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9화
그가 편지를 다시 접으며 혼잣말을 했다.
몇 해 전부터 베르크 공작은 서해와 맞닿은 리부르 일대의 땅에 항구를 짓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곳에 항구가 생긴다면 서대륙과의 무역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곳의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리부르 일대에 거주해 온 일족으로서 자신의 터전이 항구로 개발되는 것을 원치 않아 했다.
생업을 잃을 위기에 처한 그들은 항구 건설을 결사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작은 마을 하나가 제국의 공작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공작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 보다 윤택한 삶을 살게 해 주겠다’는 말로 꼬드긴 다음, 청년들을 다른 도시로 내쫓아 버렸다. 그리고는 마을에 노인들만 남은 틈을 타 항구 건설을 밀어붙였다. 주민들은 변변찮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가진 것들을 빼앗겨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항구의 개항식에 참석하라는 의미는 단 하나였다.
차기 베르크 공작으로서, 필릭스 역시 가문의 토지를 확장하고 개척하는 데 힘쓰라는 것. 그 과정에서 누군가 터전을 잃고 쫓겨난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필릭스의 생각은 아버지와 같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베르크 가문의 땅과 사업은 이미 한 가문이 관리할 수 있는 한계치에 달해 있었다. 이 이상 땅을 넓히고 사업을 벌이는 건 욕심에 불과했다.
그가 곧장 편지 뒷장에 공작에게 보낼 답장을 썼다. 곧 아카데미 시험이 다가오고 있으니 개항식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필릭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드리안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아버지께서 가만있지 않으실 거야.”
“상관없어.”
필릭스가 즉각 대꾸했다.
“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아드리안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한번 결심한 일은 절대 번복하지 않으셔. 분명 다른 수를 써서라도 널 불러들이실 거야.”
“아드리안.”
동생의 우려에 필릭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해?”
그들의 할아버지인 로벤 베르크 공작은 북방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땅을 정복하러 가던 중 마차 안에서 죽었다. 과로사였다.
죽기 전의 그의 몰골은 감당할 수 없는 업무량으로 인해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수척한 모습으로도 그는 탐욕 가득한 눈을 희번덕이며 온 대륙을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살다간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 거야.”
필릭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하며 답장을 넣은 편지를 봉했다.
* * *
주말 아침.
일찌감치 일어난 필릭스가 도서관으로 갈 준비를 했다. 방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아드리안은 전날 밤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떠났다. 학생회 일도, 도서부 일도 없는 주말이면 그는 성실히 어머니를 뵈러 가곤 했기 때문이다.
준비를 마친 필릭스가 설렘 가득한 발걸음으로 기숙사를 나섰다. 시험공부를 하러 가는 길이 이토록 즐거우리란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날씨마저 그의 마음을 대변해 주듯 쾌청하기만 했다.
요 며칠 동안 교정을 뿌옇게 휘감고 있던 안개가 사라지고, 하늘에는 간만에 따뜻한 해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가는 교정 위로 가을볕이 쏟아져 내렸다.
도서관에 도착하니 자리는 반만 차 있었다. 시험이 시작되려면 아직 이 주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으므로, 나머지 절반의 학생들은 시험 준비를 제쳐 놓고 따뜻한 주말의 햇살을 즐기기로 한 모양이었다.
“필릭스 선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도서관 앞에 서 있던 필릭스가 뒤를 돌아봤다. 품에 책을 가득 든 루시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녀가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와 그의 앞에 섰다.
루시가 든 책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필릭스가 얼른 그 책들을 넘겨받았다.
“이걸…… 오늘 다 하겠다고?”
필릭스가 인사하는 것도 잊고서, 엄청난 양의 책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그의 말에 루시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이건 선배 거예요.”
“내 꺼?”
“얼른 오세요.”
루시가 지체 없이 그를 도서관 안으로 떠밀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 쪽에 앉아 있던 학생들 몇몇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둘을 흘끔거렸다. 더군다나 루시가 평소처럼 대출 반납대로 가지 않고 창가 테이블에 필릭스와 나란히 자리를 잡자 무어라 귓속말로 소곤거리기까지 했다.
루시가 책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사이, 필릭스가 매서운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봐 주었다. 그러자 학생들이 얼른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선배, 여기요.”
루시는 들고 온 책들 중 몇 권을 추려 필릭스 앞에 펼쳐 놓았다. 군데군데 책갈피로 그가 읽어야 할 부분이 표시되어 있었다.
“대체 2학년이 3학년 시험 범위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도서부의 3학년 선배에게 물어봤어요.”
루시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준비해 온 것을 보니, 아무래도 필릭스의 성적표는 그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그녀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같았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루시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더니 작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덧붙였다.
“선배, 할 수 있어요!”
곧바로 책을 펼친 루시는 무서운 속도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열의에 필릭스는 차마 말을 걸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책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모두 그가 알고 있는 내용이긴 했다. 하지만 루시가 이토록 열성적으로 도와주려고 하니, 자신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필릭스는 자세를 고쳐 잡은 뒤 얌전히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루시가 필릭스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그가 돌아보자 그녀가 미간에 주름이 잡힌 채로 그를 보고 있었다.
“선배, 읽고 있는 거 맞아요? 왜 책장을 안 넘기세요?”
그녀가 속삭이며 물었다.
“집중해서 읽으셔야 해요. 이따가 제가 물어볼 거예요.”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필릭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루시의 이마에는 더욱 깊은 주름이 패었다.
“왜 웃으세요? 어려운 거 물어볼 거예요. 정말로 어려운 거.”
“그래, 알았어.”
필릭스는 여전히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책을 읽는 척하던 것도 잠시.
어디선가 번개가 내리친 것처럼, 필릭스의 머릿속에 책의 내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생각이 들이닥쳤다.
……루시가 공부하는 모습은 얼마나 귀여울까!
그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집중하는 루시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책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녀의 반듯한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혀 있었다. 꾹 다물고 있는 입술이 그 어느 때보다 귀엽고 야무져 보였다.
손은 또 어떻고.
아래로 옮겨 간 필릭스의 시선이 가만히 그녀의 손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쉼 없이 종이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있는 그녀의 손은 한눈에 보기에도 매끈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게다가 얼마나 작은지 그녀의 두 손을 한 손안에 다 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작은 손이 써 내려가는 글자도 제 주인을 닮아 동글동글했다. 크기와 간격이 모두 일정한 것이 평소 그녀의 차분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했다.
필릭스는 계속 흘끔대며 종이를 채워 나가는 루시의 글자들을 훔쳐보았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녀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가슴속에서 무언가 자꾸 울렁거렸다.
열심히 움직이던 루시의 손이 우뚝 멈췄다.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 할 말 있으세요?”
필릭스는 얼른 시선을 내렸다.
“아니. 방해 안 할게.”
그가 책을 보는 척했다. 이내 루시도 노트로 눈을 돌렸다. 사각사각, 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다시 기분 좋게 들려왔다.
그러나 필릭스의 시선은 여전히 어느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페이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싹 달아난 지 오래였다.
……사실 그가 궁금한 건 책 속에 없었다.
필릭스가 정말 알고 싶은 건 에페르 왕조가 언제 무너졌는지, 베로스 제국이 언제 대륙을 통일했는지 따위가 아니었다. 루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그는 루시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멍하니 책만 들여다보던 필릭스가 이내 결심한 듯 노트 귀퉁이에 무언가를 휘갈겼다. 그리고는 노트를 천천히 루시 쪽으로 밀어 자신이 쓴 것을 보여 주었다.
“뭘 좋아해?”
루시가 그 질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난데없이 뭘 좋아하냐고 묻는 그의 의도를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잠시 뒤 그녀가 그 밑에 무언가를 적어 필릭스에게 넘겨주었다.
“할머니가 해 주신 고기 파이요.”
아아. 루시네 할머님이 해 주신 고기 파이. 그거 맛있지.
필릭스는 그것을 먹어 본 적도 없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흐뭇하게 웃던 그가 루시의 답변 아래 또 무언가를 적었다.
“다른 건?”
이번에도 루시는 그가 쓴 질문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내 그녀의 손이 노트 위에서 움직였다.
“가을이요.”
가을이라니.
난 가을이 제일 싫은데.
매년 마르암 덩굴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해 왔던 필릭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루시가 좋아하는 계절이라고 하니, 창밖의 가을 풍경이 어쩐지 다른 때보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 같았다.
나도 이제부터 가을을 좋아해 봐야지.
창밖에서 눈을 뗀 필릭스가 또 펜을 그러쥐었다. 이번에는 꽤 많은 질문을 적어 내밀었다.
“좋아하는 색깔은? ……좋아하는 동물은? ……고기 파이 말고 또 좋아하는 음식은? 아, 타운에서 사 먹을 수 있는 걸로. ……콜린 코너는 뭘 제일 무서워해?”
루시가 입을 떡 벌렸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더니,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기엔 턱없이 짧은 한 문장을 적었다.
“선배! 빨리 책 보세요!”
루시가 꽤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하는 수 없이 필릭스는 노트를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