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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6화 (26/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6화

“선배!”

허둥지둥 달려온 루시가 필릭스의 팔을 붙들었다.

그녀의 놀란 표정을 본 필릭스가 잡고 있던 노엘의 멱살을 놓았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노엘이 벽에 기댄 채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왜 계속 주변에 얼씬대면서 남의 얘기를 엿들어?”

“얼씬댄 게 아니라…… 한참 전부터 여기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고요! 저보다 늦게 들어온 건 선배들이시잖아요.”

노엘이 억울한 듯 말했다.

“아까 일 때문에 일부러 아무도 안 오는 여기로 온 건데…….”

“넌 학교에 자러 오냐? 그리고 왜 처음부터 없는 척 가만히 있었어?”

“하아……. 그게,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그랬어요! 말소리가 들려서 깼는데 두 분이 그…… 암튼, 오전에 선배님 눈빛도 그렇고, 방해하면 진짜 멱살이라도 잡힐 것 같아서 못 나가고 있었던 거예요!”

노엘이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해명했다. 그는 정말로 억울해 보였다. 그러나 필릭스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노려보기만 했다. 그런 그를 달래듯 루시가 조용히 말했다.

“선배, 일부러 말 안 하고 숨어 있었던 건 아닐 거예요.”

루시의 말에 용기를 얻은 노엘이 슬쩍 그녀의 뒤로 가서 섰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몰래 속삭였다.

“아드리안 선배는 엄청 상냥하고 친절하신데, 필릭스 선배는 조금 무섭네요.”

“다 들린다.”

필릭스가 그에게 살벌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루시가 노엘의 어깨를 살짝 밀며 자신에게서 떼어 냈다.

“아냐, 필릭스 선배 무섭지 않아.”

그녀가 노엘을 보며 말했다.

“의외로 다정한 구석도 있어.”

루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실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줄곧 언짢은 기색으로 가득해 있던 필릭스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졌다. 노엘을 노려보던 눈에도 금세 힘이 빠졌다.

그가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되뇌었다.

다정한 구석.

루시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앞에 붙은 ‘의외로’가 걸리긴 했지만 분명 ‘다정한’이라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정말일까? 내가 그녀에게 정말로 그렇게 보이는 걸까?

그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루시를 바라보았다.

루시는 노엘을 향해 무심코 뱉어 버린 말에 스스로도 깜짝 놀란 것 같았다. 곧 그녀가 자신의 말을 수습해 보려는 듯이 정신없이 말을 이어 갔다.

“……주위에 곤란한 사람이 있으면 먼저 나서서 도와주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으면 대신 들어 주기도 하고…… 타운에도 함께 나가 주고…… 농담으로 웃겨 주기도 하고……. 아무튼…… 아무튼 그렇다고.”

그녀가 말끝을 점점 흐리더니 아래를 내려다보며 구두코로 바닥을 콕콕 찍었다.

“아, 이거 그거네.”

루시의 말을 듣고 난 노엘이 갑자기 탁, 손가락을 튕겼다. 그가 루시 앞으로 나서더니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필릭스 선배님, 여자들한테만 다정한 타입이신가 보네요.”

바닥을 보고 있던 루시가 고개를 번뜩 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해석에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갸우뚱하는 얼굴에 ‘그런가?’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자 후배도 좀 귀여워해 주시면 어디 덧나나요?”

노엘이 서운함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래 봬도 전 파릇파릇한 1학년이라고요.”

필릭스는 더 이상 저놈의 입방정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지금 귀여워해 줄 테니 잠깐 나갈래?”

살벌하게 돌아온 필릭스의 말에 노엘이 또다시 루시의 뒤에 숨었다. 그러나 자꾸만 그녀 뒤에 찰싹 붙는 노엘의 행동은 오히려 필릭스를 자극할 뿐이었다.

“왜 자꾸 그리로 숨어? 네가 그 뒤에 숨겨질 거라고 생각하냐!”

둘 사이에 또다시 대치전이 벌어졌다. 중간에 낀 루시는 난감한 표정으로 두 팔을 이리저리 내저으며 그들을 만류했다.

“그만, 그만해요!”

루시의 말에 필릭스가 노엘을 덮칠 듯 붙잡으려던 행동을 멈췄다. 하지만 그를 노려보는 눈빛은 여전했다.

콜린 코너만큼이나 입방정이 심하고 입이 가벼운 놈인데, 재수 없기로 따지면 그보다 더했다. 아니, 콜린 코너가 묵언 수행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둘 다 진정하고 앉아요!”

보다 못한 루시가 의자를 빼 주며 말했다.

“자, 어서. 더 이상 큰 소리 내는 건 곤란해요. 지금 수업 중인 곳도 있다구요.”

루시의 말에 두 남학생이 빼어 둔 의자에 가 앉았다. 한 명은 여전히 매섭게 상대를 쏘아보았고, 한 명은 여전히 도망갈 준비를 하듯 의자 끝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며.

“거기 루시 자리야.”

필릭스가 자신의 맞은편에 엉거주춤 앉은 노엘에게 말했다.

“루시 선배가 앉으랬어요.”

“루시, 이 자식한테 당장 꺼지라고 해.”

루시가 자리에 선 채로 이마를 짚었다.

“왜 둘 다 자꾸 서로에게 시비를 걸고 그래요? 이러다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또 싸우려고.”

“난 시비 안 걸었어요!”

노엘이 억울한 표정으로 외쳤다.

“낮잠 자다가 별안간 끌려 나와서 일방적으로 멱살이 잡힌 거라고요.”

그가 여전히 벌건 자신의 목을 내보이며 말했다.

필릭스가 다리를 꼬고 앉으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엄살은.”

둘은 서로를 외면하며 분을 삭였다. 필릭스는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노엘을 바닥에 메다꽂아 버리고 싶었지만 루시가 있었기에 꾹 참는 중이었다.

더 이상의 신경전이 벌어지지 않아 교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루시가 괜히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을 정리하는 소리만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잠시 후, 책상 맞은편에서 필릭스의 눈치를 살피던 노엘이 물었다.

“그나저나 교복은 찾고 계세요?”

“갑자기 웬 교복 타령?”

“아침에 도둑맞으신 거요.”

“왜 그렇게 내 교복에 관심이 많아? 설마 네가 훔쳤냐?”

필릭스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추궁했다.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필요 이상으로 언성을 높이며 부인하는 모습에 필릭스의 눈은 더욱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전 그냥,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물어본 거예요.”

“돕긴 뭘 도와? 말했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도둑 찾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뭘 어떻게 해. 손모가지를…….”

말을 하던 필릭스가 루시를 의식하며 말을 끊었다.

“손모가지를 뭐요?”

필릭스가 루시는 보지 못하게끔 손바닥을 세워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곤 뒷말을 궁금해하는 노엘을 향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으깨 놓아야지.’

노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선배는 돈도 많잖아요. 그 교복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그렇게까지가 어떻게인데요?”

루시가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필릭스가 대답을 피했다.

“아무튼 너 좀 이상하다? 자꾸 내 교복에 대해서 묻는 게…….”

필릭스가 의심을 거두지 못하자 곧 죽어도 앉아 버티던 노엘이 자리에서 슬금슬금 일어났다.

“어딜 도망가?”

“도망가는 거 아닙니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노엘은 재빠른 걸음으로 순식간에 문까지 내달렸다. 교실을 나간 그는 문 사이로 고개만 빼꼼 내민 채로 말했다.

“아무튼 전 이제 두 분 방해 안 하겠습니다. 이제 이 교실 안 올 테니 마음껏 하세요.”

“뭐, 뭘?”

황당해하는 루시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노엘은 문 너머로 사라졌다.

“정말 이상한 자식이네.”

노엘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필릭스가 중얼거렸다.

루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두 남학생의 유치한 투닥거림으로 흐트러진 책상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공부 좀 하겠다는데 도와주질 않네요.”

“그러게. 오늘도 공부하긴 글렀네.”

필릭스의 말에 고개를 든 루시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네? 그래도 할 거예요.”

“어……. 배는 안 고파?”

그의 질문에 루시가 갑자기 쌓아 놓은 책을 그의 앞으로 쓱 밀었다. 그러더니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냉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선배, 이거 다 보기 전엔 아무 데도 못 가요.”

루시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필릭스가 정말로 책을 다 읽기 전까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했으니까.

항상 얌전하고 수줍은 모습만 보이던 그녀는 공부를 할 때만큼은 베르크가의 가정 교사만큼이나 엄격하고 철저했다.

어제 도서관에서처럼 그녀에게 공부와는 조금도 관련 없는 질문을 하거나 함께 산책을 하는 시간 따윈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다.

털끝만큼의 로맨틱한 분위기도 흐르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필릭스는 하릴없이 책장만 넘겼다.

“선배, 집중하세요, 집중! 넘기는 척만 하지 말고요.”

가끔 루시가 그의 책상을 콩콩 두드리고 하는 말이 그 교실에서 들리는 유일한 말소리였다.

루시의 삼엄한 감시 아래 필릭스의 책장은 계속해서 넘어갔다. 결국 정말로 다 읽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두꺼운 책이 마지막 장에 가까워졌다.

그들이 공부를 끝낸 시각은 창밖이 어둑해지고 난 뒤였다. 필릭스가 다 읽은 책을 탁 덮으며 후련한 한숨을 내쉬었다. 눈알의 수분이 모두 증발해 버린 듯 뻑뻑했다.

루시 역시 조금 지친 얼굴로 보던 책과 노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저녁 먹으러 갈까?”

몇 시간 만에 필릭스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루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 말했다.

“아직 한 가지가 남았는데요.”

그녀가 필릭스 앞의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펼쳤다. 그리고 중요한 부분을 표시해 놓은 페이지를 넘겨보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

“아스트리노 황제가 슐란 왕국을 정복한 해는!”

별안간 루시가 질문을 던졌다.

“오, 사, 삼, 이…….”

“제국력 200년.”

필릭스의 입에서 망설임 없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루시는 약간 놀란 눈으로 그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했다.

“정답이에요.”

그녀가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다시 페이지를 차르륵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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