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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1화 (31/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1화

이대로 계속 저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괴로울 뿐이었다.

잠시 뒤, 필릭스가 펼쳐 놓았던 책을 주섬주섬 가방에 집어넣었다. 짐을 모두 챙긴 그가 최대한 둘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도서 반납대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누군가 지나가는 기척을 느낀 루시가 그를 돌아보았다.

“저…….”

루시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필릭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빠르게 도서관을 벗어나는 필릭스의 발걸음은 다급하기만 했다. 그는 도서관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듯 보였다.

루시와 아드리안의 다정한 모습으로부터.

아니, 그 둘을 보며 질투심밖에 느끼지 못하는 자신의 한심한 마음으로부터.

애초에 루시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것은 자신이었다.

먼저 그녀를 의식하며 문학의 밤에 갔던 것도, 그녀에게 함께 타운에 가자고 했던 것도, 시험공부를 같이하자고 했던 것도.

모두 자신이 먼저였다.

그러니 루시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녀에게 서운해하거나 아드리안에게 심술을 부릴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야.”

그가 머리를 헤집으며 중얼거렸다.

더 이상 구질구질해지지 말자.

“선배!”

순간 누가 그의 옷자락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필릭스가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루시가 그의 옷자락을 잡은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루시.”

헐레벌떡 필릭스의 뒤를 쫓아온 그녀가 숨을 고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

서둘러 쫓아온 것과는 다르게 루시는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런 루시를 바라보는 필릭스의 눈이 순간 희망으로 반짝였다.

아드리안과 루시의 다정한 모습 앞에서 도망친 것도 잠시, 막상 자신을 따라 나온 그녀를 보자 억누를 수 없는 욕심과 기대감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어서 말해 줘.

아드리안은 신경 쓰지 말라고. 사실 아드리안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루시의 입에서 절대 나오지 않을 말이란 것을 알면서도, 필릭스는 애타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말을 할까 말까 입술만 달싹거리던 루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혹시 책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몇 권 찾아 놓은 게 있거든요.”

“……아.”

그녀의 말에 필릭스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무엇을 기대했던가.

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그가 대답했다.

“네가 저번에 준 것도 아직 다 못 봤으니까.”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해 줄 리가 없지.

체념한 표정으로 돌아서려는 그를 루시가 한 번 더 붙잡았다.

“선배, 다음 주에 그 교실에 오실 거죠?”

그렇게 묻는 얼굴엔 조바심이 가득했다. 그의 옷자락을 거머쥔 손이 잘게 떨리는 듯도 했다.

덩달아 필릭스의 얼굴에도 슬픔이 떠올랐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왜 그런 표정으로 날 신경 써 주는 척하는 거야.

정말로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닌 아드리안이면서.

필릭스의 심사가 괴상하게 뒤틀렸다.

어린애처럼 그녀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자신이 받은 상처만큼 그녀 또한 상처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고개를 쳐들었다.

자신에게 이런 유치한 면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새도 없이, 필릭스는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미안해. 시험 준비는 그냥 나 혼자 할게.”

“네?”

루시의 얼굴이 당혹스러움과 실망감으로 일그러졌다.

“갑자기 왜…….”

허망한 얼굴로 묻던 그녀의 말은 어디선가 왁자지껄 떠들며 가까워지는 말소리에 묻혀 버렸다.

가까운 건물에서 나온 한 무리의 3학년들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남학생이 필릭스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아드리안! 도서관에 간다더니?”

“필릭스일걸?”

무리 중의 누군가가 끼어들며 말했다. 3학년 여학생 클레어 헤밀턴이었다.

그녀가 묘한 웃음을 머금고 필릭스와 함께 서 있는 루시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때 그 후배네?”

클레어가 주말에 정원에서 마주쳤던 일을 기억한 듯 말했다.

그녀의 말에 다른 학생들까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루시를 흘끔댔다.

갑작스럽게 관심이 집중되자 루시가 시선들을 피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어쩔 줄 모르는 얼굴에서 곤혹스러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필릭스가 루시를 뒤로 숨기듯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가 학생들의 관심을 돌리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클레어가 먼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요즘 자주 같이 있네. 둘이 굉장히 친한가 봐.”

루시를 흘끔대는 시선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다. 개중 몇몇 학생들은 저들끼리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 눈빛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필릭스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루시에게 있어 좋은 말들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저 후배가 왜?”

그중 한 남학생이 다른 학생들의 표정을 살피다가 물었다. 그러더니 곧 알쏭달쏭한 얼굴로 필릭스에게 대놓고 질문을 던졌다.

“뭐야, 쟤랑 사귀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필릭스의 입에서 즉각 대답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불필요한 관심이나 헛소문으로 인한 불상사로부터 루시를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루시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과민한 반응이었다는 걸, 필릭스는 말을 내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뒤,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도서부 앤데 나를 아드리안으로 착각하고 따라온 거야.”

필릭스의 해명에 질+문을 던진 남학생이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네가 저런 수준도 안 맞는 애랑 만날 리가 없지.”

남학생이 비웃음을 머금은 어조로 신랄하게 내뱉었다.

뭐?

필릭스는 머리를 세차게 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바로 뒤에서 숨을 훅 들이키는 루시의 짧은 숨소리가 느껴졌다.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루시가 어떤 기분일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생각하자 머리가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필릭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갔다. 그 남학생의 모욕적인 말이 결코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분노가 한 박자 늦게 그를 찾아왔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미처 그 남학생의 멱살을 틀어쥐기도 전에, 옆에서 작은 바람이 쌩하니 지나갔다. 필릭스의 뒤에 서 있던 루시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와 다른 학생들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루시!”

필릭스가 다른 학생들을 밀치며 그 뒤를 쫓아가려 했다.

“따라오지 말아 주세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뱉은 루시의 선득한 말이 필릭스의 귓가를 스쳤다. 그가 더 쫓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선 것은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에서 비참함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야, 필릭스!”

누군가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방금 전의 그 남학생이었다. 그는 여전히 멀어져 가는 루시에 대한 비웃음을 머금은 채로 필릭스를 만류했다.

“너답지 않게 뭘 그렇게까지 하냐. 어차피 너한테 접근하는 저런 여자애들 다…… 컥!”

그는 말을 다 끝맺지 못한 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필릭스가 그의 얼굴을 향해 날린 주먹을 거두며 몸을 바로 세웠다.

갑작스런 주먹질에 다른 학생들이 헉,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모두 놀란 눈치였다.

이제껏 필릭스가 무언가에 흥분하여 누군가를 때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정말로 저 여자애랑 뭐가 있나.

그런 눈빛들이었다.

“필릭스……!”

얻어맞은 남학생이 코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으며 필릭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자신을 노려보는 그의 서늘한 표정에 남학생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겨우 한 대 때리는 것으로 흥분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남학생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릴 것 같던 필릭스를 멈추게 만든 것은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광경이었다.

선배…….

아버지 옆에 창백한 얼굴로 서 있던 꿈속의 루시.

그 모습이 떠오르자 필릭스의 등줄기에 저절로 소름이 돋았다. 이 이상 소란을 피우는 건 무엇보다도 루시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학생들 틈을 헤치며 자리를 벗어났다. 루시가 걸어간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버린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얘기해야 돼.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필릭스의 걸음이 빨라졌다. 순식간에 도서관 앞에 도착한 그가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반납대로 성큼성큼 다가간 필릭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루시는 보이지 않았다. 아드리안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반납대에 손을 짚은 채 상체를 안쪽으로 기울였다.

거기에도 없었다. 처음 보는 도서 부원 한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루시는?”

필릭스가 성큼성큼 다가가 묻자, 도서 부원이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방금 교대하고 아드리안 선배랑 같이 나갔는데요…….”

아드리안과.

필릭스는 도서 부원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도서관 밖으로 뛰쳐나왔다.

루시를 찾기 위해 그는 아카데미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교실과 복도, 식당, 정원까지.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게서 꽁꽁 숨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극심한 허탈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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