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8화 (18/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8화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왠지 도토리를 빼앗긴 다람쥐 같기도 하고.

“위로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대도.”

필릭스가 자꾸만 비죽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자제하며 말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해명할게. ……나 문제 풀 때 발은 안 썼어.”

“저, 저도 알아요!”

루시가 정말 억울한 표정으로 냅다 소리를 질렀다.

필릭스는 결국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어깨가 들썩거리자 루시가 더욱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 우시는 거예요……?”

루시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정말…… 정말 우시는 거예요?”

필릭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일부러 우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래. 네 말마따나 난 멍텅구리 울보야.”

“네에? 저 그런 말은 안 했어요!”

“난 트롤 발톱 때야.”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세요!”

“난 미끼로도 못 쓸 갯지렁이야.”

“그렇지 않아요!”

갑자기 루시의 손이 필릭스의 두 뺨을 감싸 쥐더니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필릭스가 놀라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선배!”

루시가 그의 뺨을 감싼 채 울먹거리며 말했다.

“선배 갯지렁이 아니에요!”

필릭스는 그녀를 놀리려던 것도 잊은 채 숨을 멈췄다.

“어…….”

“살다 보면 그런 점수를 받을 수도 있죠!”

“나는…….”

“다음 시험에서 잘하면 되잖아요!”

말을 끝낸 루시가 여전히 필릭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꼭 감싼 채 작은 숨을 들썩였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왜…….”

필릭스가 참았던 숨을 천천히 토해 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울려고 그래…….”

사람 오해하게.

“아!”

그제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깨달은 루시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뒀다. 하지만 뒤로 물러서기도 전에 필릭스가 그녀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

“……그럼 네가 도와줘.”

필릭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열기가 올라 있었다.

“네가 옆에서 봐 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시험공부 같이하자.”

루시가 필릭스의 커다란 손에 손목이 붙잡힌 채로 눈을 크게 떴다.

“네 공부 방해 안 할게.”

그녀가 대답이 없자 필릭스가 얼른 덧붙였다.

“안 돼?”

그가 초조하게 루시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막상 승낙이 떨어지자 얼떨떨해진 필릭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같이해요.”

루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필릭스의 얼굴에 환한 빛이 떠올랐다.

이거 꿈인가?

루시 키넌과 무려 도서관 데이…… 아니, 시험공부라니!

이것으로 그는 루시와 더 가까워질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저…… 선배. 그런데 이것 좀 놔주세요.”

필릭스가 기뻐하는 동안 그의 손에 손목이 붙들려 있던 루시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 미안.”

그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놓았다.

“그럼 우리…….”

‘언제 만날까?’ 하는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철컥, 철컥!

별안간 문손잡이가 요란하게 돌아갔다.

“루시! 안에 있어?”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리며 물었다. 콜린의 목소리였다.

“문이 또 왜 이래? 걸핏하면 고장이라니까!”

문 건너편에서 콜린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필릭스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넌 또 왜 왔어? 벌 청소나 하지.”

그가 기어코 서고까지 쫒아온 불청객을 향해 불만스럽게 내뱉었다.

“필릭스 선배! 정말 이러기예요?”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콜린이 즉각 서운함을 토로했다.

“어떻게 저만 두고 가실 수 있어요? ‘진짜 아드리안 선배’가 와서 구해 주지 않았다면 저 정말 복도 청소했을지도 모른다고요!”

“그것참 아깝네.”

필릭스가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거머리 같은 자식. 분위기 좋았는데.

“콜린, 아무래도 손잡이가 고장 났나 봐. 아드리안 선배가 여는 법을 알 텐데, 좀 불러다 줄래?”

문으로 다가간 루시가 건너편을 향해 말했다.

“응? 그 구멍으로 빠져나오면 되잖아!”

콜린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 무슨 구멍?”

갑자기 루시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네가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빨리 아드리안 선배나 불러 줄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번에 갇혔을 때 우리가 빠져나왔던 구멍!”

건너편에서 콜린의 답답해하는 목소리가 곧장 날아들었다. 루시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그, 글쎄……. 그런 게 있었나?”

“참나! 루시, 기억력에 문제라도 생긴 거야?”

콜린이 ‘이 구멍 말이야!’ 하며 어딘가로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서고 한구석에서 콜린의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필릭스는 알아채지 못했던 작은 환기창이 거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루시! 필릭스 선배!”

구멍으로 머리를 쏙 내민 채 콜린이 그들을 향해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끙차!”

곧 그가 구멍 속으로 한껏 몸을 구겨 넣기 시작했다.

“봐, 이렇게 나오면 되잖아!”

“피, 필릭스 선배는 그리로 못 나가!”

구멍을 빠져나오기 위해 뱀처럼 꾸물거리는 콜린을 향해 루시가 퉁명스럽게 외쳤다.

“아, 그런가?”

콜린이 구멍 안에서 용을 쓰다가 자신보다 월등히 큰 체격의 필릭스를 올려다보았다.

“아무튼 네가 이리로 나와서 사람을 불렀으면 됐을 텐데. 필릭스 선배는 무리겠지만 너라면…… 앗, 잠깐!”

갑자기 콜린이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꽉 끼는 거지?”

어깨가 반쯤 빠져나온 콜린이 나머지 몸뚱이를 마저 빼내기 위해 몸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버둥거려도 그의 어깨는 구멍 속에서 꿈쩍도 안 했다.

“야아…… 루시! 좀 도와줘! 어깨가 구멍에 끼었나 봐!”

그가 난감한 얼굴로 도움을 청했다.

“필릭스 선배!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좀 도와줘요!”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루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못 살아.”

작게 중얼거린 그녀가 콜린을 도와주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루시.”

필릭스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네?”

“잠깐 뒤로 물러나 있어.”

필릭스가 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지시에 루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뭐야, 왜 안 도와줘요!”

콜린이 재촉하는 소리를 무시하여 필릭스가 잠긴 문을 몇 번 흔들어 보았다. 경첩이 아슬아슬하게 덜렁거렸다.

이내 그가 한 발짝 물러서는가 싶더니, 발로 문을 세차게 걷어찼다.

쾅!

헐겁게 붙어 있던 경첩이 단번에 떨어져 나가며, 문짝이 복도로 날아가 버렸다. 바닥에 우당탕 넘어진 문짝 아래서 뽀얀 먼지가 피어올랐다.

“뭐야! 이게 무슨 소리예요?”

놀란 콜린의 겁먹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코너, 사람을 불러다 줄 테니 잠시만 그러고 있어.”

필릭스가 콜린을 향해 말했다.

“예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콜린이 버둥거리며 물었다.

“설마 또 저만 두고 가시는 거예요? 아니죠?”

혼자 남겨질 위기를 직감한 듯 그의 얼굴이 곤혹스러움으로 물들어 갔다.

“먼저 가자.”

필릭스가 콜린의 말을 무시한 채 루시를 이끌었다.

“루시! 나 두고 가지 마!”

콜린의 애처로운 외침이 서고 안에 울려 퍼졌다.

“미안해, 콜린…….”

루시가 난감한 표정으로 필릭스의 손에 이끌려 서고를 따라 나갔다.

* * *

콜린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을 즈음 필릭스는 자리에 멈춰 섰다. 시끄러운 방해꾼이 사라졌으니 비로소 루시와 대화를 마저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럼 도서관에서는 언제 볼까?”

그가 루시에게 물었다. 그녀가 말을 번복할 수 없도록 아예 시간까지 정해 놓을 셈이었다.

필릭스의 물음에 루시가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주말은 어떠신가요?”

그녀가 제안했다.

“이번 주 주말부터 에린 부인께서 도서관 업무를 모두 맡아 주시기로 했어요. 도서 부원들도 중간고사를 준비해야 해서요.”

“그래?”

주말 도서관 데이…… 아니, 시험공부라.

필릭스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주말 좋지.”

그가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표정을 숨기며 대답했다.

“그럼 이번 주말 열 시에 도서관 앞에서 보는 거다?”

“네.”

루시가 대답했다.

필릭스의 만면에 만족스런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다.

* * *

마지막 수업을 끝낸 필릭스가 휘파람을 불며 기숙사로 돌아왔다. 항상 그보다 늦게까지 아카데미에 있던 아드리안이 웬일로 방에서 그를 맞이해 주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그가 싱글벙글한 필릭스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아니, 별로.”

필릭스가 얼른 표정을 감추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드리안에게만큼은 루시와의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싱겁긴.”

아드리안이 그런 형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채 책상 위에 있던 편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네 기분을 망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며 아드리안이 그것을 필릭스에게 내밀었다.

“아버지께서 네게 편지를 보내셨어.”

그 말에 느긋하게 교복을 벗던 필릭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루시와의 약속으로 하늘 높이 치솟아 있던 그의 기분이 금세 바닥까지 떨어졌다.

필릭스가 편지를 받아들었다. 봉투에는 익숙한 베르크가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그가 성의 없는 손길로 봉투를 찢어 열었다.

편지에는 ‘이번 주말, 리부르 항구 개항식에 참석하라’는 짤막한 문장이 안부 인사도 없이 덜렁 적혀 있었다.

“하아…….”

필릭스가 한 손으로 머리를 헤집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가 편지를 내팽개치듯 책상 위에 던졌다.

“뭔데 그래?”

아드리안이 편지를 집어 들었다. 잠시 후 내용을 확인한 그의 미간에도 주름이 잡혔다.

“리부르 항구……. 결국 아버지께서 해내셨군.”

0