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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8화 (28/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8화

이게 왜…….

필릭스는 미동도 없이 손안의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10월의 탄생 별자리인 성검자리가 정교한 솜씨로 들어가 있는 크리스털.

틀림없이 축제 날, 루시가 가판대 앞에서 구입했던 별자리 목걸이였다.

이게 왜 아드리안 침대 위에……?

가만히 고개를 들어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필릭스의 얼굴이 혼란스러웠다. 그가 멍하니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뒤이어 오만 가지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그냥 비슷한 목걸이가 아닐까? 별자리를 이용해 만든 목걸이는 흔하디 흔하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줬다든지. 그 가판대에서 물건을 산 사람이 우리뿐만은 아니었을 테니.

그는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이런 목걸이는 흔하다. 시장에선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물건이다.

그러니 신경 쓸 필요 없어.

“아드리안.”

그가 동생을 불렀다. 그저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 한구석이 불안한 건지.

아드리안이 옷을 정리하다가 돌아보았다.

“음?”

필릭스가 천천히 손바닥을 내밀어 그에게 목걸이를 보여 주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아.”

아드리안이 급히 다가와 필릭스의 손바닥 위에서 목걸이를 집어 갔다. 그가 서둘러 책상 위에 있던 조그만 상자 안에 목걸이를 넣고 뚜껑을 닫았다.

“미안. 당사자가 비밀로 해 달라고 해서.”

그가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사자? 비밀?

뜻을 알 수 없는 대답에 필릭스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언가를 더 캐묻기 두렵게 만드는,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필릭스의 반응을 보지 못한 아드리안은 책상 서랍을 열고 목걸이를 담은 상자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필릭스가 허망한 눈길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필릭스가 아드리안의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터덜터덜 자신의 침대로 걸어간 그는 힘없이 그 위로 늘어졌다.

아드리안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침대 위에서 어린아이처럼 방방거릴 때는 언제고, 이제는 도마 위의 죽은 물고기처럼 가만히 누워 있는 모습이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왜 그래?”

아드리안의 물음에도 필릭스는 대꾸가 없었다. 아드리안이 그런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사춘기가 왔나…….”

* * *

다음 날.

오전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던 필릭스는 근처에 보이는 벤치에 잠깐 앉았다. 그리고는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느껴지던 두통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잠시 뒤 그가 손을 내리고 멍하니 교정을 바라보았다.

맑고 푸른 하늘, 울긋불긋 아름답게 물든 나무들, 화단마다 소담하게 핀 가을꽃들…….

그 어떤 아름다운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생각 하나에 사로잡혀 괴롭기만 했다.

그동안 루시와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잠깐 잊고 있던 사실. 그녀가 보내 주는 환한 미소에 혼자 설레어하며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

바로 루시가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아드리안이라는 것.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한 둑이 밀려오는 세찬 물길을 버텨 내지 못하고 점점 무너져 내리듯이, 그의 머릿속도 자꾸만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쉽사리 떨쳐 내지 못하고 점차 깊은 고뇌 속으로 빠져들었다.

루시가 아드리안에게 목걸이를 선물하는 모습은 상상뿐일지라도 고통스러웠다.

떨쳐 내면 떨쳐 낼수록 더욱 구체적이고 생생한 광경으로 머릿속에 나타나 그를 슬프게 했다. 그는 눈을 꾹 감으며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때였다.

톡톡.

누군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루시!”

뒤를 돌아본 필릭스가 놀란 얼굴로 외쳤다. 루시가 오늘도 연갈색 머리를 가지런히 땋아 어깨 앞으로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그녀가 필릭스를 내려다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발견한 그 역시 언제나처럼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 주길 기다리며.

하지만 여느 때완 달리 필릭스가 그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자 루시의 얼굴에서 밝게 빛나던 미소도 조금씩 옅어져 갔다.

필릭스의 무반응에 잠깐 머뭇대던 그녀가 벤치 앞으로 돌아 나왔다.

“필릭스 선배.”

그녀가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사실은 아까 저기서부터 따라왔어요.”

그녀가 아카데미 본관 입구를 가리켰다.

“꽤 가까이서 걷고 있었는데 눈치 못 채셨어요?”

“아…….”

필릭스는 제대로 대꾸도 못 하고 이상한 탄성만 흘렸다. 루시의 얼굴을 보자 반가운 마음과 괴로운 마음이 동시에 솟아났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감정이 한데 뒤섞여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 대신 어정쩡한 미소만이 떠올랐다.

“어디 아프세요?”

“아니, 괜찮아.”

루시가 걱정스런 얼굴로 묻는 말에 필릭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지나갔다. 그들을 발견한 루시가 시선을 의식하듯 엉거주춤 일어나며 말했다.

“……지금 대화하기 곤란하면 나중에 얘기할까요?”

“그런 거 아냐.”

필릭스가 그녀를 다시 앉혔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필릭스의 분위기에 루시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색한 공기가 그들 주변을 맴돌았다. 루시는 무릎 위에 올려 둔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정신 차려, 필릭스!

루시가 기껏 먼저 다가와 말까지 걸어 주었는데 뭐 하는 거야.

그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고작 목걸이 하나 때문에 기분과 태도를 조절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요즘…… 네 덕에 시험 준비를 성실히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필릭스가 고민 끝에 억지로 쥐어짜 낸 말로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루시가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응. 이렇게 열심히 해 본 적은 처음이야.”

“공부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세요. 3학년 과목도 미리 조금씩 공부하는 중이라……. 아는 건 최대한 알려드릴게요.”

루시가 쑥스럽다는 듯이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아드리안 선배도 있잖아요.”

그녀가 때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어차피 같은 방을 쓰니 아드리안 선배에게 물어봐도 되겠네요. 저도 가끔 도움받은 적이 있는데 정말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어요.”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필릭스는 가슴이 철렁했다. 곧이어 누가 쥐어짜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이 쓰라려 왔다.

필릭스가 삐걱거리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 그래…… 그렇지.”

“아드리안 선배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3년 내내 전 과목 1등을 놓치지 않다니. 전 결과적으론 전체 1등이었지만, 그래도 몇몇 과목에선 만족스런 성적을 거두지 못했거든요.”

아드리안을 칭찬하는 루시의 말에 필릭스의 마음속에서는 여러 감정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검술은 내가 1등이었어.”

그의 입에서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난데없이 본인의 등수를 밝히는 말에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쩌면 콜린이나 노엘보다도 입방정이 심한 사람은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필릭스가 민망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아, 그러고 보니 검술은 최고 점수를 받으셨죠.”

루시가 이전에 보았던 그의 성적표를 떠올린 듯 말했다.

“……응, 어려운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가르쳐 줄게.”

“감사해요. 그런데 전 검술 수업을 선택하지 않아서……. 몸 쓰는 덴 영 소질이 없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뚝 끊겨 버렸다. 둘은 잠시 너른 교정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루시의 발이 벤치 아래서 자꾸만 까딱거렸다.

“……으음, 생각해 보니 호신용으로 배우는 것도 괜찮겠어요.”

잠시 후, 그녀가 필릭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멋지게 휘두르거나 그러진 못하겠지만, 단도를 잡는 법 정도는 배워 둬서 나쁠 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 좋아, 내가 날 잡아서 제대로 가르쳐 줄게.”

필릭스는 평소와 같은 말투로 대답하려 애쓰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꾸만 고개를 드는 구지레한 감정들을 꾹꾹 찍어 누르며.

루시가 아드리안을 좋아한다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뚱하게 굴었던 자신이 스스로도 치졸해 보였다.

그러나 어쩌랴. 루시를 만난 뒤에 그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은 그의 통제 밖에 있었으며, 그 자신도 어쩔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못난 감정들을 꽁꽁 숨겨 마지막 남은 체면이라도 챙기는 것뿐이었다.

“선배, 사실은 할 말이 있어서 온 건데요.”

루시가 미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번 주에는 같이 공부 못 할 것 같아요.”

“왜?”

뜻밖의 말에 필릭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에린 부인이 어제 사다리에서 떨어져 팔을 다치셨거든요. 도서관 업무를 봐 줄 사람이 없어져서 도서 부원들이 돌아가면서 반납대를 지키기로 했어요.”

루시의 설명에 가뜩이나 심란하던 필릭스의 마음이 더욱 착잡해졌다.

“죄송해요, 선배. 공부는 다음 주부터 다시 해요. 이 얘기를 하러 온 거예요.”

“……어쩔 수 없지.”

필릭스가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대답했다.

“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잠깐만.”

루시가 벤치에서 일어났을 때, 필릭스가 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꽤나 애타는 얼굴로 사람을 붙든 것치곤 정작 하고 싶은 말을 시원스레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혹시 목…….”

“목?”

“목걸…….”

말을 잇지 못하는 필릭스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루시를 붙잡고 있던 손에서 스르륵 힘이 풀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싱겁게 말을 끝내 버렸다.

결국 그는 별자리 목걸이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못하고 루시를 보내 주었다.

사실 필릭스는 두려웠다.

정말로 루시가 아드리안에게 목걸이를 주었을까 봐. 자신의 물음에 태연한 얼굴로 ‘그렇다’고 대답할까 봐.

그래서 대답을 듣는 상황을 피해 버렸다. 질문조차 하지 못했다.

필릭스는 멀어져 가는 루시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그녀가 자신에게서 영영 그렇게 멀어질 것만 같아 가슴 한구석이 참을 수 없이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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