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9화
그는 멀어지는 루시를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내렸다.
그때,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루시가 앉아 있던 자리 옆에 놓인 그 책은 그녀가 깜빡하고 두고 간 것이었다.
“아.”
루시는 그에게서 점점 멀어져 아카데미 본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황급히 책을 집어 든 필릭스가 서둘러 그 뒤를 쫓아갔다.
“루……!”
필릭스는 루시의 이름을 소리치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여학생 이름 하나를 크게 소리쳐 부르는 것은 작은 소문도 지저분하게 부풀리기 좋아하는 이리 떼 같은 학생들에게 고깃덩이를 던져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대신에 그는 속력을 높였다. 너른 보폭으로 성큼성큼 루시의 뒤를 쫓아갔다.
이제 그녀는 아카데미 본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재빨리 달려가 따라잡으려던 필릭스가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그의 시선이 루시와 조금 떨어진 뒤편에서 걷고 있던, 어딘가 수상쩍은 거동의 한 남학생에게로 향했다.
잔뜩 움츠린 어깨.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눈. 쭈뼛대는 걸음걸이.
그러면서도 그 남학생은 루시와의 일정 거리를 계속 유지한 채 살금살금 뒤따라가고 있었다. 루시가 건물로 들어서자 이내 남학생도 그 안으로 사라졌다.
필릭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건 또 무슨 개뼉다구 같은 놈이야?
요즘 루시와 단둘이 있을 때마다 불쑥불쑥 나타나 방해를 하는 도서부 1학년 놈 때문에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였다. 루시 뒤를 몰래 쫓아가는 남학생을 보자 그의 미간이 더욱 삐딱하게 구겨졌다.
이내 그가 멈추었던 발을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는 루시와 남학생이 사라진 방향을 쫓아 아카데미 본관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선 필릭스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루시는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상한 남학생이 밑에서 머뭇대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계단을 오르려 하는 모습이 보였다.
곧 남학생이 계단에 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가 계단을 오르는 것보다 필릭스가 그 뒤로 다가가는 것이 더 빨랐다.
“잠깐.”
그가 남학생을 불러 세웠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남학생이 돌아보았다.
눈을 덮은 긴 앞머리 사이로 필릭스의 얼굴을 확인한 남학생이 소스라치듯 놀랐다. 그는 한순간에 창백해진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확실히 수상쩍었다.
“도대체 왜…….”
‘루시를 살금살금 따라가는 거냐’고 물으려는 찰나, 남학생은 계단을 올라가려던 몸을 틀었다. 그가 쏜살같이 계단이 아닌 일 층 복도를 향해 내달렸다.
“거기 안 서!”
필릭스가 얼른 뒤를 쫓았다.
그 남학생은 미꾸라지처럼 학생들 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갔다.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릭스는 매섭게 뜬 눈으로 학생들 사이를 헤치며 달려 나갔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 했기에 저렇게 도망을 친단 말인가.
정신없이 쫓아가는 와중에도 필릭스는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다.
남학생이 여학생 뒤꽁무니를 수상쩍은 모습으로 뒤따라갈 만한 이유는 두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 앙심이 있거나, 아니면 스토커거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루시가 누군가에게 앙심을 살 만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필릭스는 더욱 맹렬한 기세로 남학생을 뒤쫓기 시작했다.
어느새 남학생은 복도 끝에 다다라 있었다. 거리는 꽤 좁혀졌다.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한들 필릭스보다 빠를 순 없었다. 다 잡은 물고기였다.
막다른 곳에 이른 남학생이 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동시에 복도에서 벌어진 작은 소란에 학생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으헉!”
별안간 필릭스의 이마에 거센 충격이 느껴졌다. 누군가와 세차게 부딪힌 바람에 이마를 부여잡으며 휘청거렸다.
그는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문에 기대섰다. 하지만 그와 충돌한 상대방은 아예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으아아…….”
노엘 로먼이 바닥에서 필릭스와 마찬가지로 이마를 감싸 쥐고 있었다.
“선배님! 갑자기 튀어나오시면 어떡해요…….”
그가 필릭스를 올려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어찌나 세게 부딪쳤던지 둘 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우, 머리 깨질 것 같네!”
“누가 할 소리!”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잠시 눈앞이 핑글 돌았던 필릭스가 잔뜩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너 머리통 안에 돌 들었냐?”
그 말에 노엘이 억울한 얼굴로 외쳤다.
“예? 선배님은 그런 말 하시면 안 되죠!”
“뭐, 왜! 뭐가 안 되는데!”
“그때 교실에서 다 들었거든요! 루시 선배가 하는 말!”
갑자기 노엘이 다소곳한 루시의 몸짓을 흉내 내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꼬, 꼴찌 탈출! 할 수 있어요!”
“이 자식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필릭스의 기세에 노엘은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필릭스는 노엘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던 노엘이 팔을 슬그머니 내리며 물었다.
“뭐 찾아요?”
필릭스가 성큼성큼 노엘에게로 다가갔다.
“너, 방금 여기서 나온 애 누군지 아냐?”
“방금요? 글쎄요, 못 봤는데…….”
“장난해? 내가 곧바로 뒤따라 나왔는데.”
“아, 정말 못 봤어요!”
정말 도움이라곤 눈곱만치도 안 되는 녀석이었다. 필릭스는 인상을 구기며 남학생이 달려간 쪽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날래게 내뺐는지 벌써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왜요? 누군데요?”
노엘이 물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허탈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알 거 없어. 네 갈 길 가.”
“제 갈 길 잘 가고 있었는데 선배가 냅다 들이박은…… 아! 가요, 간다고요!”
필릭스가 험악하게 쏘아보자 노엘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곧장 아카데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필릭스는 얄미운 그 뒷모습을 끝까지 노려보다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거의 다 잡았는데!
그 남학생이 루시에게 어떤 불순한 짓을 하는 광경을 목격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보내기엔 마음이 상당히 찝찝했다.
한참 동안이나 필릭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남학생이 사라진 쪽을 노려보았다.
다음엔 안 놓친다.
그는 마음속으로 단단히 벼르며 꺼림칙한 발걸음을 돌렸다.
* * *
책을 돌려주기 위해 다시 계단 앞으로 돌아왔을 때 루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필릭스가 뒤에서 벌인 소란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후 수업을 모두 끝마친 뒤, 필릭스는 루시가 놓고 간 책을 직접 가져다주기로 했다.
사실 책은 핑계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필릭스는 목걸이에 관하여 후련하게 물어보지 못한 점이 후회가 되었다.
피하고 싶은 진실을 마주하는 것만큼이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끙끙 앓는 것 또한 몹시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불안한 그의 머릿속은 루시의 마음을 제멋대로 상상하고 부풀리기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당사자가 비밀로 해 달라고 했다’는 아드리안의 애매하고 수수께끼 같은 대답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울려 댔다.
이대로라면 또다시 밤을 꼴딱 새며 한숨도 자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루시 뒤를 몰래 따라가던 남학생 일도 걱정이 되어 필릭스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도서관으로 향했다.
여느 때와 달리 도서관은 빈자리가 드물 정도로 꽉 차 있었다. 아마 다들 며칠 남지 않은 시험에 서서히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도서 반납대 앞에서 루시만이 분주하게 반납 도서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필릭스가 슬그머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도서 대출 카드에 반납 일자를 적고 있던 그녀가 그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이거.”
필릭스는 루시가 두고 간 책을 내밀었다. 루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책을 받아들었다.
“아! 없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루시는 바빠 보였다. 필릭스의 시선이 반납 도서가 높게 쌓인 반납대로 향했다. 정리할 책들이 평소보다도 많아 보였다.
시험 기간마다 눈치 없이 과제까지 내주는 선생들이 있었다. 학생들은 서둘러 과제를 끝내기 위해 자료가 될 만한 책들을 끊임없이 책장에서 뽑고 또 뽑아 갔다. 그리고 필요한 부분만 확인한 후 곧장 반납대 위에 쌓아 놓았다.
여기저기서 가져다 놓는 책들로 인해 수레와 반납대 위엔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책들을 정리하기 위해 얼마나 정신없이 움직였던지 루시의 단정하게 땋은 머리도 온통 부스스해져 있었다.
아무리 도서 부원이라지만 시험 기간까지 일을 해야 하는 건 너무 한 거 아냐?
혹시라도 루시가 수석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데 차질이 생길까 필릭스는 제가 다 걱정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책들은 계속 쌓여 갔다.
책을 분류 기호에 따라 정리하는 방법은 필릭스도 알고 있었다. 그는 주저 없이 반납대 위의 책을 한 아름 안아 들었다. 루시가 책 수레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필릭스를 올려다보았다.
“선배?”
“너무 많잖아. 도와줄게.”
“하지만…….”
필릭스는 루시의 만류에도 책을 들고 책장을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베르크를 필릭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학생들은 책을 정리하는 그를 아드리안이라고 생각했는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반납대에 가득 쌓여 있던 도서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선배, 도와줘서 고마워요.”
등 뒤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필릭스가 돌아보았다. 루시가 자신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필릭스는 뿌듯하고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루시를 찾아왔는지 까맣게 잊은 채, 책 정리에만 몰두할 만큼.
그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트리는 목소리가 날아든 건 얼마 후였다.
“……대체 거기서 뭐 해?”
필릭스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통로 끝에 아드리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