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2화
결국 루시를 만나지 못한 채 필릭스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시간은 어느덧 저녁이 되어 하늘 한구석이 노을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필릭스는 참담한 기분으로 붉게 물든 기숙사 계단을 터덜터덜 올라갔다.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선 그가 문에 이마를 쿵 기대고 섰다.
이대로 날 계속 피하는 건 아니겠지.
불안감이 커져 갔다.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소파에 앉아 있던 아드리안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필릭스가 발을 우뚝 멈췄다.
“왜 네가 여기 있어?”
필릭스의 황당한 얼굴을 보며 노엘이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오셨어요, 선배.”
마치 필릭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가 여상한 말투로 인사해 왔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흰 피부까지, 얼굴은 여전히 곱상했지만 어쩐지 평소의 발랄하고 애교스러운 분위기는 조금도 없이 차분해 보였다.
대화가 이어지기 전, 필릭스는 아드리안과 노엘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인물 하나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던 그 사람이 쭈뼛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필릭스에게로 돌아섰다.
“너!”
필릭스가 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눈을 가린 긴 앞머리, 잔뜩 움츠린 어깨. 분명 루시를 몰래 뒤쫓아 가던 그 수상한 남학생이었다.
“넌 뭐야!”
필릭스가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려던 찰나 아드리안이 황급히 그를 저지하고 나섰다.
“필릭스.”
“잠깐만요, 필릭스 선배!”
노엘도 재빨리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쟤가 왜 여기 있어? 넌 또 왜 여기 있고?”
필릭스가 아드리안과 노엘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필릭스의 사나운 기세에 남학생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소파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일단 진정하고 앉아 봐.”
“진정은 무슨 진정! 저놈 루시 스토커라고.”
“스토커?”
아드리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에릭은 너한테 사과를 하러 온 거야.”
“사과?”
뜻밖의 말에 필릭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드리안이 그를 소파에 앉히며 설명했다.
“2학년의 에릭 로먼이야.”
아드리안이 남학생을 턱짓하며 가리켰다.
“연무장에서 네 교복 가져간 사람.”
필릭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엘의 등 뒤에 숨어 있다시피 앉아 있던 에릭 로먼은 흠칫 몸을 떨며 움츠렸다. 필릭스를 보고 화들짝 놀라 도망갈 때처럼 안색도 창백했다.
“앉으라니까.”
당장이라도 달려들 태세의 필릭스를 아드리안이 끌어당겨 앉혔다. 아드리안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잘 해결해 보려는 사람처럼 필릭스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우선 네 교복은 멀쩡해. 자, 여기.”
그가 옆에 놓아두었던 교복을 집어 필릭스에게 건넸다.
“옷장에 차고 넘치는 게 교복인데 이게 왜 그렇게 너한테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필릭스는 아드리안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체 만 체하며 교복을 냉큼 받아들었다. 그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알레르기 약부터 찾았다. 손끝에서 작고 동그란 통이 만져졌다.
약은 무사히 거기에 있었다.
필릭스가 안도하는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죄, 죄송합니다, 필릭스 선배님……!”
별안간 에릭 로먼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두 손을 모으더니 싹싹 빌며 머리를 숙였다.
“누, 누가 수석의 교복을 입고 시험을 치면 만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래서…… 아드리안 선배님의 교복인 줄 알고 가져간 거예요……. 잘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알레르기 약이 사라져 한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필릭스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미 짐작했었던 그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실제로 들으니 온몸에 힘이 빠지는 듯했다.
“……그렇다고 씻고 있는 사람의 옷을 훔쳐?”
“에릭 형도 많이 후회하고 있어요.”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노엘이 끼어들었다.
“나중에 그 교복이 아드리안 선배 것이 아니라 필릭스 선배 것이라는 걸 알고는 몹시 우울해했어요.”
그가 필릭스에게만 보이게끔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조용히 말했다.
“선배가 학년 꼴찌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더니 아주 사색이 되더라고요.”
“이 새끼가.”
필릭스가 노엘의 멱살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노엘은 잽싸게 피해 버렸다. 그가 아드리안의 등 뒤에 숨어 필릭스를 빼꼼히 쳐다보았다.
“넌 아까부터 왜 여기 있는 건데. 너도 내 물건 훔쳤냐?”
“그게 아니라…….”
노엘이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에릭은 제 형이에요.”
“형?”
“네. 친형이요. 안 닮았죠?”
필릭스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노엘과 에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노엘의 말마따나 그가 저 남학생과 친형제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둘의 외모는 달랐다. 노엘은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에 예쁘장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에릭은 좀 더 짙은 색깔의 직모에 별로 인상 깊지 않은 평범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아도 닮은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두 사람이었다.
“……그 교실에서 선배가 교복을 도둑맞았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을 때, 에릭 형이 한 짓이라는 걸 딱 알아차렸어요. 이 아카데미에 성적 때문에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사람은 멍청한 우리 형밖에 없을 테니까요.”
노엘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곧장 형을 추궁했더니 사실대로 말하더라고요. 베르크 선배님의 교복을 훔친 게 맞다고.”
노엘은 이 얘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듯 턱을 매만지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에릭 형은 아카데미 입학 후로 줄곧 2학년 차석을 해 왔어요. 그런데 부모님은 형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만족을 못 하셨죠. 2등이 아닌 1등을 원하셨어요. 하지만 2학년 수석은 누군지 선배도 이미 알잖아요.”
노엘이 필릭스를 보며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루시 선배요. 형은 아무리 노력해도 루시 선배를 이길 수 없어 마음이 초조해졌나 봐요. 그래서 부담감에 그만…….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저는 형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형을 설득해 선배님께 돌려주라고 말했죠.”
“그런데 이제야 찾아온 이유는?”
“그게, 곧장 형을 데려와 사과를 시키고 싶었습니다만…… 선배님이 훔쳐 간 사람을 찾으면 손목을 으스러뜨리겠다고 해서…….”
노엘의 말에 무릎을 꿇은 채로 떨고 있던 에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으아아’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냅다 바닥에 머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가 연신 빌며 사과했다.
“그 말을 들으니 도무지 용기가 안 나서……. 제발 제 손목을 으스러뜨리지 마세요…….”
심지어 에릭은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하아…….”
지끈거려 오는 머리에 필릭스가 이마를 짚었다.
정말 이런 놈이 학년 차석이라고?
어떻게 이런 정신머리로 루시와 경쟁할 생각을 했는지 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어제 노엘이 날 먼저 찾아왔어.”
아드리안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에릭을 일으켜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
“네 교복을 보여 주면서 사실을 말해 주더라. 그리고 너한테 용서를 구하고 싶은데 화가 많이 난 것 같으니 도와 달라고 해서 여기로 부른 거야.”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히는 이야기였다. 필릭스는 맞은편에 앉은 두 형제를 한심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살살 필릭스의 눈치를 살피던 노엘이 이때다 싶었는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아무튼 선배님, 저희 형이 민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루시 선배에게도 그렇고, 필릭스 선배에게도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노엘이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에릭을 잡아 일으키더니 고개를 숙이도록 했다.
그러나 필릭스는 노엘의 말에 갑자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루시?”
그가 한쪽 눈썹을 치뜨며 물었다.
“루시는 또 왜?”
“……선배도 그때 들으셨잖아요. 루시 선배가 가방에 넣어 두었던 물건이 사라졌다고.”
“그래서?”
“그것도 에릭 형이 가져간 거였어요. 아까 아드리안 선배와 함께 가서 돌려주었고요.”
“……없어진 게 뭐였는데?”
“목걸이요.”
“목걸이? 무슨 목걸이?”
“그냥 크리스털 목걸이요.”
“어떤 크리스털?”
계속해서 추궁하듯이 묻는 필릭스가 이상한 듯 아드리안이 끼어들었다.
“그냥 흔한 크리스털 목걸이야. 어젯밤에 네가 내 침대에서 본 거 있잖아.”
아드리안의 말에 필릭스가 멍한 얼굴이 되더니 물었다.
“그거…… 네가 루시한테 선물받은 거 아니었어?”
“뭐? ……아니? 난 그냥 노엘에게 받아서 잠시 맡아 놓고 있던 것뿐인데.”
아드리안이 설명했다. 대화를 듣고 있던 노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엥?”
그가 필릭스에게 다가와 가만히 속삭였다.
“필릭스 선배, 그거 선배가 받을 거 아니었어요?”
“무슨 소리야?”
“루시 선배가 분명 생일 선물용으로 산 거랬는데……. 선배 10월생 아니에요? 성검자리.”
“그래서?”
필릭스의 대꾸에 노엘이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와……. 선배도 보통 눈치가 없는 게 아니시네요.”
“그게 무슨…….”
노엘에게 짜증을 내려던 필릭스의 표정이 순간 묘해졌다. 그가 무언가를 떠올리듯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지난 며칠. 그리고 루시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
“어……?”
필릭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뒤이어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드리안과 노엘, 에릭을 방에 남겨 두고 필릭스는 곧장 방을 나섰다.
“어디 가!”
아드리안의 황당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해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컴컴한 저녁 하늘 아래 풀벌레 소리만이 요란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기숙사를 나온 그가 머리를 감싸 쥔 채 고민했다.
여학생 기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