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5화
필릭스는 아드리안이 자신에게 참지 않고 불만을 쏟아 내길 기다렸다.
‘난 네가 빠진 자릴 대신하기 위해 장장 이틀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항구까지 왕복해야 했어! 그런데 넌 고작 네 평판에 ‘한심하다’는 단어 하나가 추가될까 봐 불만인 거야?’
차라리 그렇게 화를 냈으면 싶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필릭스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안타깝게도 시험이 끝나면 아버지 얼굴을 직접 봬야 하니까. 괜히 심기 거스르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를 외면해 버린 아드리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시험 끝나면? 난 시험이 끝나도 집에 가지 않을 건데?”
“바보야, 그 주 주말이 우리 생일이잖아.”
“아.”
아드리안이 어떻게 그걸 까먹을 수 있냐는 표정으로 필릭스에게 눈총을 주었다.
“생일날 화난 아버지와 마주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얌전히 그의 말에 따르자’는 뒷말을 생략하며 아드리안이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필릭스는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싸맸다.
그들의 생일마다 베르크 가에서는 연회가 벌어졌다. 그러나 그 연회에는 베르크 쌍둥이의 친구들보다는 공작의 인맥들만 넘쳐났다.
화려하고 성대한 연회장, 자신에게 말을 걸어 보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 보내진 수많은 선물들…….
한 마디로 아주 성가신 자리였다.
“필릭스!”
그가 대답이 없자, 아드리안이 필릭스의 얼굴 앞에 손가락을 튕겼다.
“내 말 듣고 있어? 시험이 끝나는 주 주말에 집으로 갈 거니까 기억해 둬.”
“하아……. 알겠어.”
필릭스는 결국 체념하며 대답했다.
시험 문제도, 생일 연회도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드리안을 또다시 곤란한 상황에 내몰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 * *
그날 오후.
마지막 수업까지 끝마친 뒤, 필릭스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삼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동쪽으로 이어진 삼 층 복도 끝에는 사용되지 않는 빈 교실이 하나 있었다. 원래 약초학 교실이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들을 보관해 두는 창고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된 곳이었다.
대부분의 수업이 끝날 시간이었으므로 학생들은 기숙사나 식당, 혹은 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연어처럼 사람들 틈을 비집고 거슬러 올라가 순식간에 삼 층에 도착한 필릭스가 모퉁이를 돌았다.
만나기로 했던 빈 교실로 막 들어가려던 루시가 보였다.
“루시!”
그가 부르는 소리에 루시가 돌아보았다.
“선배!”
그녀는 오늘도 품에 책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그 엄청난 양을 본 필릭스의 입가에 뻣뻣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루시에게 다가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거 다 내가 봐야 할 것들이야?”
“아니에요! 제 것도 있어요.”
루시가 걱정 말라는 듯 그를 안심시켰다.
필릭스가 루시에게서 책을 받아든 뒤 그녀를 따라 교실로 들어갔다. 나무와 먼지, 흐릿한 약초 냄새가 뒤섞인 묘한 냄새가 코끝에 풍겨 왔다.
교실 뒤쪽에는 망가진 책상과 의자, 그리고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난잡하게 쌓여 있었다. 그 아수라장을 보니 교실의 기능을 못 하게 된 지 아주 오래된 듯싶었다.
사람의 온기가 오랫동안 닿지 않아 다른 교실과 다르게 싸늘한 냉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창가 쪽에는 맑은 가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필릭스와 루시는 앉아 공부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책상과 의자를 찾아 교실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책상 위에는 약을 제조하다가 흘린 진득한 액체와 얼룩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잠시 후 둘은 그나마 멀쩡하고 깨끗한 책상과 의자를 찾아 창문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창밖으로 삼삼오오 모여 도서관 쪽으로 몰려가는 다른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대비되어 빈 교실은 더욱 고요하게 느껴졌다.
적당히 들어오는 햇살과 조용한 분위기. 그리고 필릭스와 루시의 공부를 방해할 사람이 없다는 것까지.
필릭스는 이 교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 교실도 좋네요. 조용하고요.”
마침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루시가 말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자꾸 눈에 밟히는 게 있어요. 예를 들면 반납대에 높이 쌓여 있는 반납 도서라든가, 사람들이 읽다가 그대로 테이블 위에 두고 간 책들이요……. 시험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에린 부인이 모든 업무를 맡아 주시기로 했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더라고요. 어느새 정신을 차리면 제가 책을 정리하고 있지 뭐예요.”
“아드리안이랑 똑같네.”
필릭스가 무심코 말했다.
아드리안 역시 쉴 틈 없이 일을 하려는 버릇이 있었다. 아무리 주변에서 그냥 두라고 해도 자신이 직접 처리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맞아요. 그래서 언제나 도서관 늦게까지 남아 있는 것도 저와 아드리안 선배뿐이었어요.”
루시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작년엔 아드리안 선배랑 늦게까지 망가진 책을 수리하느라 기숙사 통금 시간을 어긴 적도 있었죠. 그때 사감 선생님께 들여보내 달라 사정하느라 진땀을 뺐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웃기네요.”
루시가 좋은 추억을 떠올리듯 얘기하는 모습에 필릭스는 갑자기 속이 따끔거렸다.
아드리안과 함께한 시간들……. 루시에게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기억인 걸까.
쓸데없이 풍부한 필릭스의 상상력은 나란히 앉아 있는 루시와 아드리안의 모습을 곧바로 그의 머릿속에 펼쳐 놓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런 건…… 이런 건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아.
꽉 다문 그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다행히 루시는 아드리안에 관한 얘기는 그쯤에서 관두고 책상 위에 놓아둔 책을 끌어당겼다.
“아무튼 도서관보다 여기가 훨씬 나은 것 같아요. 주말에 끝까지 하지 못했으니 오늘 그만큼 더 열심히 해 봐요.”
루시가 몇 권의 책을 추려 필릭스에게 건네주었다.
“아, 그리고.”
그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덧붙였다.
“노트에 공부와 관련 없는 말을 적는 건 금지예요.”
저번처럼 엉뚱한 질문은 하지 말고 공부에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필릭스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사실 그는 루시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들을 잔뜩 생각해 왔던 것이다.
“아, 그리고 졸아서도 안 돼요. 알겠죠?”
“네, 선생님.”
필릭스가 무심코 던진 장난스런 말에 루시가 또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황급히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필릭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오늘은 응원 안 해 줘?”
“네?”
“저번엔 해 줬잖아. ‘선배, 할 수 있어요!’라고.”
“아.”
갑작스런 그의 요구에 루시가 당황한 듯 눈알을 굴렸다. 준비해 온 범위를 벗어난 선생님의 기습 질문에 당황한 학생처럼 귀여워 보였다.
열심히 고민하던 그녀가 마침내 주먹을 슬그머니 쳐들고 외쳤다.
“꼬, 꼴찌 탈출……! 할 수 있어요……!”
묘하게 응원 같지 않은 응원이었다. 그러나 필릭스의 입꼬리는 주체할 수 없이 솟아올랐다.
쑥스러운 듯 얼른 시선을 돌린 루시가 소매를 척척 걷어붙이고 펜을 꼭 그러쥐었다. 곧 부릅뜬 눈으로 책을 읽어 내려가는 루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 이마를 잠깐 흐뭇하게 바라본 필릭스는 그녀를 따라 척척 소매를 걷어붙인 뒤, 펜을 쥐었다. 곧 그가 평소와는 달리 성실한 자세로 책을 펼쳤다.
루시가 진지한 얼굴로 공부에 임하려는 모습을 보니 그녀를 방해해서는 안 되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참 성실하고 야무져.
분명 루시네 부모님은 루시 때문에 속상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을 거야.
필릭스는 만나 본 적도 없는 루시네 부모님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루시를 대견한 얼굴로 한 번 바라본 후,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숙한 분위기의 교실에는 꽤 오랫동안 책장 넘기는 소리와 필기 소리만이 착실하게 울려 퍼졌다.
음?
필릭스는 귀를 쫑긋 세웠다. 분명 평화로운 분위기임이 분명한데 자꾸만 신경이 곤두섰다.
앞에 루시가 있어서 그런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뭔가 찝찝한 기분마저 들었다.
계속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필릭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맞은편의 루시도 눈을 들어 어리둥절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쉿!”
그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었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교실 뒤쪽, 책상과 의자들이 높게 쌓인 곳으로 다가갔다.
필릭스가 그 너머로 사라진 뒤.
갑자기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쌓여 있던 책상과 의자들이 아래로 와르르 무너졌다. 깜짝 놀란 루시가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필릭스 선배!”
그녀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괜찮아.”
책상과 의자가 혼잡하게 뒤섞인 아래에서 필릭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야야…….”
그리고 필릭스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신음 소리도.
의자 더미가 한 번 들썩이더니 그 속에서 필릭스가 우뚝 솟아났다. 그는 한 남학생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바로 도서부 1학년 노엘 로먼이었다.
“웬 쥐새끼가 우리를 훔쳐보고 있었네.”
필릭스가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목이 졸린 노엘이 캑캑거리며 힘겹게 말을 뱉어 냈다.
“훔쳐보다뇨……! 그저 나갈 타이밍을…… 본 것뿐이라고요……! 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