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7화
“로잔 왕국의 성벽이 머리 높이밖에 되지 않았던 이유는!”
“기마병만 막으면 되었기 때문에.”
“아델라 교의 4대 성지는!”
“아델론, 에쉴라, 무넨, 라즈기르.”
필릭스의 막힘없는 대답에 루시가 책을 탁 덮었다.
그녀가 놀라움이 가득하면서도 어딘가 미심쩍어하는 눈빛으로 필릭스를 바라보았다. 필릭스는 뜨끔한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어서 공부를 끝내고 싶은 마음에 알고 있는 지식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 버리고 말았다.
“이상하네……. 분명 초점이 나가 있었는데.”
그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시는 알쏭달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 *
교실을 나온 필릭스와 루시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사람이 없어 텅 비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해는 완전히 져 버린 뒤였고 식당도 문을 닫을 시간이었으니까.
그제야 루시가 미안한 표정으로 필릭스를 돌아보았다.
“어떡하죠? 린다 아줌마가 벌써 식당 정리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 봐요.”
식당 관리인인 린다는 다른 직원들에게 열심히 지시를 내리며 청소 뒷마무리를 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식당의 관리인직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야무지고 깐깐한 일솜씨로 다른 직원들뿐만 아니라 학생들까지 단단히 휘어잡고 있었다.
“괜찮아. 기숙사에서 간단하게 먹으면 되니까.”
무뚝뚝한 표정으로 지시를 내리는 린다를 보며 필릭스가 말했다. 밤늦게 야식을 찾는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마다 딸린 간이식당은 아카데미 식당보다 훨씬 늦은 시간까지 운영되고 있었다.
그때 린다가 필릭스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어 그를 발견한 린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필릭스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시원시원한 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녀가 식당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식사하러 오신 건가요, 학생회장님?”
순식간에 무뚝뚝한 표정을 얼굴에서 말끔히 지워버린 린다가 친절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그녀가 얼른 들어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에그, 안쓰러워라! 시험공부하기도 바쁠 텐데. 먹기라도 잘 먹어야지요!”
예상치 못한 환영에 필릭스와 루시가 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자 린다가 재차 손짓했다.
“얼른 들어와요, 얼른!”
둘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가 역시 재빠른 걸음으로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거기 앉아서 기다려요!”
주방으로 사라지기 전에 그녀는 테이블 하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린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필릭스가 루시를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냥 지금은 내가 아드리안인 것으로 하자.”
그의 말에 루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숙사로 돌아가 간단한 저녁을 먹을 수도 있었지만, 필릭스는 모처럼 얻은 루시와의 저녁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린다가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를 직접 들고나와 그들 앞에 놓아 주었다.
“우리 대신 주방 인력 보충에 대해 건의해 주어서 너무 고마워요, 학생회장님.”
필릭스를 향해 방긋 웃으며 린다가 말했다.
“덕분에 숨 돌릴 틈이 생겼다니까요! 전에는 얼마나 바쁘고 정신이 없었는지!”
린다의 뒤쪽에 서 있던 다른 직원들도 동의하듯 열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앞으로 식당 운영 시간에 상관없이 언제든 오면 음식을 만들어 주겠다’는 파격적인 약속을 해 준 뒤 린다와 직원들은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이건 아드리안 덕에 먹는 만찬이네.”
필릭스가 앞에 놓인 음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드리안 선배는 학생회 일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직원들의 복지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루시가 말을 받았다.
“언젠가 프레드 영감님이 말에서 떨어져 발목을 다쳤을 때도 아카데미 측에 건의해 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했어요.”
“그래?”
필릭스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주방 직원들의 이야기도, 프레드 영감의 이야기도.
아드리안이 학생회 일에 열정적인 건 알고 있었지만, 아카데미 사용인들까지 신경 쓰며 도움을 주고 있는 줄은 몰랐으니까.
“그것도 공작가 교육의 일환인가요?”
루시가 포크로 소시지를 쿡 찍으며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필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전 잘은 모르지만…… 귀족들은 사용인들을 포용하고 잘 보살펴 주어야 하잖아요.”
“으음, 그렇지.”
필릭스의 입에서 시원찮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내가 공작가의 사용인들을 위해 나선 적이 있었던가?
그는 생각에 잠겼다.
“아드리안 선배는 항상 그 점을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 같아요.”
필릭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자기 자신이 한심하고 생각 없이 사는 놈 같이 느껴졌다.
뭐,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가 포크로 쿡쿡 콩을 찔러 댔다. 그런데 찔리는 게 콩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인 것처럼 가슴이 콕콕 쑤셔 왔다.
“선배?”
루시의 부름에 필릭스는 또 한 번 상념에서 벗어나며 고개를 들었다.
“아, 으음.”
필릭스가 제대로 먹지 않고 콩만 찔러 대는 모습을 보며 루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왜 안 드세요? 아까 배고프다고 노래를 부르셨잖아요.”
“아냐, 먹고 있어.”
필릭스는 루시의 시선을 피하며 음식을 입 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루시가 조심스레 말했다.
“음…… 내일부턴 한 시간 일찍 마쳐 줄게요.”
“어?”
“그렇게 지치실 줄은 몰랐어요. 좀 쉬엄쉬엄할 걸 그랬나 봐요.”
“아냐!”
필릭스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어떻게든 루시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기운이 나는 척했다.
“시간 줄이지 마. 난 혹독하게 할 필요가 있어. 학년 꼴찌잖아. 머리가 안 좋아서 오히려 공부하는 시간을 늘려도 모자랄 판에.”
그의 말에 이번에는 루시가 펄쩍 뛰었다.
“머리가 안 좋다뇨! 오늘도 책 한 권을 한 번에 외워 놓고선!”
그녀는 마치 자신의 머리가 안 좋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도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거예요. 선배는 아드리안 선배와 쌍둥이잖아요. 분명 아드리안 선배처럼 타고난 머리가 있을 거라고요.”
루시가 그를 격려하듯 말을 이어갔다.
“두 사람 정말 똑같으니까요.”
“그래?”
필릭스가 돌연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정말 그렇게 똑같아?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아카데미 학생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묻는 필릭스에게 루시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음…… 네. 똑같죠.”
“정말로 다른 점이 하나도 없어?”
필릭스는 끈질기게 물었다.
“아무리 쌍둥이래도 어딘가 한군데는 다른 점이 있을 거잖아. 예를 들면, 특정 부위에 점이 있다거나, 귀 모양이 다르다거나.”
“네?”
루시가 당황스런 질문을 받은 듯 눈알을 굴렸다.
“제가 보기엔 둘 다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생겼는데요.”
“말도 안 돼.”
“네? 뭐가요?”
루시의 대답에 필릭스는 혼란스러워졌다.
정말 루시 눈에는 아드리안의 뒤에서만 후광이 비치기라도 하는 건가.
하지만 필릭스는 절대 그렇게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루시에게 물었다.
“잘 봐 봐. 어디 한군데 다른 구석이 있겠지.”
“어…….”
필릭스가 너무나 심각하게 재촉하는 바람에 루시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녀가 공부할 때처럼 미간을 찡그리며 필릭스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동그란 눈이 열심히 움직였다.
필릭스의 이마, 눈썹, 귀, 턱, 입술…….
여기저기를 훑어보던 그녀의 시선이 마침내 필릭스의 푸른 눈동자 위에서 멈췄다. 어디 잘 찾아보라며 얼굴을 가까이 내어 주고 있던 필릭스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훅, 하고 들이켰다.
눈앞으로 다가온 루시의 에메랄드빛 눈은 깊고 신비로웠다. 필릭스는 찌릿찌릿한 감각과 함께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선배. 지금 비교 대상이 없어서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는데요.”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루시가 말했다.
필릭스가 황급히 얼굴을 뒤로 빼며 시선을 내렸다.
“아, 그렇지. 그렇겠네.”
“나중에 아드리안 선배도 함께 있을 때 찾아볼게요.”
“아, 그래.”
필릭스는 웅얼거리듯 대답하며 황급히 음식을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심장이 속절없이 쿵쿵 뛰었다.
* * *
식당을 나와 루시를 여학생 기숙사까지 데려다준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필릭스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악몽에 시달리며 잠에서 깨어난 게 다른 날의 아침인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는 루시와 함께했던 즐거운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와 저녁을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오늘 하루는 아주 만족스러운 하루로 탈바꿈했다.
방에 도착했을 땐, 먼저 돌아온 아드리안이 교복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가 필릭스를 보며 말했다.
“이제 와?”
필릭스는 대답도 없이 아드리안의 침대 위로 다이빙하듯 훌쩍 뛰어들었다. 즉시 아드리안의 잔소리가 날아왔다.
“필릭스, 내 침대 위에 외출복 입고 눕지 말랬지.”
그러나 필릭스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그의 침대 위에서 물고기처럼 펄떡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아드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다.”
몇 번을 더 아드리안의 침대 위에서 팔딱거리던 필릭스는 침대에서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그가 떨어진 물건을 줍기 위해 바닥을 확인했다.
은색의 줄 같은 것이 침대 옆에 떨어져 있었다. 필릭스가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잠시 후, 그가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의 입가에서 서서히 미소가 지워졌다.
그는 손안에 든 물건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목걸이 줄에 달린 조그마한 크리스털 속에서 성검자리가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