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3화
“아, 젠장!”
필릭스가 욕설을 내뱉었다.
약을 도둑맞다니!
필릭스는 젖은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루시가 얼마나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들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더욱 애가 탔다.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 새 교복을 꺼내 입을 생각조차 사라진 필릭스는 세탁된 다른 수련복을 대충 꺼내 입었다.
아카데미 안에서 단정한 교복 차림을 유지하는 것은 제일 기본적인 학칙이었다. 그러나 루시가 준 약을 잃어버린 현 시점에서는 그런 걸 따질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교실에 수련복을 입은 채로 나타난 그를 친구 알렉이 장난스런 얼굴로 맞아 주었다.
“오, 필릭스!”
그가 다가오더니 필릭스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
“드디어 아르켈 선생을 베기로 결심한 거야?”
대답할 기운도 사라진 필릭스가 대꾸도 않고 터덜터덜 자리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야?”
자리에 앉아 있던 아드리안이 그의 수련복 차림을 보며 물었다.
“지금은 역사 시간이야. 검술은 내일이고.”
“나도 알아. 연무장에서 누가 내 교복을 훔쳐 갔어.”
“교복을?”
황당한 대답에 아드리안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나 곁에 있던 또 다른 친구 자비스가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네가 아드리안인 줄 알고 그랬나 보네.”
“그래, 이제 곧 시험 기간이잖아.”
알렉도 거들었다.
“몇몇 놈들은 아드리안의 물건을 가지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다고.”
제노미움 아카데미에는 매 시험 기간마다 학년 수석들을 괴롭히는 미신 하나가 존재했다. 그건 바로 ‘수석의 물건을 지니고 시험을 보면 성적이 오른다’는 전혀 검증이 되지 않은 소문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미신의 존재나 그것을 믿는 학생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고작 물건을 몸에 지니는 것만으로 성적이 오른다면 공부 따윈 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몇몇 학생들은 그런 상식적인 판단도 하지 못할 정도로 성적에 대한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대체로 간섭이 심하고 극성맞은 귀족 부모를 둔 학생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모를 두려워했다. 그만큼 낮은 성적에 대한 부모들의 질타를 피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기도 했다.
때문에 아드리안은 시험 기간이 돌아올 때마다 미신에라도 기대 성적을 올리고 싶은 학생들에게 펜이나 넥타이 같은 사소한 물건들을 도둑맞아야 했다.
“……그딴 미신 때문에 씻고 있던 사람의 옷을 훔쳐 가?”
필릭스가 서슬 퍼런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맞아, 훔치는 건 잘못된 행동이지.”
“우리처럼 당당하게 달라고 해야지.”
알렉과 자비스가 아드리안에게서 받은 펜을 자랑스럽게 들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네.”
아드리안이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의문을 던졌다.
“이제까지 없어진 물건이라고 해 봤자,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펜이 고작이었는데. 교복을 가져가다니 너무 지나친 거 아냐?”
사실이었다. 아드리안이 시험 기간마다 물건이 없어져도 잠자코 있었던 건 사라지는 물건들이 그다지 비싸지 않은 사소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수상하다 할 만한 부분이었지만 필릭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라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아니었다.
“안 되겠어. 찾아내서 손모가지를 분질러 버리든가 해야지.”
“너답지 않게 왜 그렇게까지 흥분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필릭스를 보며 아드리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차피 여벌의 교복은 많잖아.”
“옷이 문제가 아니라……!”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필릭스는 또다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이제 그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루시가 준 소중한 약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자신에게. 그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약을 도둑맞아버린 한심한 자신에게.
* * *
땅 밑으로 꺼져 버린 필릭스의 기분은 수업 시간 내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알레르기 약을 잃어버려 속상한 와중에 새벽에 꾼 뒤숭숭한 꿈이 계속 떠올라 그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한 탓이었다.
물론 꿈에서 본 광경들은 모두 실제가 아니었다. 아드리안은 옆에서 멀쩡히 살아 있었고, 공작은 루시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속에서 창백하고 몽롱한 얼굴로 아버지 옆에 서 있던 루시를 떠올릴 때마다 필릭스는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어서 그녀를 만나 무슨 말이든지 간에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가 괜찮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어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가 버렸던 일도 사과해야 했다.
분명 놀랐을 텐데.
정원을 떠나가는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서 있던 루시의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더욱 착잡해졌다.
수업이 끝난 후, 필릭스는 교실을 빠져나와 루시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녀가 어디서 무슨 수업을 받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무작정 아카데미 복도를 떠돌았다.
시커먼 수련복을 입은 그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복도의 학생들이 서둘러 양옆으로 갈라졌다.
필릭스는 곧 이 층의 한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던 루시를 발견했다. 그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교실을 들여다보았다.
미간에 한껏 주름이 잡힌 채 루시는 칠판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시험 기간이 다가와서인지 집중하는 그녀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 보였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칠판을 노려보던 루시가 뻑뻑해진 눈을 몇 번 끔뻑거렸다. 그러더니 이번엔 뒷덜미가 아픈지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하는 모양인지 선생님 몰래 하품을 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필릭스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그녀의 기분이 괜찮아 보여 마음이 놓였다.
……그래, 그건 그냥 꿈이었을 뿐이야. 아버지는 루시의 존재 자체도 몰라.
꿈으로 인해 줄곧 뒤숭숭했던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그는 비어 있던 옆 교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루시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열리는 소리와 웅성대는 소리가 한데 뒤섞여 들려왔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우르르 복도로 몰려나오고 있었다.
필릭스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루시가 오는지 확인했다. 곧 소란스러운 학생들의 행렬 속에서 연갈색 머리를 뒤로 땋은 작은 얼굴이 보였다.
루시는 이쪽으로 걸어오며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곤란한 상황이라도 생겼는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가방에 정신이 팔려 그냥 지나쳐 가려는 루시를 필릭스가 붙잡았다. 그의 손에 이끌려 빈 교실로 들어온 루시가 놀란 눈으로 필릭스를 올려다보았다.
“필릭스 선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울상이던 그녀가 금세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필릭스를 보고 반가워하던 것도 잠시, 그녀가 필릭스의 수련복을 보더니 말했다.
“선배, 교실 안에서 교복 외의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건 벌점 대상이에요!”
“그건 아는데.”
필릭스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대꾸했다.
“연무장에서 누가 내 교복을 가져갔어.”
“교복을요?”
“학년 수석의 물건을 지니고 시험을 보면 성적이 오른다는 미신이 있잖아. 내가 아드리안인 줄 알고 가져갔나 봐.”
“아.”
그의 설명에 루시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녀가 자신의 가방을 꼭 움켜쥐었다.
필릭스는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루시 역시 아드리안처럼 학년 수석이라는 점을 말이다.
“표정이 왜 그래? 설마 네 물건도 누가 가져간 거야?”
“그게…….”
망설이던 루시가 한숨을 푹 내쉰 뒤 이야기했다.
“가방에 넣어 뒀던 장신구 하나가 없어졌어요. 안쪽 깊숙이 넣어 놨는데 누가 가져간 거 같아요.”
“장신구? 언제쯤 없어졌는데?”
“모르겠어요. 오늘 아침에 들어 있는 걸 확인한 후에는 들여다보지 않았거든요.”
조금 붉어진 눈시울로 이야기하는 루시를 보자 필릭스는 덩달아 속이 상했다.
“그렇게 중요한 거야? 혹시 선물 받은 거야? 아니면 비싼 거라서 그래?”
그게 뭐든 간에 내가 얼마든지 사 줄 수 있는데.
그 말이 필릭스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어떤 물건이든 간에 루시에게 소중한 것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할 자신이 있었다.
“선물 받은 건 아니에요. 비싼 것도 아니고요. 그건 나중에 선배에게…….”
루시가 필릭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을 듯 말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이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입을 다물었다.
“나에게?”
루시가 말을 끝맺지 못하자 필릭스가 궁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무튼 이번 일은 이상하네요.”
그녀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무리 시험 기간이 다가오고 있다지만 이렇게 가방까지 뒤져서 물건을 가져간 건 처음이에요. 이제껏 누가 몰래 가져간 물건이라고 해 봤자 책상 위에 올려 둔 펜이나 머리끈이 다였거든요. 그리고 대부분은 잠깐 빌려 달라고 했지 훔쳐 가진 않았어요.”
앞서 아드리안도 미심쩍은 얼굴로 했던 말이었다. 아무래도 이 아카데미 안에 성적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무모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는 누군가가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어쩔 수 없죠. 아무런 단서도 없으니 아마 못 찾을 것 같아요. 훔쳐 간 본인이 제 발로 돌려주지 않는 이상은.”
루시가 실망스런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선배. 무슨 일로 절 찾으셨던 거예요?”
화제를 바꾸며 그녀가 물었다.
“아……. 너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할 얘기요?”
“어제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어. 내가 약속 못 지키고 중간에 가 버렸잖아.”
필릭스가 미안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뒤로 계속 네가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루시가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전 괜찮아요. 오히려 선배 표정이 좋지 않아서 그게 더 걱정이었어요. 혹시 저 때문에…… 공작님께 혼나셨어요?”
그렇게 묻는 루시의 표정이 조심스러웠다.
필릭스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질문에는 ‘귀족가의 영애도 아닌 자신과 함께 있다가 혼난 게 아니냐’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