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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0화 (20/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20화

시간이 정오를 향해 달려갔다. 해가 점점 높이 떠올랐다. 도서관 안이 따스한 가을볕에 잠겼다.

필릭스는 아까 전부터 몰래 무언가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작년의 기억을 떠올려 2학년 때 쳤던 시험 내용을 고대로 옮겨 적고 있었다. 오늘 헤어질 때 루시에게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따스한 볕 아래 장시간 앉아 있어서인지 점점 졸음이 쏟아졌다. 그의 손이 점점 느려지는가 싶더니 자꾸만 눈이 감겼다.

반면 루시는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눈빛이 또랑또랑했다. 정말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수석을 하겠지…… 정말 대단해…….

필릭스는 속으로 루시를 칭찬하며 눈을 끔뻑거렸다. 쏟아지는 졸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이 일순간 스르륵 감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책상에 마주 댄 볼 아래서 보들보들한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코끝에서 루시에게서 나던 약초 향이 풍겨 왔다.

필릭스가 눈을 떴다. 어느새 그는 포개어 접은 루시의 가디건을 베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서는 두 개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모른 척하는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어 갔다.

필릭스는 책상에 엎드린 채 그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콕.

그가 손가락으로 루시의 어깨를 살짝 찔렀다. 그녀가 돌아보았다.

“잠깐 나가서 걸을래?”

필릭스가 물었다.

졸린 듯 나른한 그의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루시가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 집중하라며 거듭 다그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녀가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도서관을 나와 정원으로 갔다. 그곳에는 오랜만에 따뜻한 날씨를 만끽하러 나온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벤치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거나 여유로운 걸음으로 장미 덤불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필릭스와 루시가 정원에 나란히 나타나자, 풀밭 위에서 담요를 깔고 앉아 있던 여학생 몇 명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오늘 날씨 좋다.”

필릭스가 힘껏 기지개를 켰다.

“네. 간만에 따뜻하네요.”

“우리도 저기 앉을까?”

필릭스가 정원 한가운데서 맑은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는 분수대를 가리켰다.

“좋아요.”

필릭스와 루시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풀밭 위를 걸어갔다.

“아드리안 선배는 주말마다 집에 가시는 건가요?”

옆에서 걷던 루시가 물었다.

“응.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엔.”

“필릭스 선배는 안 가 봐도 괜찮아요?”

“오늘은 너랑 같이 공부하기로 약속했잖아?”

필릭스가 씨익 웃자, 루시의 두 뺨이 장미처럼 물들었다. 곧 그녀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

수줍게 웃던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고 보니 약이요.”

그녀가 작은 약통 하나를 꺼내 필릭스에게 내밀었다. 완성된 마르암 알레르기 약이었다.

“그동안 많이 불편하셨죠?”

“어…… 음, 그랬지.”

필릭스는 기숙사 방, 침대 맡에 놓아둔 약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루시에게는 약을 바닥에 쏟았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그의 약통은 멀쩡했다. 매일 약을 복용한 탓에 가려운 곳도 없었다.

“고마워.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하지?”

필릭스가 약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보답은 모자로 충분해요.”

그러나 필릭스는 모자로만 끝낼 생각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척척 계획이 세워졌다. 우선 밥을 사 준다는 핑계로 함께 타운에 나가기. 부티크에 들러서 그때 입어 보았던 드레스를 사 주는 것도 괜찮겠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만족스럽고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뒤쪽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아드리안.”

필릭스가 돌아보자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서 있었다. 풀밭 위에 담요를 깔고 앉아 있던 바로 그 여학생들이었다.

필릭스를 부른 것은 그와 같은 3학년인 클레어 헤밀턴이었다. 아드리안과 같은 학생회여서 몇 번 지나가다 인사를 나눈 적은 있지만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다.

“오늘 어머니를 뵈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클레어가 결 좋은 금발을 어깨 뒤로 넘기며 물었다. 슬며시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은 화려한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로제와는 또 다른, 단정하고 고상한 분위기가 있었다.

“나 아드리안 아닌데.”

“아.”

필릭스의 대답에 클레어가 조금 놀란 소리를 냈다. 그녀가 필릭스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루시를 한 번 쳐다본 후 말했다.

“도서부 후배와 함께 있어서 아드리안인 줄 알았네?”

“아드리안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그래? 몰랐어.”

클레어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자신의 눈앞에 선 베르크 공자가 아드리안이 아님을 깨닫고 나서도 클레어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여학생들이 계속해서 필릭스와 루시를 번갈아 흘끔거렸다.

“더 할 말 있어?”

그가 클레어를 향해 물었다.

“아, 그게…….”

클레어가 망설이듯 말끝을 흐리더니 친구들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녀의 친구들이 묘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빨리 물어봐.’ 하며 속삭였다.

친구들의 채근에 못 이겨 클레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별 건 아닌데, 너희 둘 혹시…….”

그녀가 말을 꺼낼 듯 말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말을 그만두었다.

“……아무것도 아냐. 역시 말도 안 되지.”

“뭐야, 할 말 있음 똑바로 해.”

“아니라니깐. 시간 뺏어서 미안.”

싱거운 말을 내놓은 클레어가 친구들의 등을 떠밀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궁금해!’, ‘물어보라니까!’ 같은 말로 클레어를 끝까지 닦달하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그들의 모습이 장미 덤불을 돌아 사라졌다. 하지만 덤불 너머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소리가 그대로 넘어와 필릭스와 루시의 귀에까지 날아들었다.

“쟤가 누군데?”

“있잖아, 도서관에서 책 정리하는 애. 나도 이름은 몰라.”

“그래? 그런데 왜 쟤가 필릭스랑 같이 있는 거지?”

“르네가 보면 울겠네.”

“무슨! 필릭스는 르네한테 관심도 없어 보이던데…….”

참새들처럼 지저귀던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주변이 다시 조용해졌다. 마치 평화롭던 정원에 잠깐의 돌풍이 불고 지나간 것 같았다.

필릭스가 돌아보자 루시는 눈썹이 축 처진 채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딱히 자신을 헐뜯거나 비웃는 말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누군가의 얘깃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게다가 그들이 루시와 필릭스를 바라보던 그 눈빛.

어째서 베르크 공자가 귀족도 아닌 평민 여자애와 단둘이 정원에 있냐고 묻듯, 그들은 입가에 묘한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루시.”

필릭스가 나직하게 부르자 루시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아 필릭스는 속이 상했다.

나 때문에…….

그가 루시의 손을 붙잡았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자.”

그가 루시를 이끌며 정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 * *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 시선들이 멀어졌다.

그들은 정원 끝의 버려진 공터까지 와 버렸다. 땅 위에는 관상용 식물 대신 잡초가 무성했고, 높다란 나무들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새소리와 주변에서 흐르는 작은 개울물 소리뿐이었다.

그때 필릭스의 손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루시의 손을 여전히 꽉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가 황급히 손을 놓았다.

“아, 미안. 아팠지?”

“괜찮아요.”

루시가 근처에 쓰러져 있던 통나무에 다가가 걸터앉았다. 그녀는 애써 표정을 감추려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풀이 죽어 보였다.

“알레르기 약 만들어 줘서 고마워. 할머니께서 약방을 하신다고?”

필릭스가 분위기를 바꾸어 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약 만드는 법도 할머님께 배운 거야?”

“……네. 어릴 때부터 약초를 구분하는 법이랑 효능을 배웠어요. 언젠가는 제가 약방을 물려받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약방에서 일하는 루시 키넌이라.

쌉싸름한 약초 향이 나는 작은 방 안에서 하얗고 고운 손이 약초를 다듬는 광경이 떠올랐다. 그녀와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아버진 제가 이왕 아카데미에 온 김에 수도에서 의사가 되길 원하시지만…….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직은 숲에서 약초를 찾아다니는 일이 더 좋기도 하고…….”

루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통나무 근처에 있던 풀꽃을 꺾었다. 그녀가 손을 대기 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새끼손톱보다 작은 노란 꽃이었다.

“병아리풀이에요.”

그녀가 가는 꽃대를 필릭스에게 보여 주었다.

“귀여운 꽃이네.”

“그렇죠? 꽃에는 아무런 효능이 없지만, 줄기는 말려 놨다가 겨울에 차를 끓여요. 감기에 좋거든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루시가 또 다른 풀꽃을 꺾어 왔다. 이번에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볼품없는 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꽃을 필릭스에게 보여 주며 쓰임새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방금 전의 의기소침한 감정은 어느새 훌훌 털어 버린 것 같았다.

필릭스는 땅에 뭐가 피어 있건 하나도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의 말만은 집중해서 들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루시의 입으로 설명을 들으니 세상 하잘것없는 풀떼기 얘기도 아주 중요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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