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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1화 (21/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1화

“정말 신기하다. 난 그냥 여기저기 널린 흔한 잡초인 줄 알았는데.”

“잡초도 약이 될 때가 있어요.”

루시가 그 말로 꽃에 대한 설명을 끝냈다. 그러곤 스스로도 말을 너무 많이 해 버린 자신의 모습이 쑥스러웠는지 민망하게 웃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아는 풀이 있어.”

필릭스가 주변에서 넓적한 모양의 잎을 가진 풀을 찾아내더니 망설임 없이 그 잎을 땄다.

“이건 모가나라는 풀이야. 이걸 이렇게 씹어서.”

그가 잎을 입에 넣고 몇 번 씹었다. 그 후 다시 뱉어 낸 잎을 팔뚝 위에 얹었다.

“이렇게 가려운 부위에 올려 두면 화한 느낌이 나면서 덜 간지러워.”

그가 ‘맞지?’ 하는 얼굴로 루시를 바라보았다.

“알레르기가 있다 보니 이 풀의 효능만은 분명히 기억나……. 다른 건 잘 모르지만.”

“맞아요.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게다가 모가나 풀은 주변에서 보기도 쉬운 편이라 언제든 뜯어 사용하기 좋아요.”

루시가 빙그레 웃으며 필릭스를 칭찬했다.

자신을 향해 웃어 주는 루시를 보자 필릭스는 또 한 번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고작 미소 하나에 이렇게나 행복해지다니.

필릭스는 스스로도 자신이 바보 같다고 느껴졌다.

그래,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좋아.

이렇게 너와 같이 있을 수 있다면…….

“필릭스!”

누군가 그를 소리쳐 부르는 소리에 고요하던 공터의 평화가 깨졌다.

허둥지둥 뛰어오는 발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필릭스가 돌아보았다. 친구인 알렉이었다.

단숨에 정원을 가로질러 필릭스 앞에 도착한 그가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필릭스, 당장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해!”

“무슨 일이야?”

“베르크 공작께서 오셨어. 지금…… 교장실에서 널 기다리고 계셔.”

“아버지께서?”

필릭스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공작이 아카데미를 방문하는 건 짐작도 못 했던 일이다.

개항식은 어쩌고?

오늘은 분명 리부르 항구 개항식이 있는 날이라 하지 않았던가. 중요한 행사이니만큼, 공작도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필릭스 선배.”

루시가 그를 불렀다. 그녀 역시 공작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것 같았다.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당황스러움이 떠올라 있었다.

“어서 가 보세요.”

“루시.”

필릭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행복했던 순간이 누가 도려내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래. 미안해. 공부는 나중에 같이하자.”

그의 말에 루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필릭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떠나던 그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루시가 여전히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방문보다 루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필릭스의 마음이 바위처럼 무거웠다.

* * *

교장실 앞. 필릭스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대답하는 목소리는 교장의 것이 아니었다. 필릭스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베르크 공작이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그는 커다란 창문 앞에 서서 너른 교정의 풍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필릭스의 기척에 공작이 천천히 돌아섰다.

베르크가의 여느 남자들처럼 눈부신 금발에 큰 신장을 가진 그가 필릭스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의 표정은 오랜만에 만난 아들 앞에서 짓는 표정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딱딱하기만 했다.

그러나 필릭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아버지의 표정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몰라볼 정도로 수척해진 그의 몰골이었다.

핼쑥해진 볼 위로 툭 불거진 광대뼈와 퀭한 눈, 눈 아래 짙게 드리운 그림자. 과중한 업무로 인해 고작 몇 달 새 더욱 야윈 그의 얼굴은 더욱 예민하고 섬뜩해 보였다.

공작이 자신을 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자 필릭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개항식은 어쩌고 오셨어요. 아버지께서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 아닌가요.”

그러자 공작이 표정만큼이나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걱정 마라. 개항식엔 나 대신 베르크 공자가 참석해 있으니까.”

그 말에 필릭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거기에 아드리안이 가 있단 말인가요?”

지금까지 그는 동생이 어머니를 보러 공작가에 간 줄로만 알고 있었다. 아드리안 역시 개항식에 참석한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물음에 공작이 비웃음을 흘렸다.

“아드리안이라……. 글쎄, 공식적으론 필릭스 베르크 공자가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지.”

필릭스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아드리안에게 개항식에서 저인 척하라 시키셨단 말인가요?”

“네가 일방적으로 불참을 통보했으니 아드리안이라도 보내야지. 어차피 얼굴도 똑같은데 누가 너희를 알아보겠느냐.”

공작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필릭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대역으로 동생이 이용되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그 사실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그러나 그를 화나게 한 것은 공작의 태연한 얼굴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다른 사람의 대체품처럼 취급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태도였다.

“왜 화난 얼굴이지?”

공작이 그를 보며 물었다.

“내게 일방적으로 불참을 통보하면서 이런 결과도 예상치 못한 모양이지?”

“말씀드렸잖아요. 시험 준비 때문이라고.”

“아, 그래. 시험 준비. 설마 준비라는 게 지난번 저질렀던 그 멍청한 짓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공작이 모든 시험에서 백지를 냈던 필릭스의 행동을 넌지시 거론하며 빈정거렸다.

“뭐, 네가 학업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나로서도 기쁜 일이다만…….”

공작이 말을 이어 갔다.

“이제 와서 정신 차렸다고 한들 크게 바뀌는 게 있을까 싶구나. 성적이 그렇게 단기간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나도 너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 주고 싶은데. 단숨에 수석까지 차지할 확실한 방법을 알려 주마.”

공작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결코 호감을 느끼게 하는 미소는 아니었다.

“이번 시험에서 아드리안과 답안지의 이름을 바꾸어 내도록 해라.”

“아버지.”

필릭스가 대번에 인상을 쓰며 공작을 노려보았다.

“미치셨어요?”

짝!

필릭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얻어맞은 뺨이 얼얼했다.

“말조심해라.”

공작이 평온하게 손을 내리며 경고했다.

“네가 변변치 못한 행실로 동생보다 못난 꼴을 보이고 있으니 이러는 것 아니냐.”

필릭스가 입술을 짓씹었다.

“아드리안을 이용하지 마세요.”

그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저는 아버지 말에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시험지에도 제 이름을 써서 제출할 거고요.”

“그래?”

공작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어떡하지? 아드리안은 이미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공작이 아들의 화난 얼굴을 보며 빈정거렸다.

“교장이 퍽 난감해하겠구나. 필릭스 베르크의 시험지만 두 장일 테니.”

“아버지!”

필릭스가 분개하여 소리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공작이 만만치 않게 노기를 띤 얼굴로 필릭스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이 모든 건 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은 탓이야! 감히 가문의 사업을 등한시하고 내게 멋대로 통보를 해?”

그의 시체처럼 파리한 얼굴이 필릭스의 눈앞에서 번뜩였다.

“그동안 네 불성실하고 제멋대로인 행동을 그러려니 하고 눈감아 주었다만 이번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말을 끝낸 공작이 뒤로 물러났다. 그가 흥분을 가라앉히듯 잠시 창문 앞에 서서 교정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늘 같은 일은 다신 없길 바란다, 필릭스.”

잠시 후, 목소리를 낮춘 그가 경고하듯 읊조렸다.

“앞으로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아드리안이 네가 벌인 짓을 뒷수습하게 될 거다. 바로 오늘처럼 말이야. 어디 또 한 번 나에게 멋대로 통보해 보려무나.”

필릭스는 제자리에 선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던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지경이었다.

아드리안이 자신 때문에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저에 대한 무력감이 그의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네가 내 뒤를 잇게 되는 날, 넌 가문의 모든 사업과 토지를 관리하게 될 거다. 그때를 위해 힘써도 모자랄 텐데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공작이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아드리안을 이용하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드리안도 저와 똑같은 아버지 아들이에요. 아버지의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받을 자격이 있다고요. 그런 식으로 이용당할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공작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건 그 애의 운명이야. 한날한시에 태어났다고 해서 운명까지 같을 순 없지. 차남의 역할이란 후계자 자리를 탐내지 않고 형이 가문을 이끌어 가는 동안 옆에서 돕는 것뿐이다. 그 역할 외에 그 애가 받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공작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덧붙였다.

“베르크의 유산은 그 어떤 경우에도 쪼개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 * *

아드리안이 기숙사로 돌아온 것은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조용히 들어서던 그는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인영을 보고 흠칫 놀라 멈춰 섰다.

이내 희미한 달빛 속에서 형의 얼굴을 알아본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필릭스. 안 자고 뭐 해.”

필릭스는 대답 없이 일어나 초에 불을 켰다. 밝아진 방 속에서 똑 닮은 두 얼굴이 불빛을 받아 일렁거렸다.

필릭스가 동생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틀 동안 밤낮없이 아카데미에서 리부르까지 왕복했을 아드리안의 얼굴이 무척 피곤해 보였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마침내 질문을 던지는 필릭스의 얼굴에는 미안한 감정과 화난 감정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겉옷을 벗었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내가 개항식에 간다고 하면 네가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어.”

“당연히 가만히 안 있지! 대체 네가 왜 아버지의 꼭두각시처럼 굴어?”

“필릭스.”

“그리고 시험지의 이름을 바꾼다는 건 또 뭐야? 정말로 아버지께 그러겠다고 했어?”

“그래, 그러기로 했어.”

“너 도대체…….”

아드리안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필릭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대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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