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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4화 (34/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4화

“루시, 벌써부터 네 신랑 점심을 챙기는 거니?”

하녀 리사 아줌마가 빨래 바구니를 들고나오며 던진 말에 루시는 기겁을 했다.

“그런 말 마세요, 아줌마! 콜린은 영주님네 아들이고 전 약방집 딸이라고요! 영주님이 들으면 싫어하실지도 몰라요!”

“쪼끄만 게 별걱정을 다 하네!”

톰 영감처럼 리사 아줌마 역시 푸흐흐,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영주님이 널 며느릿감으로 점찍었다는 걸 이 마을에 모르는 사람이 어딨니?”

세상에!

루시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그 자리를 후다닥 벗어났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어떻게 내가 콜린이랑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

루시는 연신 ‘말도 안 돼.’ 하고 중얼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최근에 코너 남작이 자신을 보며 유독 상냥하게 웃어 주던 모습을 떠올리자, 루시는 정말로 그가 자신을 콜린의 짝으로 점찍어 두었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콜린이랑은 절대 결혼하고 싶지 않아!

루시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콜린은 그녀와 동갑이었지만 키는 한 뼘이나 더 작았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 온 터라 못 볼 꼴까지 다 본 남동생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인상을 찌푸리는 그녀의 머릿속에 저절로 한 광경이 펼쳐졌다.

……먼 훗날, 어른이 된 루시. 작고 귀여운 신혼집의 부엌에서 남편을 위한 요리를 하고 있다. 그때 살금살금 뒤로 다가와 그녀를 껴안는 사람이…….

콜린이다?

으으!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건 마치 지금 들고 있는 닭구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바닥에서 춤을 추며 돌아다니는 광경을 목격한 것만큼이나 괴상한 느낌이었다.

콜린은 절대 안 돼!

그녀가 결연한 얼굴로 못을 땅땅 박았다.

그래, 차라리 대장간의 한스 오빠가 낫지. 콜린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가끔 우리 집 울타리도 고쳐 주고, 또 나한테 인사도 잘해 주니까.

루시는 마을 대장간의 장남 한스를 떠올렸다. 이제 열네 살이 된 그는 또래보다 키도 컸고 몸가짐도 제법 의젓했다.

아무튼 엄마한테도 미리 귀띔해 둬야겠어. 남작님이 날 데려가고 싶다고 말해도 절대 안 된다고 말하라고!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루시!”

때마침 콜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닭 냄새는 귀신같이 맡는다니까.

그녀가 저택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발견한 콜린이 밖으로 달려 나오고 있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콜린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루시가 그릇을 내밀며 먼저 말했다.

“자, 할머니가 전해 주라 하셨어. 주방에 갖다줘. 난 이만 갈게.”

콜린과 같이 있는 모습을 누가 볼 새라, 루시는 얼른 그에게 그릇을 전해 주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콜린은 어쩐 일인지 닭구이는 안중에도 없다는 얼굴로 루시의 팔을 붙잡았다.

“왜, 왜 이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콜린이 요란법석을 떨며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녀는 하마터면 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지금 여기에 누가 와 있는 줄 알아?”

콜린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더니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정답을 외쳤다.

“트리아나 대고모님이 와 계신다고! 나에게 베델 구경을 시켜 주시겠대!”

“뭐어?”

베델이라는 말에 루시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수도 말이야, 수도! 황제 폐하가 사는 곳!”

콜린은 너무 신이 난 나머지 루시를 붙든 채로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 때문에 그릇 위에서 닭구이도 통통 튀어 올랐다.

루시는 아슬아슬하게 그릇 위에 걸쳐져 있는 닭구이를 눈치도 못 채고 입술만 헤 벌렸다.

베델, 베로스 제국의 수도.

평생 고향을 떠나 본 적이 없는 루시에겐 요정 세상만큼이나 멀고 아득하게 느껴지는 곳.

그곳에 대해서는 아빠에게 몇 번 얘기로만 들어 보았다. 마차를 타고 서쪽으로 열흘이나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먼 곳이라고.

으리으리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밤에도 사람들이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곳.

“베델에 가면 황궁부터 구경할 거야! 베델 광장도 가 보고! 시장도 구경하고! 여기 시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신기한 물건들이 잔뜩 있을 거야!”

“우와!”

콜린이 폭포수처럼 쏟아 내는 말에 루시가 입을 떡 벌리며 감탄했다. 방금 전까지도 새초롬하던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부러움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좋겠다……. 나도 가 보고 싶어!”

“무슨 소리야! 당연히 너도 같이 가야지!”

그녀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린 말에 콜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외쳤다.

“정말?”

루시의 눈은 콜린보다 더 커졌다.

“내가 따라가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너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아버지께서 대고모님께 부탁까지 하셨단 말이야!”

그 말에 루시는 멈칫했다.

영주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니 루시의 눈이 가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의도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따라갔다가 정말로 콜린과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루시가 꽤 심각해진 얼굴로 고민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베델의 휘황찬란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억누를 수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수도에 가 볼 수 있을지 모르는 것 아닌가.

시골 소녀에게 여행이란 흔치 않은 기회였다. 그러니 기회가 찾아왔을 때 놓치지 말고 잡아야 했다.

“자, 어서! 너도 대고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자!”

콜린이 루시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끌려가는 척하며 순순히 뒤를 따라갔다.

심장이 마구 두근댔다. 이 갑작스런 여행 제안이 그녀에게 얼마나 놀랍고 설레었던지, 손에 들린 할머니의 닭구이는 이미 관심 밖으로 밀려났을 정도였다.

* * *

콜린의 대고모인 트리아나 부인은 시원스럽고 호탕한 사람이었다. 여유가 넘치는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는 콜린을 따라 우물쭈물 응접실로 들어선 루시를 보자마자 호쾌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오호! 네가 그 의사의 딸이구나! 10년 전 방문 때 내가 배탈이 났었는데 그 양반이 순식간에 고쳐 줬었지!”

그녀가 루시를 끌어당겨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부인의 호방한 기운에 기가 눌린 루시는 어깨를 움츠린 채 긴장한 얼굴로 정면만 바라보았다.

“그래, 너 수도에 가 본 적은 있느냐?”

부인의 물음에 루시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콜린과 루시는 아직 한 번도 브롬을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고모님.”

트리아나 부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코너 남작이 말했다.

“한 번도? 저런!”

부인이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물론 브롬은 좋은 곳이긴 하지. 공기도 맑고 인심도 좋고. 누가 이곳을 전쟁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하겠느냐?”

브롬은 50여 년 전, 전전대 황제 밀리오스가 동쪽 국경을 정비하기 전까지만 해도, 옆 나라인 로잔 왕국과 영토 분쟁을 일삼던 지역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전쟁의 흔적은 늙은이들의 아득한 기억 저편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트리아나 부인은 창밖으로 보이는 평화롭고 잔잔한 풍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이런 마을에서 태어나 자랄 수 있는 것도 큰 복이지. 하지만 한 번쯤은 더 큰 세상으로 나가 인생을 경험해 봐야 한단다. 시골 소녀도 예외는 아니야.”

그녀가 루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강인한 인상 속에서도 자상한 빛을 띤 그녀의 눈동자가 루시를 바라보았다.

“여행은 삶에 아주 중요한 거야!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기도 해.”

더 큰 세상……. 여행…….

루시는 눈을 반짝 빛내며 부인의 말을 되뇌었다. 여행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트리아나 부인은 성격만큼이나 결정도 신속하고 시원시원했다. 브롬을 방문하는 것으로 동부 여행의 마침표를 찍은 그녀는 수도로 돌아가는 날 콜린과 루시도 함께 데려가 주겠노라고 말했다.

그 엄청난 소식을 들은 루시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예의 바르게 부인에게 인사한 후, 응접실을 나왔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잽싸게 집으로 달려갔다.

“할머니! 엄마! 아빠!”

루시가 문을 홱 열어젖히며 가족들을 찾았다. 어서 이 굉장한 소식을 모두에게 알려야만 했다.

트리아나 부인이 루시를 수도에 데려가 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와 아빠는 함께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그거 굉장하구나! 나도 수도에는 가 본 적이 없는데.”

아빠는 루시만큼이나 설레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금방 걱정스런 얼굴이 되었다.

“글쎄요. 루시는 아직 열 살인데요. 그렇게 멀리 보내기가 좀…….”

하지만 선뜻 승낙을 내리기 어려워하던 그녀도 트리아나 부인의 여행용 마차를 보자마자 생각을 고쳐먹은 듯했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그 사륜마차는 이 일대에서는 볼 수 없는 최고급으로, 내부도 상당히 널찍했다. 게다가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까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난 뒤, 루시의 엄마는 한결 안심하는 표정으로 여행을 허락했다.

며칠 후, 루시는 작은 짐 가방을 들고 그 거대한 마차에 올랐다. 옆에는 콜린도 함께였다. 창문 밖으로 할머니와 엄마, 아빠, 그리고 코너 남작 부부가 서서 마차 안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신난 얼굴로 방정맞게 손을 흔드는 콜린과는 달리 루시는 어색한 얼굴로 뻣뻣하게 앉아 손을 들어 보였다.

처음 해 보는 여행이 몹시 긴장되고 설레었다.

* * *

트리아나 부인의 마차는 굉장히 크고, 의자도 푹신했다. 하지만 먼 여행길에 몸이 고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는 여전히 설레고 즐거웠다. 비록 몸은 힘들지언정 창밖으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풍경들이 끊임없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들을 미리 봐 버려서 막상 수도에 도착했을 때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브롬을 떠난 지 열흘째 되던 날.

드디어 베델에 도착한 루시는 그 웅장하고 휘황찬란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나 대단한 모습이었냐면, 어쩐지 콜린이 조용하다 싶어 옆을 돌아보니 그 역시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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