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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2화 (22/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2화

“난 괜찮아, 필릭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자. 별거 아니니까.”

“별거 아니라고?”

동생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필릭스가 인상을 썼다.

“오늘 일도? 시험지를 바꾸는 것도? 네가 이룬 결과를 내가 훔치는 것과 다름없는데, 별거 아니라고?”

“그래, 별거 아니야.”

아드리안이 필릭스를 진지한 얼굴로 마주 보았다.

“학생회장에, 동아리에, 수석에…… 이것저것 놓치지 않으려 열심히 하긴 했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아. 나에게 중요한 건 너와 어머니야.”

아드리안이 천천히 다가와 필릭스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가 다정한 손길로 필릭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난 정말 아무렇지 않아. 어차피 네가 작위를 물려받고 나면 더 이상 이런 일도 없을 테니까.”

그가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

“그때까지만 참으면 돼. 굳이 아버지를 화나게 할 일은 만들지 말자.”

* * *

그날 새벽.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든 필릭스는 꿈을 꾸었다.

그는 공작가 저택의 어느 방 안에 있었다. 문이 굳게 잠겨 나갈 수 없는.

그는 연거푸 열리지 않는 손잡이를 잡아당겨 보다가 이내 포기하고 방 안을 돌아보았다. 맞은편에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창밖으로 또 다른 자신이 보였다. 고상하게 옷을 갖추어 입은 자신은 귀족들 앞에서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완벽한 예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답지 않게 점잖고 사근사근한 태도였다.

우아한 손짓과 목소리에 홀려 귀족들은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은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는 귀공자 그 자체였다.

바로 그때, 사람들을 향해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필릭스를 바라보았다.

방 안의 필릭스와 창밖의 필릭스가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창밖의 필릭스가 푸스스,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아아.’

그제야 필릭스는 깨달았다.

‘저건 내가 아니구나.’

힘없이 지어 보이던 미소를 능숙하게 감추며 아드리안은 다시 사람들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에 전념했다.

필릭스는 창문을 힘껏 두드려 보았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드리안! 네가 왜 거기 있어?”

소리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창밖의 아드리안은 계속해서 필릭스 대신 베르크 공자로서의 일정을 소화해 나갔다. 필릭스는 방 안에 갇혀 멍하니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창밖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커다란 마차 한 대가 달려왔다. 아드리안이 천천히 마차로 다가가 섰다.

“아드리안!”

필릭스가 창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어딜 가는 거야?”

그의 외침에 아드리안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음울한 눈빛으로 필릭스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리부르 항구.”

“가지 마! 아드리안!”

필릭스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두 주먹으로 힘껏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드리안이 마차에 올랐다. 그를 태운 마차가 창문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말들이 점점 속도를 올렸다.

“낭떠러지 조심해!”

그 순간 필릭스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그 외침과 함께 마차 앞에는 정말로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망연한 얼굴로 지켜보는 사이에 마차는 낭떠러지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필릭스는 허망한 눈을 창문에 바짝 붙인 채 마차가 사라진 지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죽었어.”

그가 붉어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드리안이 죽었어.”

찰칵.

굳게 잠겨 있던 방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아버지였다.

베르크 공작은 무감한 표정으로 슬퍼하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이 죽었어요.”

필릭스가 분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하더구나.”

공작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는 느긋하게 문에 기댄 채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 가문의 미래는 네 손에 달려 있다. 진짜 베르크 공자인 네가 가문을 이끌어 나가야겠지.”

필릭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얗게 질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버지가 이용하던 아드리안은 이제 이 세상에 없어요. 그런데도 제가 아버지 말에 순순히 따를 것 같은가요?”

“아무렴. 따라야지.”

필릭스의 도발에도 공작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에게는 말이 하나 더 있거든.”

그가 옆으로 비켜섰다.

필릭스가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사이, 문가에는 또 다른 사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배…….”

한 갈래로 땋은 연갈색 머리. 멍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뻣뻣한 자세로 선 루시가 텅 빈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 * *

“헉!”

필릭스는 번쩍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고풍스럽게 그려진 천장화 위로 어슴푸레한 새벽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루시도, 공작도 없었다. 단지 꿈이었다.

그는 축축해진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길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꿈속에서와는 달리, 창밖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자신을 대신하는 아드리안도, 귀족들도 없었다.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한 하늘이 고요하고 푸르스름한 빛을 온 교정 위로 흩뿌리고 있을 뿐이었다.

필릭스가 꿈속에서 그토록 소리쳐 불렀던 아드리안은 옆 침대에서 색색 조용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그 역시 무서운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이마에는 살짝 주름이 잡힌 채였다.

어젯밤, 묘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형제의 대화는 흐지부지 끝이 났다.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았지만 필릭스는 아드리안에게 차마 더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아드리안은 지쳐 보였다. 학생회와 도서부를 오가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던 때에도 그토록 생기 없는 눈빛을 보인 적은 없었다.

필릭스는 아드리안이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을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그저 눈을 감은 채 동생이 내는 작은 소리들을 들으며 가만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아드리안이 하나 남은 촛불을 불어 끄고 자신의 침대에 눕자 방 안에 깊은 정적이 찾아왔다. 이따금 창문을 흔들고 도망가던 가을바람도 어디론가 꽁꽁 숨어 버린 듯 조용하기만 했다.

그래서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자신처럼 아드리안도 쉬이 잠들지 못하고 심란한 밤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아무리 기다려도 잠든 동생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한동안은 그런 고요함과 적막함이 지속되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마저도 악몽으로 깨 버린 탓에 필릭스는 여전히 피곤했지만 다시 누워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다시 악몽이 찾아올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침대에 앉아 날이 완전히 밝아올 때까지 창밖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동녘 하늘 위로 해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더니, 순식간에 세상을 환하게 밝혀 나가기 시작했다.

더불어 필릭스의 잠도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그는 아드리안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선 필릭스가 향한 곳은 욕실도 식당도 아니었다. 그는 곧장 연무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억지로라도 생각을 그만두고 꿈속에서 보았던 불길한 광경들을 털어 버리고 싶었다.

연무장에 도착한 필릭스는 곧장 손에 검을 감아쥐었다. 곧 연무장에는 공중을 가르는 칼날 소리가 세차게 울려 퍼졌다. 스스로를 막다른 지경에까지 몰아붙이려는 듯 쉼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기를 한참.

챙그랑!

필릭스는 검을 내동댕이치며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하아…….”

그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고 폐를 찌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그는 쓰러진 채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누워 있으니 고통이 점차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평온함도 잠시뿐. 혹독한 수련에서 벗어난 몸은 애써 떨쳐 내려 했던 광경들을 무서운 속도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낭떠러지 너머로 사라지던 마차…… 공작의 싸늘한 얼굴…… 그리고 그 옆에서 창백한 얼굴로 서 있던 루시.

아냐. 그건 그냥 개꿈이야.

필릭스가 되뇌었다.

아마도 그건 아드리안과 루시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와중에 필릭스의 무의식이 만들어 낸 망상일 것이다.

떨쳐 버리자. 잊어버리자.

필릭스는 거친 손길로 머리칼을 헤집은 뒤 몸을 일으켰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는 새 시간은 많이 흘러가 있었다.

필릭스가 던져 두었던 검을 집어 들었다. 자신의 숨과 열기로 가득 찬 연무장을 떠나 그는 비척비척 욕실로 향했다.

연무장에 딸린 작은 욕실에서 땀을 씻어 낸 그는 교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갔다. 그런데 옷을 보관해 놓았던 사물함을 열었을 때 그가 마주한 것은 텅 빈 내부였다.

“뭐야.”

그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곧 사물함을 착각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가 옆 사물함을 열었다. 그러나 그곳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그 옆 사물함도. 또 그 옆도.

그의 교복은 어디에도 없었다.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

이 황당한 상황에 그가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헛웃음을 뱉어 내던 것도 잠시. 필릭스의 얼굴에 큰 낭패감이 서렸다.

“알레르기 약!”

루시가 만들어 준 약이 그 교복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옷 따위는 몇 번을 털어 가도 상관없었지만 그 약은 달랐다.

필릭스는 망설임 없이 가운 차림으로 연무장을 뛰쳐나갔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상한 놈이 보이면 당장이라도 덮쳐 심문이라도 할 기세였다.

조금 떨어진 길에서 아침 수업을 들으러 가던 1학년 무리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에 필릭스는 그들을 매서운 눈빛으로 훑었다. 자신의 교복을 숨기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1학년들은 그의 눈빛에 겁을 먹고 후다닥 도망쳐 버렸다.

그들이 도망친 뒤에는 아무도 그 주변을 얼씬거리지 않았다. 개미 한 마리조차도. 그 어디에서도 교복을 가져간 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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