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30화
필릭스는 책을 꽂아 넣던 동작을 우뚝 멈췄다. 예기치 못한 동생의 등장에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차츰 사라져 갔다.
“……책 정리하는데?”
곧 정신을 차린 필릭스가 대답했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왜?”
표정에는 더욱 짙은 황당함이 떠올라 있었다. 그의 형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도서부 일을 도와준답시고 나선 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곧 아드리안이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부유하는 먼지들 사이로 걸어오는 그는 마치 필릭스의 행복한 시간을 망가뜨리러 온 악마처럼 보였다.
가까이 와 선 아드리안이 속삭이듯 물었다.
“너 무슨 사고 쳤어?”
“아니?”
“근데 왜 갑자기 날 도와주는 건데?”
“너 도와주는 거 아닌데.”
“그럼 이유도 없이 여기서 책 정리를 하고 있었다고?”
아드리안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필릭스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책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더더욱.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럼.”
그가 몸을 돌리더니 근처에 있던 루시에게로 다가갔다.
“루시, 여긴 필릭스가 굳이 도와준다고 하니 맡겨 두고 가자.”
아드리안이 루시가 들고 있던 책을 빼앗더니 필릭스가 안고 있던 책 더미 위에 툭 올려놓았다.
“그럼 부탁해.”
“잠깐만, 너도 여기 있으려고?”
필릭스가 물었다.
그는 아드리안이 그냥 가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을 무참히 깨 버리며 아드리안이 대답했다.
“오늘은 사람도 많잖아? 루시 혼자서 감당하기엔 힘들 테니 내가 도와줘야지.”
그가 필릭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뒤 덧붙였다.
“아무튼 너까지 도와준다니 고맙다. 근데 책 엉뚱한 데 꽂지 마. 나중에 다시 찾으려면 골치 아프니까.”
말을 끝낸 아드리안이 몸을 돌렸다.
“가자, 루시.”
그는 루시를 데리고 통로를 떠나려 했다. 아드리안의 손에 떠밀려 책장 너머로 사라지기 전, 루시의 시선이 잠깐 필릭스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이내 필릭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졸지에 혼자 남아 반납 도서를 정리하게 생긴 필릭스는 루시와 동생이 사라진 곳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우두커니 선 그의 앞에는 아직 절반도 정리하지 못한 책들이 수레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목걸이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찾아왔건만, 오히려 루시와 아드리안이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준 꼴이 되고 말았다.
이게 아닌데.
꼬여 버린 상황에 마음 같아선 산더미처럼 남은 책들을 그냥 버려 두고 가고 싶었다. 필릭스는 짜증이 난 얼굴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그러나 자신이 하지 않으면 모두 루시의 일이 될 터였다. 그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책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수레 위의 책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아간 것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책장 사이를 빠져나오자 반납대에 나란히 앉아 있는 루시와 아드리안이 보였다.
둘은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상의하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맞닿은 어깨와 서로를 향한 눈빛이 무척 다정해 보였다.
앙다문 필릭스의 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다 했어?”
필릭스를 발견한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어.”
“고마워. 이제 우리가 알아서 할게. 너도 바쁠 텐데 더 안 도와줘도 돼.”
그만 가 보라는 뜻이 명백한 말이었다. 필릭스가 언짢은 기색을 꾹꾹 눌러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마음속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그가 주저 없이 그들이 앉아 있던 반납대 안으로 돌아 들어갔다. 갑자기 난입하는 그를 루시와 아드리안이 놀란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여긴 왜 들어 와.”
“빈자리가 없어서.”
필릭스가 학생들로 꽉 찬 테이블을 턱짓했다.
“그래서 여기 앉겠다고?”
아드리안이 곤란한 얼굴로 물었다.
필릭스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빈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리곤 루시와 아드리안에게서 조금 떨어진 반납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가방을 열어 책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다른 데로 가 줘. 여긴 도서 부원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야. 루시가 불편해하잖아.”
아드리안의 입에서 루시의 이름을 듣는 순간, 필릭스는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아드리안의 말을 다시 한번 무시하며 책을 펼쳤다.
“방에 가서 하면 되잖아.”
“싫어.”
그쯤 되니 좋게 타이르려 했던 아드리안의 표정도 슬슬 어두워졌다. 평소와는 다르게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형을 보며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더 상대하기를 포기한 듯 그는 한숨을 내쉬며 루시에게 말했다.
“미안, 루시. 필릭스는 신경 쓰지 마.”
두 형제 사이에서 좌불안석으로 앉아 있던 루시가 난처한 표정으로 눈알을 굴렸다.
필릭스는 삐딱한 자세로 턱을 괸 채, 앞에 놓인 책을 아무렇게나 넘겼다.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 유치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절대로 보여 주지 않았을 모습이었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필릭스는 골이 난 얼굴로 괜히 책장만 거칠게 넘겨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시와 아드리안은 도서관 업무를 처리하느라 다시 바빠졌다. 필릭스의 기분을 신경 써 주기에 둘은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필릭스를 의식하듯 흘끔대던 루시마저도 어느 순간부터는 정신없이 책을 정리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어 보였다.
그들과 홀로 떨어져 앉은 자리만큼이나 필릭스의 존재감은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듣고 싶지 않은 둘 사이의 대화까지 자꾸만 그의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그들은 필릭스가 알아들을 수 없는 도서관 업무나 그가 모르는 다른 도서 부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에 참견하며 끼고 싶어도 몇 달 전에 신청한 도서가 왜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는지, 또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1학년생이 왜 갑자기 부 활동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지 같은 내용만 떠들어 댔기에 그저 듣고만 있는 수밖에 없었다.
필릭스가 펜으로 책을 쿡쿡 찍었다. 어느샌가 펜촉에서 흘러나온 잉크가 종이를 얼룩덜룩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귓가에 소곤소곤 들려오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그가 마침내 펜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도서 반납대 주변까지 크게 울릴 정도였다.
아드리안과 루시가 한꺼번에 돌아본 것은 물론,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몇몇 학생들까지도 소리가 난 곳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아드리안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필릭스가 자신 앞에 놓인 책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뭔데?”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가 다가오기도 전에 필릭스가 먼저 툭 내뱉었다.
“너 말고.”
필릭스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당황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를 가리켰다.
“루시가 알려 줘.”
필릭스의 말에 아드리안이 못마땅한 얼굴로 허리를 짚고 섰다.
“정말 이럴 거야?”
“뭐가.”
필릭스가 만만치 않게 삐딱한 자세로 되물었다. 이제는 대놓고 심기 불편한 자신의 기분을 티 냈다.
지금 자신의 꼬락서니가 얼마나 유치해 보일지 알고 있으면서도.
무어라 되받아치려던 아드리안은 마음을 바꾸었는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필릭스의 말에 대꾸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가 루시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신경 쓰지 마.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골이 나서 저러는 거니까.”
“하지만…….”
아드리안의 어깨너머에서 루시가 곤란한 얼굴로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 그때 또 반납 도서가 들어왔다. 루시가 허둥지둥 일어나 대출 카드를 찾았다.
필릭스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얼룩덜룩한 잉크 자국은 더욱 크게 번져 있었다. 마치 그의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괜한 심술처럼.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의미 없는 눈길로 얼룩을 내려다보았다.
지난 몇 주 동안 어쩌면 루시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단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와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적어도 그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그 자신감은 아드리안과 함께 있는 루시를 마주하자마자 구멍 난 자루에 담긴 것처럼 줄줄 새어 나갔다. 그 대신 그의 마음속에서 새로이 퐁퐁 솟아오르는 것은 유치함을 동반한 질투뿐이었다.
“아드리안 선배, 이 책의 대출 카드가 안 보이는데요.”
상자를 뒤적이던 루시가 아드리안에게 도움을 청했다. 곧 둘은 어깨를 맞대고 함께 상자에 담긴 카드들을 훑기 시작했다.
필릭스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루시를 알아보기 시작한 시간보다 둘이 함께한 시간이 더 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자신이 아득바득 만들어 낸 시간보다 더 즐거운 추억들이 저 둘 사이에 있는 거라면.
벽이 세워진 느낌이었다. 루시와 아드리안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수 있는 틈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눈앞에서 보니 더 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