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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4화 (24/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4화

예상치 못한 물음에 필릭스가 이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전혀.”

그가 딱 잘라 대답했다.

“아버지가 아카데미를 방문하신 건 너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하지만 필릭스의 대답에도 루시의 얼굴에서는 걱정하는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그의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공작님이나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신다면 저에게 솔직히 말하셔도 돼요. 전 선배 입장을 충분히 이해…….”

“난 너랑 계속 같이 공부할 거야.”

이번에도 필릭스가 단호하게 말하며 루시의 말을 끊었다.

“네 배경을 들먹이면서 나와 함께 있는 걸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다면…….”

필릭스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루시 앞에서는 내뱉고 싶지 않은 험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생각은 하지 마.”

그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필릭스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애써 눌러놓았던 불안함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은 아버지가 루시에 대해 모르고 있더라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특별히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은 그에 대해 궁금해하곤 했다.

오히려 숨기면 숨길수록 사람들은 더욱 그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평소와 다른 필릭스 베르크 공자의 조심스러운 행동은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테니까.

게다가 그렇게 꽁꽁 숨기려 하는 상대가 귀족 영애가 아닌 평민 출신의 여학생이라면 더더욱.

자신은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평생을 남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다. 감히 앞에서 그를 비웃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루시는 사정이 달랐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그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말들 속에서도 루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필릭스와 엮여 소문이 나 봤자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것도 루시일 것이다.

게다가 그 소문이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간다면? 과연 도서관처럼 개방된 곳에서 루시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일까?

필릭스는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내 욕심으로 루시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루시, 생각해 봤는데.”

잠시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서관에서는 공부가 잘 안 되는 것 같아. 분위기가 너무 답답해서. 우리 공부하는 장소를 바꿔 보는 건 어떨까?”

필릭스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도서관 말고 빈 교실은 어때?”

“빈 교실이요?”

“응. 어차피 다섯 시 이후엔 대부분의 수업이 마무리되니까 빈 교실도 많잖아. 아무 데나 들어가서 공부하면 좋을 것 같아. 좀 덜 답답할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너와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지긋지긋한 시선들도 없을 거고.

“어때?”

그가 초조하게 루시의 대답을 기다렸다.

질문을 던져 놓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과도한 제안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루시가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승낙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동시에 솟아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후, 루시가 마침내 입술을 열려던 찰나.

“으으아…….”

누군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던 교실 뒤쪽에서였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던 필릭스와 루시는 흠칫 놀라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빈 책상 뒤에서 누군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이어 크게 하품을 한 그가 으읏,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별안간 나타난 사람은 갈색 곱슬머리를 가진 웬 남학생이었다.

나란히 이어 붙인 의자 위에서 몸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 그들이 오기 한참 전부터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게 분명한 것 같았다. 부스스한 머리의 그가 졸린 눈을 깜빡이며 필릭스와 루시를 바라보았다.

몽롱해 보이는 와중에도 희멀건 얼굴에서 호박빛의 두 눈이 반짝였다.

“……노엘?”

그의 얼굴을 먼저 알아본 루시가 이름을 불렀다.

“아, 역시 루시 선배였구나.”

그 남학생이 눈을 끔뻑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잠결에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했죠.”

그가 루시에게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곱상한 두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동시에 필릭스의 얼굴에는 곧장 험상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이건 또 뭐야.

그의 험악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학생은 필릭스에게도 아는 체를 했다.

“아드리안 선배도 함께 계셨네요.”

“아드리안 아닌데.”

필릭스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 그럼 필릭스 베르크 선배님이시군요.”

본능적으로 필릭스는 그 남학생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무슨 말을 하건 헤실 웃으며 넉살 좋게 대답하는 모습이 벌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배, 1학년 도서 부원인 노엘 로먼이에요.”

루시가 그에게 남학생을 소개했다. 그러자 남학생도 자리에서 일어나 필릭스를 향해 고개를 꾸벅했다.

“안녕하세요, 필릭스 선배님.”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러나 필릭스는 인사도 없이 노엘에게 대뜸 물었다. 무언가 아니꼽다는 듯이 홱 올라간 눈초리가, 방금까지 루시를 바라보던 부드러운 눈길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네? 아, 뭐……. 졸려서 낮잠 좀 자고 있었어요.”

“우리 얘기를 엿들었나?”

추궁하는 듯한 필릭스의 어투에 노엘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뇨, 엿듣지 않았는데요.”

그러나 필릭스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빛으로 노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엘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필릭스를 루시가 가만히 불렀다.

“왜 그러세요?”

너한테 실실 웃으며 꼬리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솔직히 대답할 수 없었던 필릭스가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말했다.

빈 교실 안에 미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필릭스는 난데없이 불쑥 나타난 1학년을 언짢은 눈으로 쳐다보았고 노엘은 여전히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 불편한 침묵을 깨트린 것은 복도에서 들려온 어느 목소리였다.

“루시! 여기 있어?”

루시를 찾는 한 여학생의 말소리였다.

“아! 금방 갈게, 제미마!”

문밖을 향해 대답한 그녀가 필릭스를 보며 급히 말했다.

“죄송해요, 선배. 저 다음 수업 가 봐야 해요. 나중에 마저 얘기해요.”

그녀가 발걸음을 재촉하며 문으로 걸어갔다. 그녀에게 ‘빈 교실에서 만나자’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한 그가 황급히 그녀를 뒤쫓아 갔다.

“루시, 잠깐……!”

필릭스가 문 너머로 사라지려는 그녀를 붙잡으려는데, 그녀가 먼저 돌아보았다.

“오늘 오후 다섯 시. 삼 층 맨 끝 교실이요.”

루시가 필릭스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비밀스러운 통보를 남긴 뒤 그녀는 교실을 나갔다.

루시가 바람처럼 사라진 문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던 것도 잠시. 이내 그것이 자신의 제안에 대한 수락이라는 것을 깨달은 필릭스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걸렸다.

계속 루시와 함께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단둘이.

“두 분 사귀시는 거예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필릭스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가 서늘한 얼굴로 노엘을 돌아보았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아뇨, 그냥…….”

필릭스의 싸늘한 반응에 당황한 노엘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필릭스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교실을 떠나려 했다. 그런데 노엘이 할 말이 있는 듯 그를 불러 세웠다.

“저, 선배님!”

필릭스가 돌아보자 노엘이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교복을 도둑맞으셨을 때요. 훔쳐 간 사람의 얼굴도 보셨어요?”

그 말에 필릭스가 얼굴을 삐딱하게 구기며 노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역시 우리 얘기 엿들은 거 맞잖아.”

“엿들은 게 아니라요! 그냥 잠결에 제 귀에 들린 거예요!”

노엘이 억울한 듯 말했다.

“그런데 그건 네가 왜 물어?”

“훔쳐 간 사람을 잡는데 제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

“됐어, 필요 없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루시 앞에서 실실 웃지도 말고.

필릭스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매서운 눈빛을 보내준 뒤 교실을 떠났다.

* * *

기숙사에 들러 교복으로 갈아입은 필릭스가 옆자리에 앉자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월요일 아침부터 바쁘네.”

아드리안의 말마따나 정신없는 월요일이었다.

새벽부터 불길한 꿈을 꾸질 않나, 연무장에서는 알레르기 약을 도둑맞질 않나.

그나마 루시와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때가 오늘 하루 눈 뜨고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었다.

이제 필릭스에게 남은 문제는 하나뿐이었다.

“……정말로 시험지에 내 이름을 써서 낼 참이야?”

필릭스가 불쑥 던진 질문에 아드리안이 인상을 구겼다. 그가 조심스레 교실을 한 번 휘 둘러보았다.

알렉과 자비스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잡담하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도 자신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가 속삭이듯 답했다.

“조용히 해, 교실이야. 그 얘긴 어제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멍청한 짓인 거 같아서. 애초에 우리 성적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게 말이 되냐? 애들이 바보도 아니고.”

“바보는 아니지만 바보인 척은 하겠지.”

아드리안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뚜렷한 증거가 없는 이상, 베르크 공자들의 성적에 감히 의의 제기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릭스가 부루퉁한 얼굴로 의자에 삐딱하게 기댔다.

“그리고 난 동생 성적이나 빼앗는 한심한 인간이 되는 거고.”

그의 말에 아드리안이 못마땅한 눈빛을 보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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