루시는 감탄했다. 사실 정원의 꽃들도 훌륭했지만 루시에겐 이런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마음에 더 와닿았다.
웃음을 띤 채 울타리를 넘어 호수로 다가가던 루시가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호숫가에는 이미 누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