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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3화 (33/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3화

마음을 정한 필릭스가 단숨에 여학생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마음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여학생 기숙사 사감인 플로라 부인이 경악스런 얼굴로 그의 앞을 막아서고 나섰다.

“남자가 어딜 기어들어 와! 내 허락 없인 교장도 못 들어와!”

가끔 여학생들에게 남학생 기숙사 출입 허가증을 써 주는 로렌 사감과는 달리, 그녀는 엄격하고 단호했다.

플로라 사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기숙사 안에 있던 여학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는 수 없이 필릭스는 여학생 기숙사 앞에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남학생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일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당사자는 바로 자신이었다.

혼자 좋아하고, 멋대로 오해하고, 유치하게 행동하고.

루시가 자신에게 질려서 일부러 피하는 것이라 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라도 그럴 것 같았다.

정말로 나 같은 인간은…….

기숙사로 돌아온 필릭스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기숙사 앞 화단을 바라보았다.

“루시!”

화단에 심어진 관상목 옆에 루시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앉아 있었다. 필릭스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릭스 선배.”

어둑한 가을 저녁 속에서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필릭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루시가 갑자기 뒤로 물러섰다. 낯선 그녀의 행동에 필릭스도 발걸음을 멈췄다.

루시는 말없이 제자리에 서서 필릭스를 바라보았다.

이전처럼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거나 반가운 목소리로 ‘선배!’ 하며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순간 필릭스는 그녀를 처음 알게 되었던 때가 생각났다. 자신을 보기만 하면 도망가고 피하기 바쁘던 그때.

……아니, 그것도 틀렸다.

어쩐지 그때보다 그녀와 더 멀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그녀의 표정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잠시 머뭇대던 루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배. 선배가 왜 화가 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루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선배의 기분과는 별개로, 전 요 몇 주 동안 선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어요. 함께 타운에 나갔던 것도, 함께 공부했던 시간도요.”

그녀의 말에 필릭스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만 끔뻑였다. 그녀의 말이 너무나 뜻밖의 것이라 바로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행복해서 그 시간들이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어요. 물론 살면서 행복을 느낀 순간은 많지만…… 그런 식으로 행복했던 건 처음이에요. 앞으로도 그런 감정은 느껴 보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런데 너무 제 행복한 것만 생각한 나머지 선배의 입장을 미처 배려하지 못했어요.”

어느새 루시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그 순간의 루시는 마치 유령 같았다. 분명 그의 눈앞에 서 있지만 한 줄기 불어온 바람에도 금방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유령.

“선배 말이 맞아요. 더 이상 함께 공부를 한다거나 같이 있는 건 제 욕심인 거 같아요.”

“루시.”

필릭스의 숨이 거칠어졌다.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루시는 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명백한 거절의 몸짓에 필릭스의 손이 공중에서 허무하게 떨어졌다.

루시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그마한 상자였다. 그녀가 그것을 필릭스에게 내밀었다.

“이건 원래 선배 생일 때 주려고 했던 거지만…… 지금 드릴게요. 그때 못 볼 것 같으니까.”

필릭스가 멍하니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루시가 발걸음을 옮겨 그의 앞을 떠나려고 했다.

“루시, 잠깐만!”

필릭스가 다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루시가 그를 돌아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필릭스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녀의 손목이 필릭스의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를 그 자리에 내버려 둔 채 루시는 성큼성큼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필릭스는 그녀가 사라지고 없는 자리만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꿈을 꾼 것 같았다.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는 말도, 이제 볼 일 없을 것 같단 말도, 모두 꿈속에서 들은 것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왜…….”

왜 이렇게 된 거지.

그가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넋이 나간 채로 서 있는 와중에 손안에 쥐어진 작은 상자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가 망연히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하.”

상자 안의 목걸이를 보고 필릭스가 깊은 숨을 토해 냈다. 깊은 후회감이 몰려왔다.

그가 목걸이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조그마한 크리스털 속에서 그의 별자리가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8년 전. 루시는 자신이 훗날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 열 살이던 그녀에겐 오직 고향 마을 브롬만이 그녀가 알고 있는 세상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제국 동쪽 변방에 위치한 그 마을은 아담한 산들이 부드러운 능선을 그리고 있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었다.

밭과 들에는 싱그러운 초록빛 물결이 바람을 따라 출렁거렸다. 푸른 하늘에선 밝은 태양이 연일 햇살을 흩뿌렸다.

흙길 위로 닭과 개, 아이들이 한데 뒤엉켜 뛰어다니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비록 고향 밖으로 나가 본 적은 없지만, 루시는 그 소박하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나름대로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루시에게는 유수한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꿈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할머니의 약방을 물려받는 것이었다.

루시의 할머니는 마을에서 단 하나뿐인 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오십여 년 전, 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그녀가 갓난쟁이였던 루시의 아빠를 등에 업고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차린 약방이었다.

그녀는 약초를 다루는 법에 대한 독보적인 지식과 특유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녀의 허름하고 작은 약방은 수십 년이 지나는 세월 동안 같은 자리를 굳건히 지켜 올 수 있었다.

할머니는 약방을 운영해 번 돈으로 하나뿐인 아들을 열심히 공부시켰다. 덕분에 루시의 아버지는 가까운 도시의 의원에서 의술을 배울 수 있었다.

이제 이십 년 경력의 의사가 된 그는 브롬의 유일한 의사이자 영주님의 주치의로서 마을 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시골 출신 평민으로서는 꽤나 번듯한 출세임이 틀림없었다.

전쟁 통의 과부였던 루시의 할머니는 반백 년 만에 집안을 훌륭히 일으켰다.

그 시절은 루시가 겪어 보지 못한 까마득한 옛날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대단한 길이었는지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안락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매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것도 모두 할머니 덕분이었다.

루시의 눈에 할머니는 그 어떤 사람보다 생활력이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었다.

영웅담 같은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언젠가 자신도 그 약방을 물려받아 훌륭하게 꾸려 나가야겠다는 의지가 마구 샘솟았다.

할머니 손은 마치 마법의 손 같다니까.

루시는 할머니의 자글자글하고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그리곤 자신의 작고 흰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이 손에도 그런 능력이 깃들 수 있을까?

약초를 다루는 솜씨 말고도, 루시가 할머니에게 물려받고 싶은 능력이 또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바로…….

“루시! 음식이 다 식겠구나, 어서 오너라!”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할머니의 요리 솜씨였다.

마당에 불쑥 나타난 들고양이를 열심히 쫓고 있던 루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단박에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식탁 위에는 기름이 지글거리는 커다란 닭구이가 올려져 있었다. 그 유혹적인 냄새에 루시는 저도 모르게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대고 킁킁거렸다.

입에 고이는 침을 참을 수 없었던 루시가 냉큼 의자에 올라앉은 뒤 닭구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

할머니가 얼른 그녀의 손을 막았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루시에게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먹을 건 따로 있고, 이건 영주님 댁에 드릴 닭이란다. 식기 전에 어서 가져다드리려무나.”

그 말에 루시가 입을 삐죽 내밀며 미간을 찡그렸다. 최근 그녀는 이런 심부름이 정말로 달갑지 않았다.

일부러 콜린을 보러 가지 않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녀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자, 루시. 어서.”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닭구이가 담긴 그릇을 내밀며 재촉했다. 하는 수 없이 루시는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릇을 받아든 뒤 집을 나섰다.

그녀가 이토록 영주님의 저택에 가기 싫어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영주님네 사용인들이 그녀를 볼 때마다 시답잖은 농담을 던져 댔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닭구이를 들고 영주님의 저택으로 들어서는 루시를 보고 마구간지기 영감 톰이 냉큼 장난 겸 인사를 보내 왔다.

“우리 꼬마 마님께서 오시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루시가 대번에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앙칼진 항의에도 영감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껄껄 웃으며 지나쳐 갔다. 그 얄궂은 뒷모습을 루시가 못마땅한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언젠가부터 이 마을 어른들은 루시가 영주님의 며느리가 될 것이라고 제멋대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루시와 영주의 아들인 콜린의 약혼이 확정되기라도 한 것처럼 짓궂은 농담을 던져 대는 것이었다.

루시로선 참 난감한 일이었다. 아무리 영주님 마음씨가 좋고 콜린과는 어릴 적부터 무람없이 자랐다지만, 이 세상엔 엄연히 신분 차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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